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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Feb 27. 2022

다시 한번 내 마음에 불을 지필 때, <소년심판>

번듯한 어른이 되겠다는 다짐

하루에도 스마트폰 화면에는 수천 개의 소식들이 떠오른다. 뉴스들마저 속도 경쟁을 하는 이 시대이기에, 우리의 속도도 그 물살에 따라 점점 빨라져만 갔다. 빠르게 판단하고 빠르게 공감하며, 때로는 편을 나누어 또 때로는 하나가 되어. 하나둘 입을 모아 옳다고 생각한 그 결심들을 외쳐왔다. 하지만 어쩌면 우린 너무나도 빨라져 버린 걸까. 누군가는 댓글창에, 누군가는 SNS에, 또 누군가는 거리 위에. 그 외침들만을 남겨놓은 채 어느샌가 우린 다 잊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빠르게 타올랐던 그 불꽃은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어제의 가십거리에 떨어지고 말았다.


반인륜적인 범죄다. 납득이 안 되는 형량이다. 사형제를 부활시키자. 소년법을 폐지하자. 커다란 사건에는 꼭 따라붙는 익숙한 울림들이다. 사건이 언론에 실리면 세상은 약속이라도 한 듯 울림으로 가득 차고, 유통기한이 지나면 기억 너머로 사라져 다음 사건을 기다린다. 그토록 화가 났는데, 그렇게나 씁쓸했는데, 지금도 떠올리면 감정들이 떠오르는데. 그럼에도 울림은 이어지지 않았다. 세상이 변하지 않을 걸 알아서일까? 내가 좋은 어른이 아니기 때문일까? 이때까지는 그런 의문조차 가져보질 않았다.



넷플릭스의 새로운 드라마 <소년심판>은, 우리에게도 뜨거운 감자인 '소년범'에 대해 다룬다는 점에서 공개 이전부터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모든 관심이 긍정적이지만은 않듯, <소년심판>에의 시선에는 기대만이 아니라 우려 또한 섞여 있었다. 소년범을 혐오한다는 캐치프레이즈처럼 과격한 엄벌주의로 흘러가진 않을지, 혹은 반대로 소년범들의 입장만을 변호하며 동정 몰이를 하진 않을지. 그저 선과 악의 대결을 그리기 바빴던 법정물의 전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등 작품의 방향성의 귀추가 주목되었다.


마침내 공개된 작품은 1화에서부터 그 목적과 성격을 확실히 했다. 일견 사이다와 같은 통쾌함을 보여줄 듯했던 심은석(김혜수) 판사와, 알면서도 답답할 정도로 사람이 좋은 차태주(김무열) 판사. 두 주연의 합이라는 균형의 수를 통해 드라마는 감정의 늪으로부터 우리의 손을 잡아끌었다. 엄벌과 교화, 양쪽의 의견을 모두 들음으로써 우리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이성적으로 사건을 바라보게끔 했다. 소년범들이 처한 환경과 현실에 조명을 비추었지만 과도한 신파로 이끌지는 않았다. 그들의 선택이 범죄임을 되뇌면서도 단순한 자극으로 소비하지 않았다. 우리가 소년사건의 현주소에 안타까워하고 분노하면서도, 옳고 그름을 인정하는 냉정함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물론 이 작품에도 법조인들 간의 대립과 갈등은 존재한다. 심은석의 이상은 도저히 현실과 부딪히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까. 소년사건은 속도전이라던 나근희(이정은) 판사. 그의 당당함에 어쩌면 화면을 멈추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사건의 진상을 확인하기보다 빠른 처분을 더 우선하다니. 그의 신조는 결코 정의로운 판사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를 욕할 수가 없었다. 욕해서는 안 됐다. 과연 그가 악인이라서 그랬을까? 사건을 경시하고 피해자를 외면했기에 그랬을까? 그는 그저 현실의 평범한 판사였을 뿐이었다. 뒤틀린 시스템 속에서 속도로 밖에 아이들을 마주할 수 없었던 현실의 판사들 중 한 명이었을 뿐이었다. 나 역시 평범함에 숨어 많은 것을 잊어온 사람이었기에, 내게는 그를 비난할 자격 따위 없었다.



고작 3분이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재판받으러 와서 처분까지 걸린 시간이.


드라마는 현실을 담아내었고, 그 현실이 초래한 소년범이라는 비극을 보여주었다. 엄벌이든 교화든, 3분이라는 시간 안에 무언가를 바꾼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던 시스템은 과연 정의로운 걸까. 그 모든 것들을 비난하기 전에, 우선 나부터가 그들을 3분 이상 바라본 적은 있었을까. 작중의 대사처럼 그저 흥미로운 기사 한 줄이라 생각하며 잠시 분노하고 잠시 슬퍼하다 빠르게 흘려보낸 감정들은 아니었을까.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쉽사리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중요하다 생각했으면서, 정작 나는 얼마나 많은 사건들을, 사람들을 지나쳐온 걸까. 스스로에게 혐오감이 들끓었다.


현실을 대변하던 나근희는 심은석의 이상과 만나 커다란 변화를 시작했다. 시간이 아깝다며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 못하게, 그 자리에 있을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 했던 그가 마지막 에피소드가 되어서야 피해자에게 속마음을 꺼낼 시간을 주었던 것이다. 그 시간을 기다려주었고, 그 작은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드라마 <소년심판>이 극의 클라이맥스인 마지막 사건을 심은석이 아니라 나근희의 결정에 맡긴 것도 분명 현실이 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리고 이 드라마를 통해 지금의 나도 나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해준 게 아니었을까.



감정에 치우친 대중들과 감정을 지워버린 판사들. 사실 나에게는 그들 누구를 지적할 자격도, 그들에게 무언가를 종용할 자격도 없다. 나부터가 내가 말하는 번듯한 자세를 취하지 못해 왔으니까. 그러니 이 글은 그저 나의 다짐이다. 여전히 피해자는 구원받을 수 없고, 가해자는 갱생될 수 없다. 그러한 세상이다. 분노함은 변하지 않고 혐오감 또한 계속되겠지. 그렇지만 그 속에서 나부터가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나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외쳤었는데, 조금이라도 더 오래 그 마음을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저 분노로 연소하고 혐오로 비난하기만 해서는 우리의 본질마저 흘려보내고 말겠지. 이제껏 그래 왔듯 분노로 타오른 불꽃은 금방 또 꺼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 심은석이 그랬고, 나근희가 그랬듯 냉정함을 유지한 채 차갑게 타올라야겠지. 이제 겨우 여기까지 왔다. 선악을 따지는 수준에서 벗어나, 어째서 그 악이 사라지지 않는지 근본을 좇을 수 있게 되었다. 냉정함을 잃어갈 때면, 불꽃이 또 다 타버릴 것 같을 때면. 이 드라마를 기억해보면 어떨까. 지금 내가 느낀 감정들. 이제껏 내가 놓쳐온 감정들. 모범이 되어 이끌어줄 수 있는 더 번듯하고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서. 이 글에 꾹꾹 눌러 다짐을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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