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빤 너무 좋은 사람이야."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 곁가지 말을 덧붙이며 에둘러 가는 건, 그런 식으로 잠시라도 지체하는 건 이 문장이 던지는 즉시적 절망을 대하는 자세가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너무, 좋은 사람, 이란 말을 들은, 바로 그, 오빠, 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여기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아니면 운 좋게 피해 갈 수도 있는 복불복의 영역. 아마도 생전 느껴보지 못했을 아득한 깊이의 심연에 빠지는 듯한 기분. 초인적인 힘으로 손짓 발짓 다 한다 한들 결코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늪을 대하는 느낌. 그 굴레에 빠지기도 전에 이미 극복의 어려움을 절감하게 되는 막막함.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리고, 평소 덧없다 생각해 온 삶의 무게가 이토록 무거운 것이었나 지극한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매무새를 가다듬고 인생에 대해 경건한 자세를 취하게 되는 순간. 오, 신이시여!
행여나 오빠가 아닌 동생이나 성별이 다른 대상을 넣어볼 수도, '너무'가 아닌 '정말'이라는 대체어를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나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는, 유독 존재감 넘치는 마침표로 정리된 네 개의 어절로 이루어진 이 글귀가, 마치 수억 년 동안 땅속 깊은 어둠에 짓눌려 굳어버린 화석처럼 일말의 변형조차 불가능한 그런 문장으로 여겨진다. 분명 언젠가 본인의 귀로 직접 들어본 자만이, 그러나 고막을 뚫고 달팽이관을 지나 청각세포를 자극한 후 뇌에 이르는 과정을 거치기에 앞서, 맹렬한 기세로 피부를 뚫고 심장으로 직격하는 그 소리의 맛을 느껴본 자만이 공유할 수 있는 난이도를 지닌 문장. 감당하기 어려운 타격감에 가슴을 부여잡고 휘청거려본 적이 있는 자만이 거기에 내포된 의미를 가늠할 수 있는 문장. 오빠가 아니라면, 게다가 '너무'가 아니라면 차마 그 완성도를 논할 수 없을 것 같은 슬픈 인간상, 좋은 사람.
저 소리가 눈앞에 떨어지는 순간, 당사자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스스로 사랑이라 생각했던 감정을 완벽하게 끊어내겠다 다짐하거나, 아니면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이런 나를 어쩔 수 없다며 그 감정에 개처럼 끌려가는 걸 숙명으로 받아들이거나. 숭고한 사랑에 개를 들이댄 건 일견 너무하다 싶기도 하지만, 이것만큼 실감 나게 '어쩔 수 없음'을 표현하는 문구를 생각해 내기가 힘들다. 나도 한때 그러한 개였음을 굳이 밝힐 필요가 있겠나 싶지만, 뭣도 모르고 지껄이는 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억울함은 사양하고 싶으니 이렇듯 어쩔 수 없는 고백의 시간도 갖게 된다. 어쨌든 내 입장에서는, 그 시점에서 극복의 의지를 표출하는 전자에겐 손뼉 치며 환호를 보내주고 싶고, 숙명이라 여기며 개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려는 후자에겐 안타까움을 가득 실은 당부의 말을 전하고 싶다. "제발, 그 길만은!" 먹힐 리가 만무한 오지랖일지언정,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동병상련의 측은지심을 도무지 막을 도리가 없다. 이 험난한 세상에 내가 나를 돌보는 것도 벅찬 일이건만, 이런 기적 같은 오지랖을 벌이다니. 좋은 사람으로 남는 일. 끝이 보이지 않는 고행의 길을 걷겠다 자처하는 이를 두고 침묵으로 일관하기엔 나는 너무 마음이 약한 인간이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비록 언젠가 그 길을 걷긴 했으나, 그리 오래지 않아 멈춰 유턴하는 행운을 거머쥐기도 했으니까. 거머쥐다. 어쩌다 굴러 들어온 게 아니라 나름 노력을 기울였으니 이런 표현 정도는 쓸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널리 알려진 청마 유치환의 시 중에 <행복>이 있다.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되는 시를 반복해서 읽으며, 나는 서서히 고행의 걸음을 거둬가기 시작했다.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 거기에서 나오는 행복이란, 주는 만큼 받는 사랑이 아닌, 주는 것으로 끝나도 만족할 수 있는 사랑의 모습이었다. 주는 만큼 받지 못해 쓰라림을 느끼는 좋은 사람이 아닌, 주는 것으로 끝나도 지난날 행복했음에 족하며 자기 자신을 달래고 다독이는 사람으로, 그렇게 서서히 타인이 되어가는 수순을 밟아나갔다.
좋은 사람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였던 여러 가지 일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종이학 천 마리를 접어 건넸던 일이다. 이젠 정말 끝이라는 마침표를 확실하게 찍고자 추진했던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비염에 코가 막히고 감기몸살에 온몸이 흐느적거리는 상황에서도, 마지막 안녕 페어웰(farewell)을 위해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접고 또 접었다. "어느 날 나의 손에 주었던 / 키 작은 종이학 한 마리 / 천 번을 접어야만 학이 되는 사연을 / 나에게 전해주며 울먹이던 너" 분명히 천 번을 접으라는 가사였는데, 왜 당시 사람들에게는 천 마리를 접어야 하는 학으로 인식됐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광기에 찬 손놀림으로 접어낸 천 마리 학을 전하는 것으로 나는 그녀에게, 더불어 좋은 사람에게도 안녕을 고했다. 돌이켜 보니, 좋은 사람으로 계속 남는 일도 거기에서 벗어나는 일도 나름의 찌질함이 수반되어야만 가능했던 일이었다. 찌질해서 가슴 아팠고, 또한 그 찌질함으로 마침내 마음에 평화를 얻었다.
"오빤 너무 좋은 사람이야." 그러고 보니 이 문장 속에서 좋은 사람은 그저 좋은(good) 사람이지 좋아하는(like) 감정과 결부된 사람이 아니다. 그냥 어느 누가 봐도 객관적 판단의 기준으로 좋은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다. 태생적으로 아닌 건 아닌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오빠는 좋은 사람. 그것도 너무 좋은 사람. 몇 해 전부터는 부정의 카테고리를 넘어 긍정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말이 되긴 했으나, 여전히 '너무'는 부정의 뉘앙스로 더 크게 인식되다 보니, 너무 좋은 사람인 오빠는 마치 그 어떤 애정도 스며들 여지가 없는 건조하디 건조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 좋은 사람인 건 맞는데 좋아하는 감정이 들지 않아. 좋은 오빠이긴 한데 노력해도 사랑의 감정이 생기지 않아. 혹시나 직설적으로 말을 하면 상처라도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이런 식으로 돌려 얘기를 하는 건 아닐까. "오빤 너무 좋은 사람이야."
그러나 좋은 사람이 이런 식의 좋은 사람일 수밖에 없는 건 심히 안타깝다. 이렇게 끝나버리는 좋은 사람은 적잖이 불행하다. 오빠가 아니라면 '너무'가 아니라면 좋은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으로 누군가의 가슴속에 예쁘게 자리할 수도 있을 텐데, 그 사람의 마음속에 아름답게 꽃필 수도 있을 텐데. 그래서 훗날 나는 언젠가 만난 좋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언제 그를 만난 건지, "좋은"은 어떤 의미로 "좋은"인 건지, 무슨 계기로 인해 그가 좋은 사람이 된 건지, 그런 좋은 사람을 나는 또 어떤 식으로 좋아한다는 건지. 기약할 수 없는 어느 세월의 끝에서, 달뜬 마음에 실없는 미련 하나에도 휘둘리곤 하는 나와 진정으로 이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에 대한 연민으로써가 아닌 그에 대한 고마움으로 좋은 사람을 얘기해보려 한다. 행여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거리를 사이에 두게 되는 인연이 되었을지라도, 마음에 새긴 기억들 하나하나 어루만지며 그에 대해 써 내려가 보려 한다. 좋은 사람. 사소하게 다시 한 번 더 불러보고 싶은 좋은 사람이 떠오르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