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단상2

2017년 8월 18일 금요일의 몰성실

by 비누


이건, 인스타그램에 '열심히 살기 싫다'라고 적은 지 하루만에 벌떡 일어나 하루 종일 스스로를 들들 볶았던 금요일에 대한 회고다.


여름 방학 동안 한국에 어학 연수를 온 중국 친구 H를 만나기 위해 잠든 지 네 시간만에 눈을 떴다. 10분만 더, 하던 게 20분이 되는 바람에 뭘 골라 입는지도 모르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지하철에 탔다. 안암은 생각한 것보다는 가까웠고, 오랜만에 만난 H는 어쩐지 한 달 반만에 약간은 한국인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거의 2년만에 만나는 거였는데도 어색해 할 틈없이 중국어로 대화를 나눴다. 그래도 나름 쉬지 않겠다고 지난 학기에 부단히도 수업을 들었는데, 중국에 있을 때만큼 유창하질 못해 몇 번씩 버벅거리길 반복했다. 학교 식당에서 주로 밥을 사먹는다는 H를 데리고 근처 일식집에 들어갔고 나는 카레를 H는 규동을 먹으며 사는 얘기를 했다. 특별한 맛은 아닌데도 가게 이름은 '특별식당'이었고 그럼에도 허기에 바닥까지 긁어먹고 나서야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H의 한국어 교재를 나누어 보거나 주변 사람들의 신변잡기 같은 이야기를 하다가 그의 수업 시간이 되어 헤어졌다.


지하철을 타고 종각에 내려선 중국 은행에 들렸는데, 이번 중국 여행 때 쓰고 남은 돈이 은행 카드에 남아 있던 탓이었다. 블로그 후기에서 간간이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오전부터 기다려야 한다는 글을 봤는데, 웬걸, 대기인수가 42명이나 됐다. 은행 안을 빼곡히 메운 사람들이 저마다 맥아리 없는 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훑었다. 거의 창백해진 사람들이 순서에 가까워진 사람들이었고, 그나마도 얼굴이 붉어 더위를 느끼는 사람들은 오늘 안에 일을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다들 통장을 만드는 모양인데, 나는 그마저도 필요 없고 잔액 확인이나 계좌 이체 정도의 업무를 볼 생각이었기에 급한 마음으로 은행에 앉아 은행에 전화를 걸었다. 무미건조하지만 내 말을 자르지 않는 은행원은 또박또박 ATM을 이용하라고 알려 줬고, 생각보다 간단하게 일을 마친 나는 번호표를 가능한한 잘게 구겨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선 미뤄놨던 숙제 같은 필름을 맡겼다. 일본을 5월에 다녀왔으니 거진 3개월만에 빛을 보는 셈이었다. 그나마도 현금이 없어 못 맡길 뻔하다가 저녁에 계좌 이체를 하기로 하고 문을 나섰다. 좋은 세상이다. 건물을 빠져나오니 구름이 걷혀 볕이 유난이었다. 할 일을 모두 끝내고도 3시였다. 답지 않은 부지런함은 하루를 길게 만드는구나. 들어가고 싶지가 않아서 길에서 영화관 어플리케이션을 몇 번씩 새로 고치다가, 혹성탈출을 예매했다. 유인원 이야기가 끌렸던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이상하게 이 시리즈는 놓치지 않고 보는 것 같네. (생각해보니까 사실 보건소에 갔어야 했는데 이때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씨네 라이브러리에서 <바깥은 여름>을 읽다가 칠리치즈 핫도그 하나를 허겁지겁 먹고 영화를 봤다. '시저'가 너무 설경구랑 닮아서 보는 내내 약간 웃음이 났다. 영화는 새롭지는 않았지만 생각할 건 제법 있었고 그런데도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로 영화관을 벗어났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선 마지막 챕터를 읽었다. <어디로 가고 싶나요>라는 단편에서, 명지는 시리한테 자꾸만 말을 걸었다. 고통이 뭔지, 자기랑 자고 싶은지도 묻는다. 나는 집에 오는 버스 안에서까지 그걸 읽다가 내려서 희미한 가로등 불 아래서도 읽다가 자동 현관문에 얻어 맞기까지 했다. 우편물을 찾다가 나랑 눈이 마주친 여자 주민은 "어떡해"하고 혼잣말 같은 탄성을 내지르다가 "괜찮으세요?"하고 물었다. 민망해진 나는 "괜찮아요, 괜찮아요" 말도 안 되는 손사레를 치며 계단으로 도망쳤다. 뜻하지 않게 들은 위로가 내 마음을 염려하는 게 아니었음을 알았는데도 뭔가를 들킨 사람처럼. 맞은 자리가 얼얼해 한동안 꾹꾹 누르는 걸 잊지 않은 채였다.


집에 와서는 깎는 와중에 팔 위로 물이 줄줄 흐르는 하얀 복숭아를 두 개나 먹고도 헛헛해 라면을 다 비웠다.

창문을 여니 바람이 시원한데, 여전히 방에서는 물냄새가 났다. 아직도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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