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계산법

2018년 6월 8일 금요일의 성실함

by 비누

동이 트는 걸 보고서야 잠에 겨우 들었는데 핸드폰보다 동생의 알람이 더 빨랐다. 세 시간도 채 자지 못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머리가 멍했다. 일주일만에 화해한 동생과 그동안 나누지 못한 대화를 이어가던 지난 밤, 동생이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여야 하지 않겠느냐며 아파트 주민단체에서 운영하고 있는 요가반을 같이 듣자는 거다. 한 달에 3만원이라니 그럭저럭 괜찮은 가성비가 아닌가 싶어 그러마 하고 계좌 이체까지 대신 해줬는데 첫날부터 무너질 수는 없었다. 깊은 한숨과 함께 베개에 고개를 잠깐 파묻었다가 곧바로 무거운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건조한 탓에 눈가에 더덕더덕 붙은 눈곱을 떼어내고 양치를 하니 어쨌든 금세 정신이 들었다. 찬물을 마셔 꿈자리의 갈증을 풀고 운동복에 대강 몸을 구겨넣곤 지하에 있는 요가 스튜디오로 내려갔다.

수업 시작 시간은 아홉 시 반. 매트를 깔고 동생과 나란히 누워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있으니까 요가 선생이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섰다. 대부분의 요가 선생들처럼 몸에 딱 붙는 요가복을 입은 젊은 강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꽤 지긋해 보였다. 머리는 거의 잿빛으로 물들었고 군데군데 섞여 있는 흰 머리카락들이 어쩐지 영험한 느낌을 줬다. 게다가 삼베 같은 천으로 만든 다갈색 옷을 걸치고 있어 어쩐지 요가 강사라기보단 무언가에 통달한 도인처럼 보였다. 선생은 몇 번 얼굴을 익힌 동생에게 아는 척을 했고, 새로 왔냐며 내게도 인사를 건넸다. 단전에서 뽑아올린 것처럼 울림이 있고 나긋한 목소리였다.

사람들이 모이기 전까지 선생은 내게 수업에서 자신이 자주 말하는 몇 가지를 설명해줬고 대여섯 명쯤 모였을 때 가벼운 호흡으로 수업이 시작됐다. 오랫동안 몸을 쓰지 않아 몸 곳곳의 근육이 짧아졌다는 게 느껴졌다. 조금만 숙여도 조금만 몸을 늘여도 여기저기 통증이 심했다. 선생은 쉬지 않고 동작을 계속 해나가며 땅에 기대라는둥, 발부터 숨을 끌어올리라거나 발끝의 뿌리를 땅속까지 내린다고 생각하라는 등의 다소 도인적인 주문을 했고 동작 하나하나가 힘든 와중에도 머릿속으로는 모든 문장의 꼬투리를 잡아대고 있었다. 고질병이다.


간만의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눕고 싶었는데 수업에 가기 전에 밥을 앉혀놓은 동생이 나를 얼러 식탁 앞으로 끌었다. 밥은 먹고 자라나. 며칠 전 엄마가 집 앞 반찬가게에서 사다놓은 반찬이 냉장고 가득이었다. 짭쪼롬한 장아찌, 고소한 미역 줄기 무침, 따끈한 계란 후라이, 부드러운 장조림과 다소 싱거운 새알심 감자 같은 반찬을 늘어놓고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웠다. 벌써 여름인가 싶다가도 열어놓은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서늘해 입맛은 여전했다. 동생이 설거지를 할 동안 나는 빨래를 갰고 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머리도 말리지 못하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무겁고 깊은 잠이었다.

다시 나를 잠에서 깨운 건 이번에도 알람이 아닌 동생이었다. 친구와 만나기로 했다며 눈을 붙이기 전 분주히 나갈 준비를 했던 것 같은데 어쩐 일이냐 물으니 저도 졸음이 몰려와 좀 잤단다. 요가 선생이 요가는 별게 아니에요, 균형과 이완입니다, 했던 소리가 맴돌았다. 선생님, 저희 균형도 이완도 잃은 것 같은데요.


청명한 유월, 오후 네 시가 가까웠는데도 해가 길었다. 자는 새 이렇게 날이 좋았나 싶어 동생과 서로 게으르다며 목적 없는 핀잔을 주고 받았다. 자주 가는 집 근처 카페를 찾았다. 어지간히 찾아가 얼굴이 익은 카페 아르바이트생ㅡ정확히는 카페 주인의 첫째 딸ㅡ과는 어제가 되어서야 비로소 말을 텄다. 못 보던 안경을 쓰고 있길래 안경 맞추셨네요, 했더니 요즘 눈이 조금 안 좋아졌다는 답을 들었는데 오늘은 내가 건넨 카드에 붙어 있는 캐릭터 스티커를 보며 몇 마디 아는 체를 덧붙인다. 동생은 시원한 오미자차와 치아바타 샌드위치를 시키고 나는 코스타리카 원두를 기계로 내려달라고 부탁하곤 2층으로 올라갔다. 물론 케냐 원두를 갈아줘도 모를 것이다.

협소한 공간이지만 사람들이 전부 질서 있고 조용히 자신의 용무를 해결하고 있었다. 각자 핸드폰을 보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제목을 알 수 없는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는 할아버지도 있었고 우리가 앉은 테이블 바로 옆에는 동생처럼 시험 공부를 하는 대학생도 있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커피는 썼고, 그래도 한 모금 넘기고 나면 혀끝에 쓴맛보단 향긋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맛도 났다. 그게 아르바이트생이 가져다 준 커피 설명서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 입 베어문 차가운 샌드위치도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체다 치즈와 머스타드 홀그레인 머스타드 소스가 꽤 잘 어울렸다. 동생이 강의서를 뒤적이며 시험 공부를 할 때 잡히는대로 들고 온 책을 폈다. 글쓰기에 관한 책이었는데 읽다보니 대단한 묘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요약하자면 일단 쓰자는 거고, 아무리 이상한 이야기여도 하루에 한 시간씩 일주일에 다섯 시간은 쓰자는 거고, 자신만의 마감을 정해놓고 어떻게든 쓰자는 거다. 특별히 어떤 방법을 얻어내진 못했지만 지금 이 일기를 쓸 정도의 동기 부여는 얻었으니 만족할 만해 끝까지 다 읽고 덮는 내내 마음이 동했다. 동생이 조금 남은 오미자차를 빨대로 쭉 빨아마시고 나도 다 식어버린 커피를 털어넣고 나서야 배가 고파졌다. 자리를 정리하고 카페를 나섰다.


저녁 때가 다 되었는데도 날은 눈이 부시게 환했다. 여름이 목전이었으나 저녁 시간엔 바람이 찼다. 동생은 순대국과 돈가스를 파는 길 건너 가게에 가자고 졸랐는데 나는 불현듯 중식이 먹고 싶어졌다. 두 번을 비기고 주먹으로 가위를 이겨 동생을 끌고 두 건물 옆 지하에 위치한 중식당으로 향했다. 건물주가 개업 초기부터 마음을 많이 바꿔 이자카야를 열었다가 만두국을 팔았다가 미술관을 열더니 결국은 중식당이 된 곳이었다. 월세 걱정 없이 마구잡이로 업종을 바꾸더니 중식당이 된 이후부터는 어쩐지 장사가 잘되어 지금은 몇 달째 장사를 이어나가고 있다. 짜사이와 단무지 등 밑반찬이 괜찮았고 따뜻한 차를 주는 것도 어쩐지 괜찮았다. 천장을 높게 터서 전체적으로 공간이 넓어보였고 천장 골조에 매달아둔 조명이 은은하게 테이블을 비춰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얗게 칠한 벽면에는 분기별로 유명하지 않은 젊은 작가들의 그림을 걸어두어 가끔 그림에 관심을 보이는 동네 사람들이 그림 가격을 묻기도 했다. 날이 더워져 찬물을 내준 종업원에게 뜨거운 차를 부탁하고 내 몫의 짜장면 한 그릇과 동생 몫의 콩국수를 주문한 뒤 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는 새에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기름진 양념과 면발을 고르게 잘 비빈 뒤에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간이 적당하고 면발의 익힘이 좋았다. 아삭한 단무지를 번갈아 씹을 때마다 기분 좋은 포만감이 들었다. 동생은 느리게 콩국수를 비웠고 중간에 얼음을 더 넣었다가 소금을 넣었다가 하며 나중에는 오이만 건져먹기도 했다. 나로서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식재료다. 요리를 다 먹고도 앉은 자리에서 차를 몇 번씩 마시며 사는 얘기를 했다. 그래봐야 그 애보다 고작 두 해 정도를 더 산 내가 떠드는 꼴이었지만.


집에 돌아가는 길엔 바람이 아까보다 더 찼다. 반바지로 드러난 맨다리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편의점에 들어서니 냉장고의 냉기로 두 배는 추워졌다. 인스턴트 커피와 동생이 좋아하는 과자 하나를 계산해 재빨리 나왔다. 공기에서는 축축한 물냄새가 났다. 내일 비가 오면 안 되는데, 투표를 하러 가야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며 커피에 빨대를 꽂아 쭈욱 들여마셨다. 달다. 아직 시기가 이른 여름 꽃들이 단지 곳곳에 심겨 있었다. 팬지, 나팔꽃, 수국, 메꽃, 분홍달맞이꽃....... 알록달록한 꽃들을 구경하며 그걸 심었을 동네 사람들이 조금은 귀엽고 사랑스러워졌다. 어떤 이익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아름다움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세상은 조금 더 둥그래진다. 오늘도 겨우 둥그렇게 하루가 진다. 내일은 많이 지칠 것이다. 오늘의 평화로 내일의 피로를 산다. 백수의 계산법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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