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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파꽈리 Dec 21. 2023

기적의 면모

대학교 입학 필기시험을 치르고 난 후 면접이 있었다. 당시에 교수님 세 분이 면접실에 들어오셨는데, 특별히 까다롭다 여길 만한 질문은 하지 않으셨다. 다만,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질문 하나.


"프랑스 문학이 좋아서 지원했다고 했는데, 그럼 좋아하는 작품들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머뭇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해당 과를 지원한 입장에서 뭔가 보기 좋은 그림을 그려보려고 의욕에 찬 목소리로 대답을 했던 것인데, 지원 동기로 내놓은 그 말에 대해 재차 질문이 들어오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프랑스어에 관심이 있어서, 해당 언어를 배워보고 싶어서 지원했노라고 딱 거기까지만 진실되게 답변을 했어야 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뻘쭘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안쓰러운 분위기만 연출했었다. 이런 어이없는 에피소드가 있었음에도 학교에 입학해 다닐 수 있었던 건 어떻게 보면 기적이었다. 합격자 발표가 있기 전까지 당시 교수님들의 표정을 여러 번 머릿속에 떠올리곤 했던 내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우연한 기회에 같은 해 철학과에 입학해 다니던 동문 친구의 면접 에피소드를 들은 적이 있었다. 기적을 일으킨 게 나뿐만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세상은 나에게만 특별히 온정을 베푸는 게 아니라는 걸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철학과에 어울릴 만한 질문이었다.


"연역법과 귀납법에 대해 논해보세요."


고3 과정을 통해 지겹도록 단련한 머리였다. 누워서 떡을 먹으라는 건가 싶었단다. 그만큼 여유와 자신감이 있었노라 했다. 확신에 찬 어투로 열변을 토하고 나왔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둘을 서로 바꿔서 설명을 했다는 녀석의 말. 그럼에도 또 하나의 기적을 일으켜 학교를 다니고 있던 친구. 귀두연마 함부로 했다가 진짜로 ㅈ될 뻔했던 친구. 귀납법-두괄식, 연역법-미괄식. 이게 맞는 조합이면야 두문자를 따서 머리에 새기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련만.


면접 점수가 당락에 그다지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던 시절. 그럼에도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모든 게 결정되었던 그 당시 입시 제도하에서는, 면접이라고 해서 마음 편하게 임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소소한 기적쯤은 되려나.


하지만, 모르면서도 아는 체 대답했던 나와 그 순간 착오임을 모른 채 대답했던 친구는 경우가 서로 다르다. 차원이 다른 기적이다. 그래서 나는 부끄러웠다. 그런 부끄러움에, 이런, 기적 같은 놈, 남몰래 중얼거렸다. 이미 오래전에 지나쳐 왔으나 때때로 그날을 생각하노라면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찜찜해, 이런, 기적 같은 놈, 부끄러움을 누그러뜨릴 만한 곳을 콕 집어 소리치기도 한다.


알 수 없는 게 사람의 일이라 언제 또 그때와 같은 지난한 수험생활을 하게 될지 모른다. 이렇게 느지막이, 라고 생각하니 여러모로 힘들었던 그 시절이 자꾸 떠올라 나도 모르게 긴장도 하게 된다. 게으름과 싫증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일 없이 계획에 따라 꾸준하게 매진할 수 있는 체력과 끈기가 필요할 것이다. 행여 그때가 다시 온다면,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반면교사 삼아 어떻게든 부끄러운 일 되풀이하지는 말아야지. 또다시 기적 같은 놈일랑 되지는 말아야지. 가끔씩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이런 각오 또한 새삼 부끄러운 것임을 알면서도 자꾸만 되새기며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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