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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누 Jan 11. 2022

순정인 줄 알았더니 순 정이라네, <남산의 부장들>

2022년 1월 11일 화요일의 괴식

오늘부터 2020년부터 2021년까지의 연도별 박스오피스 순위에 따른 한국영화를 감상하려고 한다. 가장 첫 번째 영화는 2020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우민호 감독의 <남산의 부장들>. 제작연도는 2019년, 개봉 연도는 2020년으로 1월 22일에 개봉해 약 475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그 해의 한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2020년 한 해를 통틀어서 영화와 관련된 사업은 크게 직격탄을 맞다 보니 2019년 박스오피스에 비해서 관객 수가 반토막이 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19년의 경우, 5위였던 <봉오동 전투>가 약 478만의 관객을 동원했던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410억 원이 넘는 매출을 달성했고 손익분기점은 500만이었으나 부가판권 등으로 수익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미지 출처: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청룡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하고, 코로나19의 타격이 시작되었던 때 아슬아슬하게 개봉하여 겨우 손익분기점을 넘긴 <남산의 부장들>의 특별한 점은 무엇인가? 여태까지 10.26 사건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와 무엇이 다른가? 물론 그런 것을 논하기에는 나는 여태까지 10.26에 관심이 있지 않았고 때문에 해당 사건을 동일하게 다룬 <그때 그 사람들>이라는 작품도 보지 않았다. 우민호라는 감독이나 누아르라는 장르 특성도 그다지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게 사실이다.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하고 있기에 당연한 설정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짧지 않은 러닝타임 내내 이미 너무나도 많이 소모된 익숙한 얼굴들(이병헌, 이성민, 곽도원......)이 연기하고 있어 본 적 없는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순간들이 있었다. 유일하게 이름을 가진 여성으로 등장하는 데보라 김의 역할도 의문이다. 등장인물들은 잊을 때마다 한 번씩 "미친년처럼 굴지 말고", "우리 말고 마누라가" 등의 언행을 뱉는다. 2020년 박스오피스 1위라는 이유로 이 영화를 봐야 하다니, 낙심하고 있던 차에 그래도 재미있는 점을 발견한다. 그 점은 바로, 박통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밑 사람들을 '임자'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임자

1. 물건을 소유한 사람.

2. 물건이나 동물 따위를 잘 다루거나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

3. 부부가 되는 짝.


그렇다. 임자는 보통 부부 사이에서 부르는 말이다. 물론 모든 물건에는 그 임자가 있어, 등의 뜻으로도 많이 사용되니 여기서의 임자가 무조건 3번을 뜻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 권력의 암투 관계가 꼭 서로의 마음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처럼 그려진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남산의 부장들> 역시 모든 인물들에 허구의 이름을 부여하며 사건의 순서나 실제 사실을 다소 각색하였기에 나 역시 그 각색한 부분에 중점을 두어 이 '임자'들의 관계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대체, 그들은 왜 그런 걸까?


코리아 게이트가 터진 뒤 미국에서 박통(이성민 분)에 대해 고발하는 박용각(곽도원 분)은 자신을 찾아온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병헌 분)과 이런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혁명을 왜 했냐?" 그들이 목숨을 걸고 왜 혁명을 했는지는 김규평도, 박용각도 모른다. 그러니 이들 관계에서 '함께 혁명을 한 사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그 유통기한을 다했다는 말이 된다. 함께 목숨을 걸고 혁명을 했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서로가 서로의 원수가 된 지 오래다. 남산의 부장이던 시절,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박통에게 박용각은 각하가 원하시는 대로 하겠노라 충성한다. 각하는 다정하게 말한다.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 임자 곁에는 내가 있잖아."


그 말을 덥석 믿은 박용각은 잔인한 고문의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고, 이는 결국 다시 박통을 향한 화살로 돌아온다. 곁에는 내가 있잖아, 무서울 것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은 실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네가 부장이라면, 나한테 필요한 것을 해 봐. 또는 내가 원하는 것을 맞혀 봐, 정도가 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박용각은 꼬투리를 잡혀 남산에서 쫓겨난다. 언제는 임자라더니, 충성을 바쳐 일을 해놓고 오니 돈 내놓으란다. 결국 박용각이 이 깍 깨물고 미국으로 날아가서 불어버린 것은, "우리 용각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내가 다 해 줄게."라는 말을 너무 철석같이 믿어버린 바보 같은 박용각이 더 이상 눈 뜨고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배신의 서막이다. 배신을 박용각이 먼저 했는가 하면 역시나 그것은 아니고 배신은 언제나 박통이 했다. 이미 혁명 동지로서의 사명감이나 충성을 잃은 박용각이 정말 배신을 당했다고 느끼는 것은, 모든 정보를 통제해 오고 있는 줄 았던 중앙정보부 외에 박통이 다른 인물을 시켜 비밀리에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믿었건만, 당신은 나를 믿지 않는다. 그렇게 충성을 바쳤건만, 당신은 알아주지 않는다. 개는 주인을 물기로 한다. 그리고 다른 개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말고 다른 누가 있다고. 우리는 2인자가 아니라고.


김규평은 극의 초반에는 이 말에 의심을 갖지만 연신 딸랑거리는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 분)에 밀려 계속 어딘가 소외되는 것이 슬슬 불만족스럽다. 박통은 혁명을 왜 했는지는 잊은 듯하고 계속 하야 시기에 대해 고민하지만 실제로는 내려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박통은 입에 발린 말만 하는 곽상천을 대우하고 간언 하는 김규평을 답답해한다. 그러면서도 따로 찾아와 위스키 한 잔을 건네기도 한다. 섭섭하지? 그리고 다시 말한다.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러나 실제로 박통이 원하는 것은 박용각을 죽이는 것 그 자체보다는 박용각이 가진 돈(아마도 땅)을 원했고 또는 그것조차 핑계일지도 모른다. 박통은 김규평에게 박용각이 그의 약점이 되도록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박통은 김규평이 박용각을 배신하도록 만든 다음, 김규평을 배신자로 몰아세운다. 그러나 그것이 김규평에게는 배신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좀 해 줄 수는 없어? 김규평은 박용각을 제대로 처리하지도 못했고, 담배 하나 제대로 가지고 다니지 못해 박통이 다시 '까부는' 곽상천을 불러들이게끔 한다. 이 과정은 박통을 사이에 둔 지독한 삼각관계처럼 보이고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박통 주변은 온통 박통의 마음을 차지하기 위한 구애 대작전이다. 이 이상한 에로티시즘이 이 영화의 재미있는 점이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주는 곽상천에게 박통은 귓속말을 한다. 여기서 김규평은 다시 박용각처럼 지독히 소외된다. 나는 2인자가 아니다. 나는 박통에게 단 한 명의 사람이 아니다. 나는 언제나 '대체'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중앙정보부장의 자리는 모든 정보를 쥐고 있는 자리임과 동시에 권력의 2인자이자 사실상 부총리인 자리이지만, 그에 따라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은 김규평도 박용각도 박통도 아닌 <남산의 부장들>인 것이다. 부장으로 불렸던 사람들. 18년의 재임 기간 동안 그 자리를 지나쳤던 사람들. 박통에게 한때 단 한 명의 사람이었다가 그저 한 명의 부장으로만 남았던 사람들.


누아르 장르에 대한 비선호를 제외하고서 마지막 사건이 벌어지는 술자리의 연출은 무척 긴장감이 넘친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 알고 있으면서도 관객은 숨을 멈추게 된다. 위스키를 잔뜩 들이켠 김규평은 친구를 죽였다며 이죽거리는 박통의 말에 트리거가 눌린다. 배신을 한 사람은 나도, 박용각도 아닌 당신이다. 무엇을 위해 혁명을 하였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당신의 단 한 사람이 되기로 하였는가, 무엇을 위해. 잃을 것 없는 김규평은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긴다. 까불고 재수 없던, 라이벌 곽상천을 먼저 쏜다. 그리고 총구는 박통을 향한다. 박통의 오른쪽 가슴에 정확히 총알이 박히고 막을 수 없을 만큼 피가 흐른다. 그리고 발사되지 않는 총. 다급하게 총을 찾아 1층으로 내려갔다가 2층으로 올라와 다시 곽상천을 쏜다. 여기서 재미있는 장면은 김규평이 곽상천의 피를 밟고 미끄러지는 장면이다. 다른 멋진 총잡이 영화와는 다르다. 김규평은 발사되지 않는 총 때문에 초조해하고 피를 밟고 엉덩방아를 찧고 구두가 없어 당황한다. 이 시퀀스 동안 계속 이어지는 이병헌의 황망하고 어안이 벙벙한 연기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일품이다. 당황하지 않은 척 머리를 쓸어 넘기지만 구두 없이 척척히 젖은 양말을 매만지는 김규평. 여기서 카메라는 부감으로 앞으로 나아가던 자동차가 이내 유턴을 하는 것을 보여 주며 막을 내린다.


그러니까 결국 김규평은, 박통이 시킨 대로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김규평만큼은 아무도 배신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서로를 배신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박통마저도 사는 내내 단 한 사람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영화는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던 사람들의 분투로 읽어도 뭐 어떤가 싶다. 거기서 육본이 아닌 남산으로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것은 별로 궁금하지 않다. 김규평은 육본으로 갔다. 그리고 다시 군사독재가 시작되었다. 다시 단 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역사적 사건을 모티프로 하는 이야기는, 특히 <남산의 부장들>처럼 실제와 허구를 혼재해 놓는 이야기의 경우 역사적 맥락이나 영화 바깥의 정세를 아주 무시하며 독해하기가 어렵다. 실제로 이 영화에 대한 평가가 많이 갈리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영화가 김재규를 두둔하거나 지지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을 재연하는 것에 어떤 의의가 있냐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굉장한 수작이라고도 한다. 내 경우엔 이것이 다큐멘터리가 아닌 영화이기에 감독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느냐가 느껴지지 않아 다소 아쉬웠다. 물론 영화를 통해 감독이 꼭 무엇을 말해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싶은 거다. 그래서 읽어낸 건 그저 사람 순정 가지고 장난치지 말자는 거고. 하여튼 남자들은 남자를 사랑해. 누아르 영화에서 수많은 2차 창작물이 태어나는 건 그러니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불한당>이나 <신세계>만 해도 그렇지 않나. 권력관계에서는 내 편이 필요하고 그 내 편은 때로 가족이나 연인보다 오랜 시간을 보내고 '믿음'을 전제로 한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배신하는가. 누아르식 사랑은 보통 그렇게 시작되는 것 같다.


그런데 이거 어떻게 끝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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