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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Jan 06. 2022

도덕의 잣대 대신 공감과 이해로 바라본, <비올레타>

혼란 속 빛이 되는 어긋난 모녀의 성장담

영화 <비올레타>에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탄받아왔던 금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 그 충격적인 이야기가 허구가 아닌 감독의 경험담이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어떠한 도덕적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직 어린 자신의 딸을 모델로 성적인 사진을 찍던 어머니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영화는 구태여 그러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야 답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고, 영화에서도 그 답이 그대로 드러나니까.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선과 악의 대립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갈등도 아니다. 영화는 우리의 손에 도덕의 잣대를 쥐어주는 대신에, 우리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 아이의 입장에서 그들을 바라보게끔 했다. 그때의 우리는 부족하고 서툴며 아직은 잘 모르는 것 투성이었기에, 당장 타오르는 마음을 좇다가 번번이 후회하곤 했다. 마치 한나(이자벨 위페르)와 비올레타(아나마리아 바토로메이)처럼. 결국 영화가 보여주려 했던 것은 누가 얼마나 나빴는지가 아니라, 왜 그들이 그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이 어떻게 나아갔는지다.



비올레타에게는 사랑이 필요했다. 엄마 한나는 예술가의 꿈을 이루겠다며 매일을 집 밖에서 보냈고, 유일한 가족인 증조할머니는 어리광을 받아주기엔 너무나 노쇠했다. 할머니는 최선을 다해 그를 돌보았지만, 역시 어머니의 부재는 채울 수 없던 걸까. 비올레타는 항상 엄마가 오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참관 수업에도, 선생님과의 면담에도 엄마는 항상 일이 먼저였고, 때문에 학교로 데리러 오거나 간식을 만들어주는 것조차 꿈에서나 그려볼 일이었다.


늘 그래 왔듯 홀로 집으로 돌아오던 날, 갑자기 돌아온 한나는 비올레타를 자신의 작업실로 초대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함께 과자를 먹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은 여느 모녀와 다를 게 없었다. 비올레타에게는 꿈만 같은 순간이었겠지. 갑작스레 가까워진 엄마에게 당황하고 어색해하면서도 그 거리를 조금이라도 더 좁히고 싶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한나의 "모델 해줄래?"라는 말에 비올레타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리라.



모델 작업을 시작하며 비올레타는 이제 한나와 생활을 함께 하게 됐다. 학교가 끝나면 1층에서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고, 엄마가 가는 곳에는 자신도 꼭 따라다니게 됐다. 아이들 사이에선 화보 촬영을 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갤러리의 어른들은 입을 모아 그의 사진을 칭찬했다. 한나의 말처럼, 평범하고 외로웠던 그의 삶이 어느 순간 공주님처럼 변해있던 것이다.


누구라도 그 생활을 이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비올레타에게는 그 수단이 한나와의 촬영이었고, 그래서 그는 점점 더 엄마가 요구하는 이미지에 자신을 맞춰갔다. 아이들과는 다른 스타일의 옷을 입었고, 화장과 흡연을 시작했으며, 언제나 사진 포즈 연습을 쉬지 않았다. 모든 것은 계속 빛나기 위해. 그리고 엄마와 더 가까워지기 위해. 이제는 그만 멈춰야만 했음에도 그는 그러지 못했다.


비올레타의 노력을 한나는 재능이라 여겼던 걸까. 자신은 사진작가로, 딸은 모델로 인정받으며 부와 명예를 모두 얻겠다는 그 욕망이 너무나 커졌던 걸까. 딸의 탈선을 막아주기도 전에 한나 자신이 먼저 어긋나고 말았다. 한나의 요구는 갈수록 더 자극적이 되어갔고, 엄마를 따라가던 비올레타에게는 혼란이 찾아왔다.



이게 맞는 일일까. 정말 내가 원했던 걸까. 열심히 노를 젓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저 흘러가는 물살 위의 나뭇잎배였던 건 아니었을까. 우리는 살면서 이러한 의문에 몇 번이고 부딪힌다.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방황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를 다잡아주는 건 바로 내가 꿈꾸는 뚜렷한 목표의식이다. 누군가에게 선택을 맡겨놓은 채로는 그 물살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에, 가고자 하는 방향을 또렷이 바라보는 것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가장 큰 힘이 된다.


탈선한 비올레타는 자신을 잡아줄 누군가의 온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엄마에게 미래를 이야기했고, 복지사를 찾아가 도와달라 했으며, 교회의 할머니에게 따스함을 부탁했다. 하지만 엄마의 눈은 사진 속 이미지에 가려져 있었고, 세상의 귀는 매뉴얼에 막혀 이어지지 못했다. 엄마에게 내려진 고발장으로 시간은 줄어드는 와중, 답을 찾지 못한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더 이상 없어 보였다. 판사의 결정에 따라 그의 미래가 정해지고 엄마와의 관계도 그렇게 끝나버릴 것만 같았다.


*이 앞에는 결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앞서 이 영화가 성장담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동학대의 죄목으로 고발장이 내려오고 집에 복지사가 감사를 나오고 있는데도, 영화는 모녀 사이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분을 지으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들을 그러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기를 바라는 듯했다. 왜냐하면 이후 영화에서 법정 장면은 모두 생략되고, 비올레타와 한나의 선택만이 화면을 채워갔으니 말이다. 우리가 옳고 그름의 판단보다는 그들 마음의 변화에 더 주목하기를 소망했던 게 아닐까.


비올레타는 판결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 보호 시설에 들어갔다. 스모키한 화장법에 짧은 머리, 명품 드레스가 아닌 직접 만든 포대 같은 옷. 그곳에서의 비올레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따라다녔던 엄마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행복을 찾아 나아가고 있었다. 처음 그가 원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영화의 시작은 늦은 밤 홀로 사방치기를 하던 그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그는 눈높이를 맞추어, 보폭을 맞추어 함께 웃을 누군가를 원했던 게 아닐까. 시설 속 그의 옆에 있던 두 명의 친구에게서 그 희망이 보여 조금은 안심이 됐다.



성장하기 시작한 건 비올레타만이 아니었다. 사실 가장 큰 변화는 한나가 아니었을까. 비올레타가 도망칠 때면 한나는 언제나 쫓아가, 왜 그러냐고 다그치며 자기 생각을 쏟아내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둘 사이의 마찰은 더욱이 심해져 관계가 어긋나고 상처만이 쌓여갔다. 영화의 마지막, 한나는 비올레타가 있는 보호 시설을 찾았고, 이를 듣자마자 비올레타는 시설을 빠져나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 처음에는 한나도 뒤를 쫓아 숲 속으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곧바로 멈춰 서고는 그저 사랑한다고 외칠 뿐, 더 이상 쫓아가지 않았다. 이제는 딸을 놓아주게 된 걸까. 자신의 의지가 아닌 딸의 의지를 믿어주기 시작한 게 아니었을까.


비올레타도 한나도, 모두가 어렸다. 나이는 많았지만 누구 하나 엄마란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주지를 않았으니까. 그들 모두가 각자 딸이 처음이었고, 엄마가 처음이었다. 때문에 서로의 생각이 앞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고, 서로가 너무 미워 떠나고만 싶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이였기에 성장할 수 있었고, 덕분에 증오로만 기억될 아픔이 애증으로 남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도덕적인 잣대로만 영화를 봤다면 그들의 성장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우리 또한 거쳐왔던 길이기에, 그 속에서 희망을 찾아낼 수 있던 게 아니었을까. 만일 누군가 지금 혼란 속에 힘들어한다면, 이 영화를 보고 우리들의 성장담을 되뇌어 보는 것을 추천한다.




※ 개봉 전 배급사 알토미디어㈜에서 제공한 스크리너를 통해 관람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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