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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파꽈리 Nov 29. 2023

참을 忍 세 번이면 호구된다

참을 忍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다. 순간 솟구치는 울분과 흥분을 누르고 누르다 보면, 극한으로 자신을 몰아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하는 일을 피할 수 있다는 것. 예전에 바로 이 참을 忍을 세 번 적은 종이쪽지를 지갑에 넣고 다닌 적이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삭이거나 폭발할 듯한 순간의 화를 다스리기 위함이 아니라, 끝을 장담할 수 없는 단조로운 일상이 빚어내는 지루함을 이겨내기 위한 일종의 자기 최면의 발로였는데 결과는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지루함을 인내하려던 자의 속절없는 패퇴. 무릇 참는다는 건, 기본적으로 어떤 결과를 상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지난한 노력을 해야 하는 과정일 텐데, 시대가 각박하고 세상이 하 수상한 탓인지 요즘은 그 참을 忍이라는 것을 한 번 실행하기도 버거워진 듯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무리 참고 참아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상황들이 도처에 즐비한 탓에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이 말 자체가 그만 유명무실해졌다고나 할까. 그래서 요즘엔 이런 식으로 바뀌었다지. 참을 忍 세 번이면 호구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층간소음이다. 


오래전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 살 곳을 정하면서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이 바로 층간소음이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 면에서 쾌적한 환경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는 분명했지만, 문제는 상하좌우로 둘러싼 이웃의 성향. 입주해서 직접 살아보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는 일이라, 괜찮은 이웃을 만나는 건 정말 운에 맡길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이사 후 며칠 동안은 괜찮았다. 그래서 안도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천장에서 들리기 시작한 딱! 소리. 아니 빡! 소리라고 해야 더 맞을 듯한데 하루에 두 차례 시간 간격을 두고 발생하는 실로 참기 힘든 소음이었다. 시간대가 약간 유동적이긴 했으나, 주로 저녁 7시에서 9시 사이, 그리고 자정에서 새벽 2시 사이 부근이었다. 나무로 된 문이나 원목가구에 노크를 할 때와 비슷한 소리였는데 그 소음도가 온 신경을 곤두세울 만큼 엄청나게 높았다. 빡! 항시 단발음으로 일어나며 3분이나 5분 혹은 10분이나 15분 등등 다양한 텀을 두고 두 시간 가까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게릴라전을 방불케 하듯 도무지 예측이란 걸 할 수 없어서 더 타격감이 심했던 소음. 이 소리가 대체 무슨 소리인가, 뭘 하면 이런 소리가 나는가. 저녁 시간에 듣는 것도 곤혹스러운데 자정 지나 새벽까지 소음이 이어지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철컹,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새벽 2시 가까운 시각까지 수십 차례 반복되었다. 거짓말 하나 안 보내고 이렇게 지내다간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참을 忍을 되새기기엔 이건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속절없이 호구가 될 수는 없었다.


위층에 올라갔다. 이런저런 사정 얘기를 했더니 자기 집은 아니라며 다른 집에서 연유했을 가능성에 대해 설파하기 시작했다. 미리 알아본 예상 반응들 중 하나였으나 막상 현실로 대하고 보니 어이가 없고 당황스러웠다. 이사한 후 이웃으로는 첫 대면인지라 되도록이면 얼굴 붉히지 않고 얘기하고 싶어서 주로 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선에서 대화를 마쳤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신경을 좀 써 주십사 부탁하는 말을 잊진 않았다. 결국은 전혀 효과가 없었다. 수일 동안의 탐색 끝에 소음의 진원지는 위층일 수밖에 없다는 걸 이미 확신한 터였다. 며칠 후 다시 올라갔다.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는 태도.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는 수준도 아니고 아예 닭을 안 먹었다고 발뺌하는데 더 이상 면전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아무런 성과 없이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니겠구나, 불안감이 엄습했다. 대책을 세워야 한다. 층간소음이라니. 이사 전 그렇게 염려했던 바로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나다니. 욕은 기본이고 상해, 심지어 살인까지도 일어난다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내 집은 아니에요, 말하던 위층을 떠올렸다. 과연 이 상황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인터넷을 검색했다. 천장을 치란다.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관리사무소에 연락하란다. 연락했더니 소음이 날 때 녹음을 하고 그 순간에 자신을 대동시켜서 어쩌고 저쩌고. 불규칙한 간격에 단발적으로 일어나는 소음을 어떻게 측정하라는 것이며, 늦은 저녁이나 자정 넘은 시각에 사무소 직원을 불러 직접 확인을 시키는 것도 이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가. 우퍼를 천장에 부착한 후 괴기스러운 음악을 틀거나 고무망치를 준비해 벽을 치란다. 후기를 찾아보니 이건 완전 죽거나 살거나다. 깔끔한 해결을 낳거나 아니면 같이 망하거나. 끝이 확실하다는 점은 좋은데 해결이 아닌 공도동망의 결말이면 이건 완전 나가리. 행여 피를 부를 수도 있는 전쟁으로의 돌입. 이렇듯 최후의 수단을 머릿속에 떠올렸을 때는 이미 층간소음으로 인한 분노와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상태였다. 대체 왜 이런 시련이 나에게. 어느 순간부터는, 소음이 날 때 위층에 올라가 초인종을 눌러도 집에 아무도 없다는 듯 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 무서워서 피하는 똥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똥이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방 배치를 바꿀까도 생각했다. 안방 천장에서 소리가 나니까 책상, TV, 침대 등등을 아예 송두리째 작은방으로 옮겨서 생활해 볼까 생각했다. 그런데 왜 내가 그래야 하는가. 가해자도 아닌 피해자인 내가 왜 넓은 방을 두고 좁은 방으로 도망쳐야 하는가. 급기야는 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 생각까지 하는가 말이다.


애초에 결론은 이미 나 있었다. 조용히 살고 싶었던 내 인생. 침묵 속에서 두루뭉술 타협하고 싶었던 세상. 하지만 이번 경우엔 어쩔 수가 없다. 세상이 나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6개월여의 기간을 참고 참았다. 나는 살아야겠다. 결연한 자세로 온라인 쇼핑 사이트에 접속해 우퍼를 검색했다. 효과가 좋다는 전반적인 평이 있었으나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집 주변 마트에 들러 고무망치의 강도와 성능을 가늠했다. 가성비가 훌륭하다 생각했다. 자 이제 마지막 결단만이 남았다. 제발 도와주소서! 모 아니면 도, 올 오어 너띵 게임을 눈앞에 두고 마치 고사를 지내는 듯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온 절실한 바람. 그런데 기도의 대상이 묘연했기 때문일까. 왜 그 순간 참을 忍 하나가 머릿속에 아른거렸을까. 그때까지 온몸 구석구석을 할퀴며 휘돌아갔던 수많은 忍, 忍, 忍...... 그리고 세상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후 떠오른 그때 그 순간의 忍. 쥐어짜고 쥐어짠 내게 남은 마지막 忍이라고 생각했다. 추석 연휴의 끝 무렵이었다.


다행히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인지 추석 연휴가 끝난 후부터 거짓말처럼 소음이 사라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6개월여 동안 시달렸던 게 어느덧 일상으로 굳어진 탓에, 소음이 없어서 행복하다는 느낌보다 왜 소음이 안 날까 의문이 먼저 앞서는 희한한 상황. 소음을 야기하던 행위를 그쳤거나 그 무언가를 치웠나, 방바닥에 매트라도 깔았나, 아니면 그동안의 항의에 콧방귀도 안 뀌더니 민족 대명절 추석을 맞이하여 이웃사랑 실천의 각성이라도 한 걸까. 별의별 추측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하지만 소음의 정체가 불분명했던 것처럼 그 해답 또한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그저 행복했다. 한 달여 정도가 지난 후 주변 지인들에게 해당 사실을 알렸다. 소음이 사라진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이에 관해 말을 꺼내면 혹시라도 부정이 타서 다시금 소음이 시작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돌이켜보니 그때 머릿속에 떠올랐던 忍은 아끼고 아꼈던 최후의 인내였다기보다는, 앞으로 펼쳐질 일에 대한 혹시 모를 불안감이나 두려움 때문에 주저하고 망설인 행위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참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망설이는 忍이었다. 감쪽같이 사라진 소음처럼 희한한 忍이었다. 참을 忍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 세월의 흐름에 따라 차츰 그 명이 다해가는 것을 반년 동안 계속된 층간소음의 고통이 간접적으로나마 실감케 해 주었다. 최소한 호구는 되지 말아야지. 도처에 눈물이 많은 세상이다.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하지만 그 언젠가 참고 참고 또 참았던 캔디는 이제 없다. 그런 캔디를 원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런 캔디가 살 수 없는 세상이다. 그러니 이제는 참지 말고 울어야 한다, 살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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