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단상1

2017년 7월 14일 금요일의 시시콜콜함

by 비누

계절학기가 끝났다. 2년 반 같던 2주 반이었다. 아직 성적은 나오지 않았지만 결과에 상관없이 이 계절만큼 치열했다. 2시간의 수업을 위해 4시간씩 예습을 했고, 사전을 뒤지고 중국 사이트에서 검색을 하는 동안 지식이나 지혜가 얼마나 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실이나 인내 같은 덕목과 조금은 친밀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조금 늦은 여름방학을 맞았다.


얼마 전부터 골목길의 틈새나 담장마다 붉고 노란 능소화가 눈에 띈더라니, 장마의 시작이었다. 오늘은 외출 준비를 마칠 때쯤 창밖에서 무시무시한 천둥이 내리쳤고, 우산을 챙겨 나섰을 땐 이미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나무들은 저마다 바람에 맞춰 제멋대로 머리를 흔들었고, 바닥은 온통 물빛으로 반질반질해져 더욱 뻔뻔해졌다. 보도블럭을 뚫고 자라던 잡초들은 왠지 모르게 죄다 뽑혀 흘러다니고 있었고, 전단지나 비닐봉지 같은 게 잔뜩 젖어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이 불어 있었다. 10분 전만 해도 창문을 열어놓을 정도였는데.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다가 오늘 해야 하는 일들이 떠올라 용감하게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고작 5분만에 발과 다리, 매고 있던 배낭이 온통 젖은 채로 지하철에 탔다. 에어컨 바람이 제법 찼고 눅눅한 공기에 기분은 금세 꿉꿉해졌다.

연락하던 친구에게 비가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더니, "에?"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동작대교 위의 서울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서울 참 넓네. 국지성 호우가 유달리 잦은 여름이다. 젖은 우산을 꼭꼭 잠그고 소름이 돋는 종아리를 한 번 문질렀다.


학교 근처는 오히려 맑고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한의원에서 침을 맞았고, 직원이 친절한 카페에서 1,500원짜리 대형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샀다. 커피를 쭉쭉 빨아들일 때마다 식도를 타고 꿀렁꿀렁 음료가 시원하게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커피를 못 마실 때는 어떻게 여름을 난 걸까.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된 이후부터 여름을 좋아하게 된 건 아닐까. 그런 생각.


돌아오는 길에는 시든 능소화 무리를 만났다. 눈이 오나 비바람이 치나 걔들은 물을 먹고, 바람을 타고, 볕을 헤아리며 성실하게 짙어지던데, 나는 사는 게 자주 넌더리가 나 하던 일을 전부 그만두고 싶어졌지. 실개천 옆에 듬성듬성 자란 배롱나무와 마주치고, 단지 안을 점령하고 있는 개망초랑 인사하고, 아파트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동아리에서 심은 봉선화나 팬지, 오리엔탈 백합이나 꽃잔디와도 짧게 목례하는 여름. 하늘은 잔뜩 울고 난 뒤의 개운한 얼굴로 근사한 노을을 내놓을 준비로 바빴다.


집에서는 밥 냄새가 났다. 중성 세제를 풀어 샌들을 담가놓고, 손을 씻고 장아찌나 김, 절인 깻잎이나 참치를 찬 삼아 저녁을 먹었다. 에어컨을 틀어두고 뜨거운 물로 컵과 그릇을 닦고, 마트에서 우유와 과일잼, 린스를 샀다. 참외를 깎아 먹고, 손톱을 칠하고, 선풍기를 틀어두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었다. 이 글을 마치고 나면 다 보지 못한 영화를 마저 보고 샤워를 하고 로션을 바를 것이다.


여기까지 적고 나니 참 별일 없다는 생각이 든다. 더 어릴 땐, 삶이 뭔가 별일을 준비해 줄줄 알았다. 내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 요즘엔 '별일이 없어서 다행이다'라는 말을 분기별로 모든 일기에 적는다. 여전히 가끔 적적하고, 이유 없이 허기가 잦고, 방향 없이 괴롭지만 유난에도 정도가 있다.


가끔씩 오늘처럼, 마음에도 국지성 호우가 내리고 또 아무렇지 않아질 것을 안다. 개운한 얼굴로 세상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할 준비를 하겠지. 7월, 어느덧 장마도 여름도 반이나 지나온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