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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Mar 04. 2022

리들러의 시점으로 다시 쓰는, <더 배트맨>

공포의 상징에서 다크 나이트로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드워드 내쉬튼, 일명 리들러(폴 다노)가 나타났다. 특유의 녹색 중절모와 물음표 지팡이 대신, 복면을 쓴 채 덕트 테이프를 든 모습으로. 경찰을 조롱하고 배트맨마저 이용하며 추종자들을 거느린 복수의 화신으로서 스크린에 올랐다. 영화 <더 배트맨>은 그림자를 자처하던 배트맨(로버트 패틴슨)이 진실과 마주하며 희망의 상징이 되는 성장 스토리인 동시에, 그 진실 속에서 버림받은 한 아이가 리들러로서 세상에게 복수하는 탄생 스토리이기도 하다. 영화는 지난 2019년을 뒤흔들었던 <조커>와 같이, 히어로와 빌런이 실은 표리일체이며 그들을 탄생시키는 건 우리 세상에 만연한 어두움임을 상기시킨다.


천애고아였던 에드워드에게 빈민가 고아원에서의 삶은 죽음보다 괴로운 고통이었다. 추위에 떨고 배고픔에 떨며 매일 누군가가 죽어가는 것을 바라봐야만 했다. 오늘 죽는 게 내가 아니기를, 또 하루를 어떻게든 버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을 것이다. 어쩌면 대답 없는 기도에 포기하려 했을지도 모르지. 잡을 수 없는 빛에 지쳐 주저앉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남았기에 구원의 손길을 목도할 수 있었다. 재개발 기금을 통해 빈민들을 구제하고 아이들을 돕겠다던 토마스 웨인의 연설. 그 한 마디가 그에게는 구원의 빛이었으리라.



그러나 빛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세상은 그에게서 단 하나의 희망마저 빼앗아갔다. 토마스 웨인의 꿈에 구원받으리라 믿었었는데. 그 사람만큼은 진정한 영웅이라 믿었었는데. 그 영웅 또한 실은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음을, 사회를 장악한 어둠 앞에서는 너무나 쉽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음을 그는 어린 나이에 받아들여야만 했다. 희망까지 빼앗긴 그에게 무엇이 남아있었을까. 그에게는 이제 복수뿐이었다. 스스로가 어둠이 되면서까지 그는 복수심에 생명을 불태웠다. 아이러니하게도 구원의 상실이, 오늘을 버틸 새로운 구원이 었다.


토마스 웨인의 재개발 기금은 도시의 유력가들에 의해 공중에서 사방으로 분해되었다. 시장에 경찰청장, 검사들까지. 권력자들은 마피아와 결탁하여 도시를 능욕하고 시민들을 우롱했다. 스스로의 추악한 진실은 꽁꽁 숨기면서, 마치 자신들이 도시의 빛이고 구원인 양 대중 앞에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대중들은 그들이 보여주는 거짓된 빛에 홀려 진실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그 빛의 뒤편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세상의 그 누구조차 알지도, 알아주려 하지도 않았다.



에드워드는 그들 모두에게 복수하고자 했으리라. 하지만 그에게 무슨 힘이 있었을까. 그는 그저 관심 밖에 있는 노바디(nobody)에 불과했는데. 때문에 그는 복수의 조력자로서 배트맨을 선택했다. 매 사건 현장마다 그에게 쪽지를 남기며, 자신을 대신해 복수를 완성해가도록 했다. 리들러와 마주하기 전의 배트맨 역시 아직 영웅이라 불릴 수 없는,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억누를 뿐인 복수의 상징에 불과했으니까. 아마 그도 자신과 같이 '어둠'에 대항하는 복수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순수할 정도로 배트맨에게 연대감을 내비쳤고, 다시 한번 믿었던 영웅에게 배신당한 거겠지.


리들러의 마지막 계획은 복수의 피날레였다. 방파제를 폭파하여 고여있는 물들이 도시로 흘러넘치도록 했다. 비리에 물든 권력자들과 그들의 타락을 깨닫지 못한 시민들을 모두 쓸어내리려고 했다. 설령 자신은 수용소에 갇혀있을지라도, 추종자들을 움직여 복수를 마무리하게끔 했다. 그는 단순한 사이코 테러리스트가 아니었다. 그 또한 여느 배트맨 시리즈의 빌런들처럼, 미쳐 보일지언정 견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더 이상의 거짓은 허용되지 않는다. 묻혀왔던 진실을 드러내, 마땅히 심판해야만 한다. 그야말로 영웅적인 동기이지 않은가.



리들러는 다시 한번 믿음에게 배신당했다며 울부짖고 몸부림쳤다. 그의 원대한 계획을 동료인 줄 알았던 배트맨이 저지하고 말았으니까. 추종자들은 제압당했고 최악의 시나리오는 막을 올리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정말 이번에도 믿음은 그를 배신했던 걸까? 애초에 그의 바람은 무엇이었던 걸까. 그는 복수하고자 했다. 자신의 고통을 덮어버린 거짓을 모두 걷어내려고 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으니까. 스스로 세상에게 알려주고자 했으리라. 그런데 어쩌면 그에게는 그저 의지할 영웅이 필요했던 건 아니었을까. 빛이 되어주고 희망이 되어주는 영웅의 존재를 바랐던 건 아니었을까. 스스로를 빌런으로 만들 정도로 그는 벼랑 끝에 내몰린 작은 아이와 같았으니까.


리들러의 추종자들과 마주하며, 배트맨은 그들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발견했다. 어둠에 분노하여 복수만을 거듭하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 것이다. 그가 의도치 않게 리들러의 복수를 돕게 되었듯이, 리들러 또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배트맨의 성장을 이끌어냈다. 공포의 상징인 비질랜티에서 기대어 의지할 수 있는 다크 나이트로. 그는 진실을 받아들일 용기를 배웠고, 다른 이의 손을 잡을 따스함을 배웠다. 리들러의 복수는 실패했을지언정, 그가 원했던 시민들의 영웅은 마침내 탄생할 수 있었다.


영웅적인 동기를 지녔던 복수귀는 빌런이 되었고, 분노를 표출하던 자경단원은 진짜 영웅이 되었다. 누구나가 빌런이 될 수 있으며, 또 누구나가 히어로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전제 아래에서 이 영화는, 그럼에도 영웅이 되는 자를 비추면서 막을 내렸다. 결말부에 등장한 옆 방 죄수의 말처럼 언젠가 훗날 리들러가 부활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분노를 키워 이번에는 정말 그저 빌런으로 나타날지도 모르지. 그러나 우리에겐 배트맨이 있다. 하늘에 뜬 배트 시그널을 보며 안심하고 의지할 수 있다. 그는 성장한 배트맨을 보고 무슨 말을 하게 될까. 매력적인 빌런이었던 만큼 앞으로의 재등장에 기대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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