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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Feb 22. 2022

놓아줌으로써 시작되는 인연의 가능성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을까? 눈 한번 깜빡하면 나도 몰래 변해버리는 세상이기에. 그 속에서 무언가를 유지하려면, 그에 걸맞은 대단한 의지가 필요할 것이다. 잠깐이라도 눈을 떼면 어느샌가 변해버리고 말 테니까. 양팔로 꽉 끌어안고 세상의 섭리에 맞서야 할 것이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다. 영원히 타오를 것 같던 사랑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 같던 분노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희미해져 처음의 기세를 다 잃어버리곤 한다. 그러니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건 분명 없으리라. 그저 그 흐름을 막음으로써 감정을 붙잡고는, 변하지 않는다고 되뇌는 나의 모습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감정을 그저 흘러가는 대로, 시시각각 변해버리는 대로 방치해서는 안 되겠지. 하지만 반대로 그 모든 흐름들을 거부하며 감정에 집착하여도 안 될 것이다. 나는 곧잘 과거에 집착하고 만다. 그곳에 머무르며 그때의 감정에 묻혀버리곤 한다. 떠나간 사랑에 여전히 후회하고, 지나간 일들에 하나하나 불을 지핀다. 그때의 감정들을 고스란히 끌고 와 현재의 나에게 덮어 씌우며, 변하지 않기를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그로 인해 결국은 지금의 나와 내 주변을 해치면서도, 집착의 끈을 쉽사리 놓지 못해 왔다.



영화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는 크게 두 개의 이야기를 축으로 삼고 있다. 주인공 샤오룬(가진동) 일행이 펼치는 월하노인 이야기와, 귀두성의 복수로 진행되는 악귀 이야기. 특별한 설명 없이 각각의 장소에서 흘러가던 두 이야기는 영화의 결말에 다다라서야 하나로 이어졌다. 때문에 만일 이 영화를 그저 로맨틱 코미디 혹은 대만 멜로의 연장선으로 생각하며 극장을 찾았다면, 중간중간 삽입된 잔혹한 복수극에 당황했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나부터가 그랬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악귀의 등장에 조금 당혹스럽기도 했다. 예고편이나 포스터, 시놉시스까지도 모두 월하노인과 붉은 실 설화만을 이야기하고 있었기에, 악귀라는 설정부터가 내게는 예상치 못한 한 방이었다. 그것도 단순히 지나가는 악역이 아니라, 영화 내에서 나름의 입지를 지닌 서브 스토리의 주연이라니. 실제로 두 이야기 사이의 괴리 때문에 영화의 호불호가 나뉘고 있다는 점에서, 악귀의 등장은 감독에게 있어서도 커다란 도전이었을 것이다.


관객에게 어색함을 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로맨스와 공포라는 서로 다른 두 장르를 합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째서 감독은 귀두성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도전을 택했던 걸까. 그것은 분명 샤오룬과 귀두성 두 사람의 이야기에 장르의 차이를 뛰어넘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며, 그것이야말로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를 가리키기 때문일 것이다.



샤오룬과 귀두성,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나 세 사람은, 다른 듯 보이면서도 닮아있었다. 우리들은 모두 과거에 묶인 채 그때의 감정에 매달린 사람들이다. 흘러가버린 시간과 바뀌어버린 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멈추지를 않은 사람들이다. 평생을 샤오미(송운화)만 바라봐온 샤오룬의 사랑도, 500년간 잊지 않고 칼날을 갈아온 귀두성의 분노도, 집착이라 부르기가 망설여질 정도로 이해되고 공감되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그들의 마음과 달리 현실은 제자리에 머물러있지 않았다.


샤오미를 남겨둔 채 샤오룬은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버렸고, 귀두성을 배신했던 형제들은 환생을 거듭하며 다들 기억을 잃고 말았다. 사랑도 복수도 그들은 무엇 하나 맺을 수가 없었다. 그들 스스로도 아마 알고 있었으리라.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반복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렇기에 샤오룬은 월하노인의 일을 던져둔 채 샤오미의 곁을 맴돌았고, 귀두성은 악귀가 되어 환생한 형제들을 찾아다녔다. 그 마음을 알기에 무어라 말할 수 없으면서도, 또 그 마음을 알기에 더욱 안타깝고 안쓰러웠다. 감독은 내게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던 걸까. 두 사람의 이야기가 합쳐져서야 비로소 그 답을 알 수가 있었다.



귀두성이 마지막 복수로 샤오미를 공격하려는 순간, 그들의 전생이 밝혀지며 그들 사이에 인연의 실이 이어져있음이 드러났다. 시간이 흐르고 모습이 바뀌었지만 그때의 인연은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 지금 그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었던 것이다. 귀두성이 베푼 작은 호의는 샤오룬의 목숨을 살렸고, 그렇게 태어날 수 있었던 샤오룬은 이번에는 샤오미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불태웠다.


이로써 샤오룬의 사랑은 완전히 끊어지고 말겠지. 공격을 거둔 귀두성에게는 더 이상 분노가 필요치 않겠지. 그들은 그제야 고집하던 감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극락을 부정하던 귀두성이 마치 해탈한 듯 편안하게 스러져갔던 것도, 덕을 쌓지 못했던 샤오룬이 인간으로 환생할 수 있었던 것도 붙잡아오던 것들을 놓아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만년이 지나도 세상이 변해도 바뀌지 않는 것은 따로 있음을 이제는 받아들이게 되었으니까. 그 변화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인연의 가능성을 이제는 믿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영화는 환생한 샤오룬이 샤오미의 앞에 나타나면서 끝이 났다. 이제는 사랑이 아니지만. 어쩌면 그럼에도 그들은 또다시 인연을 이어갈지도 모른다. 구파도 감독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은 놓아줌으로써 시작되는 인연의 가능성이 아니었을까. 변하지 않는 건 없다 할지라도, 어떤 모습으로든 다시 만나게 될 가능성. 그 인연의 가능성이야말로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아닐까. 그러니 새로운 인연을 위해 조금은 감정들을 놓아주라고, 조금은 여유로운 삶을 살아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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