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인생을) 백업하셨나요?

2018년 11월 26일 월요일의 뉘우침

by 비누

이 험한 이야기의 시작은 바야흐로 2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리 경고하지만 정말 지지부진하고 길고 재미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기록할 필요성을 느껴 크게 심호흡 한번 하고 적겠다. 읽으시려거든 거기 계신 당신도 한껏 숨을 들이켜 주시길!


그러니까 백수의 삶이란, 갑자기 침대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문득 오랫동안 하지 않은 일을 해치워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움직여 버리는 데서 시작한다. 그날은 이상하게 여태까지 미뤄온 '노트북 용량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맥북을 써본 사람은 알겠지만 어느 날부터 이놈이 어떤 파일들을 죄다 '기타 용량'으로 분류하기 시작했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정도만을 겨우 구분할 줄 아는 주제에 이걸 타개하는 동시에 2GB밖에 남지 않은 용량을 늘려보겠다는 심산으로 노트북 정리에 들어갔다. 사진을 외장하드에 대충 옮겨놓고 나니 2018년 초의 사진들이 몽땅 '기타 임시 파일'로 읽힌다는 걸 알아냈다. 3개월간 회사 다닌다고 빌빌대느라 찍은 사진이라곤 겨우 대리님 사진밖엔 없는데 올해 초에 도대체 뭘 하고 다닌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혹시 OS 버전이 낮아서일까? (하고 의문이 든다면 당신도 그 의문을 접어두길 바란다.) 하는 의문이 들어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확인해보니 마침 업데이트를 하라길래 옳다구나, 하고 다운을 받았다. 애플 서비스 지원 센터에 어드바이저와 상담을 예약해두고 내일은 컴퓨터를 정상적으로 복구시키고 글을 써야지, 하는 심산으로 잠에 들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몰랐다.

다음날, 노트북 하나만 단출하게 집어 들고 집 앞의 카페로 향했다. (맙소사! 이게 그렇게 멍청한 일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평소에 좋아하는 원두를 골라 커피를 주문해두고 업데이트를 시작했다. 얼굴을 익힌 카페 주인이 조금 피곤해 보인다면서 초콜릿 과자 두 개를 커피에 곁들여 주었는데, 당시엔 그냥 잘 먹고 잘 자고 카페에 나간 터라 '내 얼굴 피곤해 보이나 봐.......' 하며 웃고 말았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건 어떤 복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과자를 먹는 와중에 잘 진행되던 업데이트는 돌연 중단을 선언했고 얘가 시키는 대로 컴퓨터를 재시동했건만, 갑자기 모니터 위엔 물음표 표시가 박힌 폴더 화면 하나가 뜰뿐이었다.

빈츠가 맛있어서 더 눈물이 났어.......
대체 이 화면을 몇 번이나 본 건지 모르겠다.

당황스럽긴 내가 더 당황스러운데 왜 지가 물음표를 띄우냐 이거야. 급히 애플 서비스 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왜 컴퓨터가 사진을 기타 파일로 인식하나요?' 수준의 가벼웠던 질문은 이제 '컴퓨터가 안 켜지는데요.......' 하는 멍청한 질문으로 바뀌었다. 무엇을 도와드리냐는 산뜻한 어드바이저의 목소리에 갑자기 덥석 매달려 물어보지도 않은 걸 징징 윙윙 줄줄 읊어댔다. 상황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업데이트를 하던 도중 컴퓨터가 시스템을 인식하질 못해 켜질 못하고 있다는 거다. 데이터가 날아간 것 같았다. 90GB. 2013년부터 2018년까지의 약 6년간의 삶의 모든 흔적이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당장 5분 전이 너무 아쉬웠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사진 정리 같은 건 안 할 텐데, 아니 시스템 업데이트 같은 건 안 했을 텐데, 아니 더 높은 용량의 컴퓨터를 샀을 텐데.......

가장 빠르게 컴퓨터를 사용하는 방법은 첫째, 데이터를 포기하고 포맷을 해 시스템을 재설치하는 것. 둘째, USB나 외장하드에 시스템을 설치해 연결해서 켜보는 것, 그리고 셋째는 다른 맥을 이용해 시스템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첫째는 당연히 열외였고, 둘째와 셋째는 정황상 당장 실행해볼 수가 없었다. 어드바이저와 전화로 20분간 씨름을 했지만 번번이 실패였고 그는 데이터를 살리고 싶다면 사설 업체에 방문해보는 것을 추천했다. (물론 이 방법으로 복구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순 없다고.) 이때부터 주변에 징징거렸던 것 같다. 컴퓨터를 못 쓰니 여차저차 핸드폰으로 제일 괜찮고 비싸 보이는 업체를 찾아 전화를 걸었고 복구하게 된다면 50만 원이 들지도 모른다는 소리에도 50만 원으로 6년을 살린다는 게 생각보다 나쁘진 않게 느껴졌다. 컴퓨터를 접고 식어버린 커피를 원샷 때린 뒤 집에 들어갔던 게 그러니까, 2주 전이다.

이튿날은 답지 않게 부지런을 떨면서 노트북을 들고 사설 업체를 찾아 복구할 경우엔 40만 원이 청구된다는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이틀이 걸린다는 검사는 겨우 하루 만에 끝났고 수리 기사는 내게 "아무것도 복구할 수 없으니 와서 노트북을 찾아가라."는 말만 남겼다. 아찔했다. 어쩌면 복구할 수 있다는 마음 때문에 더 속이 쓰렸다. 바로 다음날 컴퓨터를 찾아 다시 카페에 앉았다. (이것도 하면 안 되는 짓이었다.) 지난번 어드바이저에게 전화를 걸어 포맷을 진행하겠다고 말하고 컴퓨터를 켰는데, 웬걸, 컴퓨터가 켜지는 데 40분이 걸렸다. 어드바이저님을 야근시키고도 마무리를 맺지 못했고 또 그다음 날은 그분의 전화를 기다리다가 하루 종일 잠만 잤다. 또 그다음 날은 참지 못하고 다른 어드바이저님에게 전화를 걸어 포맷을 진행하려고 했는데 뭐야, 데이터가 살아있잖아? 이 문제의 근원은 분명 백업도 안 하고 업데이트를 진행하려는 내게 있었지만 내가 멍청이처럼 사설 업체와 어드바이저님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한 건 바로 '파일 볼트'라는 맥북의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어드바이저님의 설명에 따르면 이놈은 내 파일을 하나하나 전부 암호화하는데, 이 때문에 사설업체에선 내 파일을 열 수 없었던 거란다. 살려야 한다. 이때부턴 그냥 이 생각뿐이었다. 새로운 어드바이저님과 몇 시간을 씨름하다가 서비스센터에 예약을 했다. 그다음 날은 서비스센터를 찾았고 서비스센터 측에선 컴퓨터를 포맷하고 시스템을 재설치해줄 수 있지만 데이터를 복구하는 것은 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럴 거면 애플 스토어에 가야 한다고. 이건 애플 어드바이저님도 미처 알지 못했던 상황이었나 보다. 그렇지만 아이폰 배터리 교환 때문에 예약은 이미 만석. 일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정말 노트북에만 매달렸던 일주일이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정말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다.

마운트는 안 되고, 용량은 97GB나 잡혀서 마음만 타들어가.

그리고 대망의 월요일. 이유도 없이 또 밤을 새우고 쪽잠을 물리쳐 애플 스토어로 왔다. 점심시간인데도 사람이 넘쳤다.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직원들은 '지니어스'라고 불렸다. 예약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자리를 배정받고 이 멍청이를 구제해줄 지니어스를 기다렸다. 오늘 나를 도와줬던 지니어스님의 닉네임은 '케빈'인데 상황 설명을 듣고 이리저리 궁리하더니 애플의 시스템으로 내 컴퓨터를 켰다. (아니 이 부분 뭔지 잘 모르겠어. 그냥 훅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약 2주 만에 내 데이터와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준비해 간 외장하드에(가져가길 잘했다.) 데이터들을 옮겼고 케빈은 나 대신 노트북을 포맷해주었다. 90GB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고 빠른 와이파이에 힘입어 노트북은 빠르게 복구됐다. 케빈은 정말 지니어스였던 거야. 그러니까 이게 이 지지부진한 이야기의 결말이다. 데이터는 살았고 노트북도 무사히 작동한다. 덕분에 이렇게 장황한 모험담도 적을 수 있는 거다.


공포의 2주 동안 나는 여태 내가 운 좋고 안일하게 노트북을 사용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다들 운영체제를 업데이트하기 전에는 백업을 했고 외장하드보단 한 달에 1달러씩 내며 아이클라우드를 사용하고 있었고 아마 물어보진 않았지만 절대로 카페 같은 데서 업데이트를 하진 않았을 거다. 여태 별문제 없이 6년간 구세대 맥북 에어를 끼고 살아온 나로선 남들 다 걸려본 독감을 뒤늦게 끙끙 앓은 꼴이라고 할지. 데이터를 되찾았으니 배운 게 많았다고 해도 될까?

한편으론 기록에 대해 만감이 교차한 시간이기도 했다. 90GB는 내 타이트한 노트북 용량에 빗대자면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지만 6년간 내 삶의 총집합이라고 보자면(아마 6년 전 자료들도 어딘가 꿍쳐져 있을 테니 그보다 더 오랜 시간들의 데이터겠지?) 그다지 많은 것도 아니었다. 한 사람의 생애를 전부 데이터화하면 얼마나 될까? 1TB는 되려나? 무형의 데이터들은 클릭이나 엔터 한 번에도 영원히 0과 1의 세계로 날아가버리고 그렇게 되면 나는 지금 여기 있는 나로서만 나를 증명해야 한다. 나는 모든 지나간 나들의 합이니까 사실 90GB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혹은 1TB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노트북을 날려버려도 상관없을 삶을 살아야 한다. 여행을 떠나서 본 모든 것들은 몸에 남아있다. 여태껏 사귄 친구들과의 소중한 기억은 (우리가 여전히 친구라면) 그들과의 대화 안에 살아있다. 지금까지 쓴 모든 것들을 전부 기억할 필요가 있는가,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던 글들은 모두 언제라 하더라도 보이지 못했을 글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지금까지 쓴 시간들이 무용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데이터가 돌아왔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쓸 수 있는지도 모른다. 잃어보니 소중하고 되찾으니 무겁다. 그 사이의 어딘가에서 나의 고통을 분담해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애플의 담당 어드바이저분들, 그리고 애플 스토어의 지니어스분, 그리고 징징거리는 내게 우리나라에서 제일간다는 데이터 복구 업체를 찾아 메시지를 준 모든 친구들에게 감사, 또 감사를.


그런 의미에서 오늘, (당신의 인생을) 백업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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