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 떨어졌다

2018년 2월 18일 월요일의 모양

by 비누


어제는 자려니까 갑자기 회사에서 해야 되는 일 때문에 잠이 안 왔다. 적잖이 뒤척이고 눈 떠보니까 흐릿한 아침. 날이 좀 누그러지면 금세 먼지가 자욱하다. 지난 밤에 골라놓은 옷을 대충 집어입고 빈속으로 집을 나섰다. 사과라도 먹으면 좋았을걸.

지하철에선 팟캐스트를 듣는다. 아침엔 도무지 졸려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게으르게 보여도 듣는 게 꽤 도움이 된다. 작가가 느릿느릿 읽어주는 책의 구절들을 더듬으며 아, 나중에 저 책을 읽어야지, 하는 다짐도 쉬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역에 내리면 근처 빵집에서 오늘 아침으로 먹을 빵을 고른다. 양쪽으로 두 개의 빵집이 있고 꽤 이름 있는 프랜차이즈 빵집 옆엔 조그만 주먹밥을 파는 가게에서 샌드위치 등을 함께 늘어놓고 회사원들의 이목을 끈다. 나는 출구에서 가까운 빵집에서 고구마 앙금이 든 패스츄리와 맹맹하고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을 샀다.


회사에 일찍 도착하면 기분이 좋다. 1등으로 도착한 줄 알았는데 아침 수영을 마친 이사가 먼저 자리에 앉아있다. 명절을 마친 다음 월요일이었기에 명절을 잘 보냈느냐는 가벼운 물음을 주고 받았다. 나는 옷을 자리에 걸어두고 컴퓨터를 부팅한 뒤, 회사 커피 메이커의 물통과 부속품을 깨끗이 닦고 새로 물을 가득 채워놓는다. 그때 부사장이 출근했다.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턱까지 커트를 했다. 인사가 짧고 대화를 잇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다. 나 역시 조금은 불편해진 기분으로 오늘 할 업무를 대충 정리해본다. 많지는 않다. 운이 좋다면 일찍 퇴근할 수 있을 것이다.


출근 시간이 가까워오자 대리와 과장이 차례로 출근했다. 빈 자리가 채워지고 평소와 다름없는 월요일 아침이다. 연휴 동안 오래 비워져 있던 회사가 전체적으로 썰렁해져 키보드를 두들기는 내내 입김으로 손을 녹였다. 잠깐 남극을 상상한다. 펭귄들이 아무것도 모른채로 책상 사이를 뒤뚱뒤뚱 걸어다닌다. 귀여워서 잠시 또 맥이 풀린다.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아침 업무를 마치고 나니 금세 점심 시간이다. 점심을 먹기로 한 몇 사람이 모여 회사 앞에 새로 생긴 고기집으로 향했다. 점심 특선 메뉴가 꽤 괜찮았다. 한우 된장찌개를 먹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불고기 비빔밥을 시켰다. 놋그릇에 각종 야채를 얹어 꽤 신선한 맛이었다. 고추장을 휘휘 풀어 숟갈로 몇 번을 쓱쓱 비빈 뒤에 크게 크게 퍼먹었다. 호박이나 무채가 입 안에서 어석어석 씹히고 상추가 고소한 맛을 냈다. 눈 깜짝할 새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나니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수저질을 하고 있다. 배가 고플만도 했다.

식당 근처에 올리브영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조금 사고 나니 점심 시간이 끝났다. 요즘 내 점심 시간은 체감상 15분 정도다.


오후 업무는 진전 속도가 생각보다 느리다. 사수가 봐주어야 하는 업무가 내가 해야 하는 업무보다 많아 일이 앞으로 나아가질 않았다. 사다놓은 말린 망고를 씹는 와중에 이가 떨어졌다. 정확히는 교정을 위해 붙여놓은 접착제가. 이와 이 사이 빈 곳을 혀로 자꾸 만져본다. 철사와 치아 사이가 비어 휑하다. 어찌저찌 퇴근 시간이 되어서야 오늘 하루치 궁금증을 늘어놓고 수정할 거리를 잔뜩 안은채 잔업을 했다. 그새 부사장과 이사가 나누는 회의가 탁 트인 휴게실에서 새어나왔다. 나와 내가 맡은 업무 이야기도 오고가는듯해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이다. 서둘러 업무를 마치고 조용히 남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뒤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아침에 다 먹지 못한 식은 커피 위에는 기름이 둥둥 떠다녔다. 화장실 개수대에 부어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일기를 적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를 간추리려니 그것도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떠올려 보니 평소와 다른 사소함이 눈에 띈다. 집에 돌아와 아주 늦은 저녁을 먹고 엄마와 회사 이야기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샤워를 하고 꼼꼼히 팩을 붙인 뒤 일기를 마저 썼다. 오늘의 나는 오늘의 내가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테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외계인이 아주 먼 미래에 값지게 읽어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방 정리를 하다가 아침에 먹지 못한 고구마 패스츄리를 발견했다. 내일 아침으로 먹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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