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파꽈리 Sep 15. 2023

목소리, 목소리

"안녕하세요!"


휴가를 낸 어느 날 오전, 용무가 있어 집 근처 행정복지센터에 가다가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어디선가 수줍음 섞인 남자아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그래. 안녕."


초등학교 1, 2학년쯤 되었을까. 주위엔 아무도 없이 단둘뿐이었던 그 장소에서 낯선 이에게 말을 거는 아이의 용기를 외면하기 어려워 얼떨결에 짧은 인사로 화답을 했다. 단지 몇 마디 말을 교환하는 것으로 타인이 더 이상 타인이 아니게 되면, 잠깐의 침묵조차 껄끄럽게 느껴질 만큼 둘 사이엔 설명하기 힘든 묘한 어색함이 감돌기도 하는데, 아이는 그런 부자연스러움은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호기심 가득 싱그러운 표정으로 연신 나의 얼굴을 살폈다. 때마침 신호가 바뀌어 우리 둘은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는데, 인사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는지 아이가 또 말을 걸어왔다.


"어제 방학했어요!"


생전 처음 보는 아이가 인사를 하는 것도 모자라 종종걸음으로 나와 보폭을 맞추며 어제 방학을 했다고 하는데, 아까보다 조금은 더 자신감 있어진 그 목소리에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까 순간 고민을 했다.


"아, 그랬구나. 좋겠네."


돌이켜 보면 어렸을 적 방학을 맞이했을 땐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설렘으로 한동안 마음을 진정시키기 힘들었는데, 그런 아이의 심정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다소 무미건조한 말투로 대꾸를 해놓고는 이내 머쓱해졌다. 너무 심드렁한 반응이었나. 하지만, 약간의 미안함을 느낄 새도 없이 아이는 환한 얼굴을 하며 또 이렇게 말을 덧붙였다. 


"일기 쓰는 숙제가 없어요!"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무관심으로 비칠 수 있었던 그래서 찜찜한 마음 들게도 했던 조금 전 내 대답을 만회할 기회를 주려는 것 같았다.


"와~ 진짜? 기분 너무 좋겠다!"


그래, 잘했어. 이 정도면 충분해. 나 스스로 뿌듯함을 느끼며 아이의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네! 정말 정말 좋아요!"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고 난 후 나는 계속 직진을 해야 했고 아이는 사거리에 있는 또 다른 방향의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멈춰 서야 했다. 말 그대로 영영 헤어져야 하는 순간. 삶은 누군가와의 만남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잘 헤어지는 것도 중요하다는 게 왜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헤어지는 순간만큼은 내가 먼저 말을 건넸던 것일까.


"방학 즐겁게 잘~ 보내!"


"네!"


짧은 대답을 뒤로 하고 아이는 흥에 겨운 발걸음으로 제 갈 길을 갔다. 마구마구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용기를 내서 생전 처음 보는 이에게 인사를 하고, 방학 소식을 알리고, 한껏 고양된 목소리로 일기 숙제가 없는 것에 대한 자신의 즐거움을 혼신을 다해 발산하고 싶었나 보다. 아이의 그 마음을 헤아려 보고는, 비록 우연이었을지라도 자랑의 대상이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그렇게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지 않았더라면 대상이 결코 나이지도 않았을 그 아이와의 동행에 잠시 행복하기도 했다. 

    

무더위가 지천에 깔린 한여름,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 건 곤혹스러운 일이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산책을 하는 것도 아닌, 뭔가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는 상태라면 더더욱 그 상황이 마뜩지 않은 게 사실이다. 명쾌하지 않은 삶이란 그런 것일지 모른다. 아파트 대출금으로 다달이 나가는 이자를 걱정해야 하고, 가족이건 타인이건 때때로 덜컹거리는 인간관계를 고민해야 하며, 살아온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삐걱대는 몸 이곳저곳을 살펴야 함은 물론, 불안한 미래에 근심을 얹어 가며 하루하루 우울의 깊이를 가늠해야 하는 삶이란 결코 바뀔 것 같지 않은 신호를 기다리며 횡단보도 앞에서 하염없이 머뭇거려야 하는 정처 없는 불안한 여정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젯밤, 무심코 올려다 본 하늘엔 보름달이 떠 있었다. 내 주위의 세상이 참으로 적막하다 느낄 때, 보름달마저 냉기 풀풀 풍기는 고요를 깨뜨릴 수 있는 목소리가 그리워진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그 목소리로 냉랭한 마음 덥힐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을 때 지난날 횡단보도에서 만났던 아이가 떠올랐다. 행복 가득 들떠있던 목소리.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목소리. 이름도 모르는 한 아이의 웃음이 목구멍 아래 꾹꾹 눌러 담은 내 울음을 부축하는 듯 그렇게 잠시나마 위안을 가져다 주었다.

     

일기 쓰는 숙제가 없다며 아이는 기뻐했지만, 도리어 나는 오랜만에 기꺼이 일기를 쓰는 즐거움으로 그 아이와의 만남을 기록해놓고 싶어졌다. 날씨만큼이나 마음까지 무더웠던 7월 어느 날, 횡단보도 앞 뒤죽박죽 널브러진 내 일상의 노정을 추슬러 잠시나마 산뜻한 발걸음으로 길을 건너도록 도와준 그 아이를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어졌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시간이 흐르고, 언젠가 또다시 태연한 척 속울음 삼켜야 하는 적막이 도처에 가득할 때, 우연처럼 그 아이와의 재회를 뒤적여본다면 어떨까. 나를 살게 하는 모든 감각들을 잠재우고 오로지 귀만 열어 놓은 채, 그날 보름달보다 더 환하게 빛났던 아이의 목소리를 추억하게 될지 모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