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으로 난 내 방 창문을 열면 나지막한 뒷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초입에는 연고자를 알 수 없는 묘지 서너 기가 있고, 그곳을 지나 계속 오르면 풀 꽃 나무들이, 정상 가까이 다다르면 모양이 다양한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산재해 있는, 전체적으로 보면 왠지 산 같지가 않았던, 그러나 산이 아닌 다른 이름을 붙이기도 뭐했던 그런 산이었다. 산꼭대기를 찍고 내려오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아 주말이라든지 따로 시간이 날 때면 별생각 없이 마실을 다녀오듯 그곳을 찾곤 했었다. 비록 산 같지는 않았으나 정상에서 아래위로 바라보는 풍경을 놓고 보면, 산이 아니고서는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제대로 설명할 길 없었던 묘한 느낌의 산. 저 아래 초록색 슬레이트 지붕의 우리 집, 꾸불꾸불 도로변을 따라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기던 사람들, 가끔씩 기적을 울리며 좌우로 시선을 가르던 기차, 유유자적한 날갯짓으로 내 주변을 맴돌던 새들, 그보다 더 높은 곳에서 여유롭게 하늘을 유영하던 구름.
중학교 2학년 어느 여름날, 나는 내 방 창문을 열어놓은 채 새벽 늦도록 글을 짓고 있었다. 숙제가 아니었다면 그 당시 내 또래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 같은 수필 한 편을 쓰고 있었다. 주황색 네모 칸칸이 글씨를 채워 가다 가끔씩 원고지에서 눈을 거두고 바라봤던 창밖. 두 눈 부릅뜨고 살펴보아도 가만히 실눈으로 응시하여도 도무지 풍경으로 엮을 만한 뒷산은 보이지 않았고, 지지부진했던 글쓰기 진도만큼이나 먹먹했던 어둠 앞에서 한동안 그저 멍하니 시간만 축내기도 했었다. 유난히 무성했던 그날의 별빛으로나 뒷산의 실루엣을 가늠해 가며 느릿느릿 손놀림을 거듭해 나갔던 그때. 어둠도 풍경이라 부를 수 있다면 지금의 나는 그날의 어둠을 어떻게 그려낼 수 있을까. 어둠 하나를 끌고 와 원고지에 새겨넣고 별빛 하나를 가져와 그 어둠을 밝히면서, 내용을 가늠할 수 없는, 더구나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 글 한 편을 끼적였던 그날을 생각한다. 어둠의 외피를 걷어낸 뒷산의 풍경을 그리며 밤을 새우다 어느 순간엔 마음이 살짝 시큰해지기도 했으려나. 내가 지금 글이란 걸 쓰고 있구나. 생전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던 날이었다.
작년 여름, 그녀가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2008년 이상문학상 작품집 한 권, 그리고 수영에 관한 책 네 권. 집 근처 공공도서관에 들러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책을 빌리다가 함께 고른 책들이라고 했다. 이 사진을 보고 맨 처음 들었던 생각은, 정말로 그녀는 수영에 진심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무언가에 진심인 사람. 누군가의 진심을 읽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싶었다. 그 기분에 취한 탓인지 나도 모르게 잠시 설레기도 했었다. 그리고는 이내, 즐거움에 빠져 유유히 물살을 가르는 그녀를 상상해 보았다. 초급 발차기부터 시작해 마침내 접영에 이르기까지, 단계를 밟아 승급을 하며 뿌듯해할 그녀의 마음을 어림해 보았다. 물을 멀리했던 과거를 씻어내고 이제는 둘이 하나가 되었다 할 만큼 물과 친해진 사람. 혹시 그녀는 원래부터 물 같은 사람이었으려나. 풍덩! 그 물속에 뛰어들어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머릿속에 그리며 매일매일 어딘가로 헤엄쳐간다 해도 여전히 그 끝은 물일 것 같은 사람이려나. 하늘과 수면의 경계가 무의미한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안테나처럼 섬 하나를 세우고 세상과 소통을 하는 사람이려나. 무언가에 진심을 쏟는 그 모습이 부러워, 급기야 나는 그녀가 무척이나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사랑을 믿다>. 영화든, 그림이든, 책이든, 아무튼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번뜩이는 재치가 부족한 내게 있어 한줄평을 쓰는 건 적잖이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나도 할 수 있었다. "사귄다면, 오늘부터 1일 시전, 잊지 마시라." 사랑이라는 감정을 믿거나 아니면 사랑하는 대상을 믿거나, 두 사람 서로 사귀기로 했음을 증명하는 합의서에 도장을 찍듯, 반드시 그렇게 선언해야 한다고 이 소설은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지내는 게 사귀는 건지, 사귀는 건 아니고 그냥 좀 친하게 지내는 것뿐인지 반드시 말로써 확인을 해야 한다 알려주는 듯했다. 그래야, 그때 내가 실연을 당했던 거구나, 뒤늦게 자각하고 슬퍼하는 일 따위 하지 않는다 얘기하는 듯했다. 훗날 자신이 역전된 감정의 주종관계에 얽매이게 되었음을 깨닫고 앓는 일 따위 하지 않는다 충고하는 듯했다. 이런 친절한 조언을 오래전에 받았더라면, 나는 지금의 나와는 짐짓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정우성과 손예진이 주연했던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도 이와 비슷한 대사가 나왔었다.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던 두 사람. 한껏 채운 소주잔을 두고는 이거 마시면 우리 사귀는 거, 안 마시면 앞으로 볼 일 없을 거라 했던가. 만약 이 영화가 20세기에 나왔더라면, 그래서 내가 캠퍼스에서 처음으로 S를 만났을 때보다 먼저 극장을 찾았더라면 내 인생이 조금은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까.
수년 전, 대학교 한 학번 후배였던 바로 그 S와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 졸업을 한 후로는 처음이었으니 정말로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던 그때,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뜻밖의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럼, 그때 사귀자는 말을 했어야죠!"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 당시 나는 우리가 사귄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대방은 전혀 그렇게 여기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비 내리던 어느 여름날 밤, 우산도 없이 교내 기숙사 근처에서 말다툼을 하고는 한동안 서로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 적이 있었다. 그러다 어느 화창한 오후, 학교 주변 익숙한 거리에서 다른 누군가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던 S와 마주쳤는데, 지난날 나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낭랑한 목소리로 연극을 보러 가는 길이라 말하던 그때 그 해맑은 표정을 한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수화기로 전해 들었던 얘기처럼 우리는 서로 사귀자는 말을 나눈 적 없었고, 그때 내가 보았던 그 둘은 결국 나중에 결혼까지 했다. 사귀자고 말하지 않아 졸지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던 관계. 통화하는 내내 화기애애했던 분위기처럼,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 얘기 또한 웃으며 나눌 수 있었을 만큼 시간은 참 많이도 흘렀다. 어찌 되었든, 권여선의 <사랑을 믿다>를 읽은 내가 "사귄다면, 오늘부터 1일" 선언을 그토록 강조하는 데엔 이렇듯 나름의 이유라는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와 이십 대 후반을 함께 보냈다. 자주 만날 때는 일주일에 두어 번, 드물어도 한 달에 한두 번은 만나는 사이였다. 딱히 약속을 정해서 만난 기억은 없었다. 같은 일을 하다 보니 오다가다 부딪치고 얽히게 되었고 취향이나 스타일이 비슷해 각별한 친밀감을 느꼈다. 우리의 만남이 끊어진 건 그녀가 업무를 바꾸면서부터였다. 마침 그때 나도 막 연애에 돌입한 시점이라 그녀에게 따로 연락을 하게 되지 않았다. (본문 중)
화자인 '나'와 그녀의 관계는 작품 속에 아주 짤막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만남의 기간과 횟수, 그리고 "각별한 친밀감"과 같은 표현을 고려하면 사귄 걸로 보는 게 맞다 싶다가도, 정작 그들이 만나서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지냈는지는 알 길이 없으니 정말로 사귀었던 게 맞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아마도 작가는 알 듯 모를 듯한 이 같은 문장들의 나열을 통해, 소설 속 두 사람이 같은 시기에 서로 간 감정의 교집합을 이루지 못했듯, 독자인 나 또한 그들의 인연에 대해 불확실한 감정의 거리를 두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어쨌든 화자는 이 시기를 아무렇지 않게 보았지만 그녀는 이를 사랑으로 여겼다. 몇 줄 안 되는 분량에, 그마저도 건조한 서술뿐이라 독자로서 그녀가 겪었다던 실연의 고통을 가늠하는 건 난해하고도 힘든 일이었다. 다만, 그런 그녀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대변해 주려는 듯 작가는 작품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덧붙여 놓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개인적인 멜로디가 있다. 이십 대 후반 무렵 나만큼이나 겁이 많고 감정에 인색했던 그녀가 내게 보내온 노래는 매우 낮은 음역의, 들릴 듯 말 듯한 작고 희미한 멜로디였으리라. (중략)
그리하여 그녀는 지금의 내 대낮 같은 기다림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작은 노랫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다른 여자의 새된 노래에 혹한 내 귀의 어두움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본문 중)
그러고 보면 그때 그 시절의 나는 작품 속 그녀였고, 한 학번 후배였던 S는 작품 속 화자였던 셈이다. 차이가 있다면, 화자인 '나'는 사랑을 인지하지 못한 채 헤어지고 3년이 지난 후부터 또 다른 3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미련처럼 그녀를 기다렸으나, 후배 S는 미련은 개뿔! 주야장천 그 누군가와 열심히 사랑을 나누다 마침내 결혼이라는 열매를 맺었다는 것.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정말로 궁금했던 부분은 따로 있었다. 겉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서로 사귀고 있다 공유할 수 있는 믿음이란 대체 어떤 모습일까 하는 것. 어디선가, 이 사람은 여전히 시류에 편승하지 못한 채 고리타분한 생각을 곱씹고만 있구나, 하는 타박이 들려오는 듯하다.
며칠 전 귀갓길에는 비가 내렸다. 빈약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평범한 비였다. 퇴청 무렵 한꺼번에 몰려온 어둠을 배경으로 가로등 불빛을 수직으로 긁어대는 빗줄기가 유독 인상적이었던 퇴근길. 신호등에 걸려 차를 멈추지 않았더라면 그날 그 저녁 눈치채지 못했을 풍경. 쉼 없이 차창을 오가는 와이퍼 너머로 둥그스름한 가로등 빛무리에 선명한 생채기를 내고 있는 빗줄기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좋은 비라고 중얼거렸다. 상처 있는 것들에게서 받는 위안이 이렇게나 따뜻하구나. 생채기 난 빛무리가 이토록 마음을 평화롭게 할 수 있구나.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 했던가. 두보의 시 구절을 생각하다가 문득, 작년 여름 억수같이 비가 내렸던 그날이 떠올랐다.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 기록으로 남겼던 2023년 7월 4일 퇴근길. 와이퍼를 최고 속도로 작동시켜도 앞을 분간하기 힘들었을 만큼 많은 비가 내렸던 그날,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는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진에 담아 보내왔던 수영에 관한 책들은 얼마나 읽었을까. 장대같이 퍼붓는 이 비를 뚫고 오늘도 어김없이 수영장을 찾아갔을까. 그러나 의문을 품으면 안 되는 거였다. 수영에 진심인 그녀를 과소평가하면 안 되는 거였다. 출석 체크 완료를 그녀에게서 직접 확인했던 날, 지금껏 자칭 여수 물개임을 자부해왔던 나는, 이제 곧 머지않아 정통파 수영 실력을 갖출 그녀에게 명함도 내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흐뭇함에 설핏 웃음도 나왔다. 그날 세차게 내렸던 비는 그녀를 떠올리게 했고, 사진에서 엿볼 수 있었던 수영에 대한 그녀의 진심을 재차 확인시켜 주었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두근두근했던가. 때를 알고 내렸던 비, 그날 역시나 좋은 비였다.
위 사진에 연이어 그녀가 보내왔던 또 한 장의 사진엔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가 담겨 있었다. 사진을 받고 난 후, 작품들을 추천해 준 그녀에게 짤막한 독서 후기를 전했는데, 아마도 그 무렵부터 나는 오래전에 소진했던 읽고 쓰는 일에 대한 애정을 조금씩 조금씩 다시 키워 나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녀가 소개해 준 책들로 읽는 재미를 누렸고, 그녀에게 보낸 후기로 쓰는 재미를 느꼈다. 주말이 되면 집 근처 공공도서관을 찾아 여러 책들을 만났고, 뭐라도 끼적거리고 싶은 게 생길 땐 여기 이 공간에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녀가 소개해 준 이곳에서 그녀에게 보내는 심정으로 글을 써내려 갔다. 읽거나 쓰는 건 오롯이 내 몫이라 해도, 그렇게 해서 빚어낸 것들만큼은 왠지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다. 글에 대한 애정의 불씨를 되살려준 그녀에게, 소싯적 밤을 새우며 수필을 썼던 적이 있노라, 내 삶의 글쓰기는 그때부터였노라, 선생님의 칭찬과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았던 그 글이 가끔씩 미치도록 보고팠던 적이 있노라, 들려주며 철없는 자랑을 소심하게 늘어놓고도 싶었다.
언젠가 횡단보도에서 만났던 초등학생 남자아이. 생전 처음 본 그 아이가 내게 건넸던 <목소리, 목소리>는, 내 마음속 글에 대한 애정을 되살린 이 사진들이 있었기에 쓸 수 있었던 글이었다. 사진들을 보내준 그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오랫동안 읽지 않고 쓰지 않았던 내가, 하세월 읽지 못하고 쓰지 못했던 내가, 어렸을 적 별빛으로 어둠을 지워가며 원고지를 채워갔을 때처럼,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구나 다시금 느끼게 만든 또 다른 의미의 첫 글. 그래서 나는 거기에 담은 아이의 목소리를 어느 누구도 아닌 그녀에게 처음으로 들려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여전히 지금은 겨울이다.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되었고, 사각의 창틀 속 묘하게 자리했던 뒷산의 풍경도 못 본 지 꽤 되었다. 아직 남아있을지 모르는 내 안의 훈훈한 기운으로 성에 낀 유리창을 닦듯 어둠을 문지른다면, 어렸을 적 산을 오르듯 과거를 거슬러 올라 그날 원고지에 적어 넣었던 14살짜리 아이의 감성을 선명하게 읽어낼 수 있을까. 부릴 수 없는 욕심이라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아직도 견뎌야 하는 이 계절은, 언제고 그녀에게서 또 다른 사진이 날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마주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