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없거나, 웹사이트가 없거나, 갤러리 업무를 하지 않기로 한 갤러리
예술 업계에 종사하며 다른 갤러리들을 살펴보다 보면, 생각보다 다들 비슷하고 또 생각지도 못하게 특이한 갤러리들이 종종 있다. 지난 주말에 내 마음속 '독특한 갤러리' 리스트에 한 곳이 추가되었다. 그래서 다양한 형태로 갤러리를 운영하는 곳들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갤러리라고 하면 대부분 하얗고 깨끗한 전시 공간을 떠올린다. 애초에 갤러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규모의 공간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화이트 큐브라는 이름의 갤러리까지 있을까. 그런데 전시 공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 갤러리들이 있다. '특이한 갤러리들' 리스트에서 첫 번째 카테고리는 '정해진 공간이 없는' 갤러리들이다. 여기에는 Kurimanzutto, Guts Gallery, 그리고 We Buy Gold가 있다.
엄밀히 말해서 Kurimanzutto와 Guts Gallery는 공간 없이 떠돌이 생활로 시작해, 지금은 물리적인 공간에 정착한 케이스이다. Kurimanzutto는 시코에서 Monica Manzutto, Jose Kuri, 그리고 지금은 너무나 유명해진 예술가인 Gabriel Orozco가 시작한 갤러리이다. 친한 친구였던 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예술 공부를 하는 모임을 몇 년간 꾸준히 가져왔고, 1999년 멕시코시티의 Mercado de Medellin이라는 시장에서 하루짜리 전시를 선보였다.
2003년까지 장소를 옮겨가며 전시를 기획했던 이들은 현재 멕시코를 대표하는 너무나 멋진 갤러리로 자리매김했다. 첫 전시를 함께했던 작가들(Abraham Cruzvillegas, Damian Ortega, Daniel Guzman, Eduardo Abaroa, Fernando Ortega, Gabriel Kuri, Gabriel Orozco, Minerva Cuevas, Sofia Taboas, Rirkrit Tiravanija)의 대부분은 동시대 미술계를 이끄는 주역들이 되었다.
런던의 Guts Gallery도 비슷한 출발을 했다. 미대 졸업생인 Ellie Pennick은 평범한 배경을 가진 학생이었고, 살 곳을 찾다 한 술집에서 방을 얻었다.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정작 장학금도, 좋은 기회도 오지 않는다는 것에 분노한 그녀는 술집에서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를 열었다. 2021년 Sadie Coles의 권유로 공간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갤러리를 시작하게 되었다. 작가들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경영해온 결과, 현재는 런던에서 가장 핫한 갤러리 중 하나가 되었다. 떠오르는 젊은 작가들이 가장 먼저 문을 두드리는 곳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We Buy Gold는 내가 일주일 전 알게 된 곳이다. Joeonna Bellorado-Samuels라는 아트 딜러는 2017년 뉴욕 브루클린의 비어있는 공간에서 자신이 기획한 팝업 전시들을 선보였다. 이후 꾸준히 장소를 옮겨가며 대중과 전시를 공유해온 그녀가 가장 최근 진행한 쇼는 뉴욕 Nicola Vassell Gallery와 Jack Shainman Gallery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에는 David Hammons, Kerry James Marshall, Lynette Yiadom-Boakye 등 이미 유명한 작가들을 비롯해, 떠오르고 있는 젊은 작가들을 소개했다. 이 방랑 전시들은 대형 화랑에서 잔뼈가 굵은 영향력 있는 딜러가 큐레이팅 하는 만큼, 언론에서도 주목하는 새로운 갤러리의 형태를 제시한다.
두 번째 카테고리는 홍보를 하지 않는 갤러리이다. neugerriemschneider는 1994년 베를린에서 시작한 갤러리인데, 작년 프리즈 서울에서 이들의 부스를 보고 세련된 디스플레이와 작품 선정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이 갤러리의 특이한 점은 웹사이트가 없다는 사실이다! 아니, 웹사이트가 있긴 한데 이메일 주소만 덩그러니 쓰여있다. 그 주소로 이메일을 보냈다. 당신들의 과거 전시 내역을 보고 싶다고.
바로 다음 날 답장이 왔다. 예술은 작가와 그것을 보는 대중 사이에서 존재해야 한다는 철학 하에 온라인 사이트를 운영하지 않는다고. 즉, 작품은 그것을 직접 관람하는 관객들이 존재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굳건한 믿음을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신선했다. 몇 번의 클릭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 지구 반대편의 전시와 예술 작품을 빠르게 훑고 소비할 수 있는 이 시대에, 예술에 있어서 대면의 중요성을 몸소 보여주는 이 갤러리는 느림과 음미의 미학을 아는 멋쟁이처럼 느껴진다.
세 번째 카테고리는 전통적인 갤러리로서의 업무를 모두 내려놓고 새로운 형태의 사업을 시작한 갤러리이다. 프랑스의 누아르몽(Noirmont) 갤러리는 빠르게 글로벌화되며 전 세계에 경쟁적으로 지점을 내는 갤러리 업계의 트렌드가 자신들과는 맞지 않다고 느끼고, 2013년 돌연 영업 중단을 선언한다. 이들의 결정은 공식 홈페이지에 편지 형태로 게시되었으며, 우아하고 부드러운 문체로 반드시 예술 업계에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했다.
현재 이들은 Noirmontartproduction이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예술품의 생산과 유통의 단계에서 작품 판매를 제외한 모든 일을 다 한다. 특히, 조각이나 설치, 비디오 등의 대규모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예술 관련 기관이나 기업, 박물관 등에 제안하고 자금 조달, 수주 및 제작, 인도하는 전 과정에 관여한다. 아트 프로덕션이라는 이름답게 대형 작품 제작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고, 실제로 만드는 일이 주요한 업무이다. 주로 함께했던 작가들로는 Keith Haring, Jeff Koons, Korakrit Arunanondchai 등이 있다. 혹자는 무한 경쟁의 갤러리 업계에서 버티지 못해 차선책을 택한 것뿐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갤러리를 운영하던 이들이 새롭게 개척한 아트 프로덕션이라는 이 분야가 나에게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한 산업이 성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시장 참여자들의 형태의 다양성이다. 일례로 소매 유통 업계에는 백화점, 면세점, 마트, 편의점, 홈쇼핑, 온라인 커머스 등 너무나 다른 사업자들이 조화롭게 존재한다. 지금의 미술 시장에는 컬렉터들과 갤러리, 작가가 존재하고, 그 중간 지점에 딜러, 큐레이터 등이 자리한다. 시장이 점차 커지고 안정화되면서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참여자들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더욱 다채롭고 여러 겹의 층으로 이루어진 미술 시장의 미래가 기대된다.
해당 글은 아트인사이트 에디터로서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