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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Jul 28. 2017

나로 사는 것이 지겨워 떠났고, 진정한 나를 발견했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나는 대체로 하루 일과가 정해진 삶을 산다. 아침햇살에 매일 설레며 길을 나서는 것도 아니고, 매일 이렇게는 못 살겠다며 투덜대는 것도 아니다. 점심 메뉴와 옷차림, 그나마 주말에 누구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정도의 변화를 주며 만족해야 하는 삶.


 퇴근길, 늘 이 정도면 충분히 애썼다고 느꼈다. '더 이상의 일은 벌이지 말자. 이렇게 조용히 할 일만 하고, 되도록 쉬자'라고 매일 생각했다. 골치 아픈, 호흡이 긴 생각은 되도록 자제하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 내 일상은 더없이 평화로워졌고 다소의 여유까지 허락되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나는 스스로의 쓸모에 대해, 내게 주어진 삶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다. 해야 할 일만 하는 이토록 최소한의 삶을 내 인생이라고 인정할 것인가?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월터는 유명 매거진에 실릴 사진을 인화하는 말단 직원이다.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 자기소개란을 다 채우기 어려울 만큼 가본 곳도, 잘하는 것도, 해본 것도 없는 월터의 유일한 취미는 바로 상상하기. 정신 똑바로 차리고 대처해도 모자랄 상황에 처할 때마다 월터는 도피하듯 정줄을 놓고 무엇이든 가능한 자신의 공상 속을 뛰어다닌다.  


'저런 상황에서 똑소리 나게 대처를 못하고 망상에 빠지니 만년 말단이지'라고 월터의 무능함을 꼭 실제 인물처럼 비난하는 스스로를 발견했을 땐 얼마나 놀랐던지. 거래처 직원이나 몇 주 못 버티고 떠나간 이들을 두고 입버릇처럼 저렇게 무능한 사람이 많아서 큰일이라고 하던 회사 어른들과 똑같은 판단 기준을 갖게 돼 버렸다는 게 씁쓸했다. 월터는 이제 곧 상상이 모두 현실이 되는 기적을 겪을 행운의 영화 주인공인데 나의 비난 섞인 우려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냐만은.


 월터는 딱히 이렇게 살다 죽을 순 없다! 하는 결단이 서서 여행길에 오른 건 아니다. 늘 우유부단하고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는 그가 지하 영사실을 뛰쳐나온 것은 바로 매거진의 스타 사진가가 자신 앞으로 '인생의 정수'가 담겼다고 말하며 보내온 사진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사진을 되찾고자 잠시 나온 월터의 외출은 만취 조종사가 모는 헬리콥터를 타고, 조난당하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황야를 달리며 모든 것이 상상대로 이루어지는 모험으로 변해 간다.



(여기서부터는 스포 주의!)

우여곡절 끝에 월터는 편지로만 늘 연락을 주고받던 전설의 사진가를 직접 만나게 되고, 야생 동물을 찍기 위해 꿈쩍도 않는 그의 옆에 조용히 자리를 잡는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 그는 사진가가 말한 '인생의 정수'가 담긴 사진이 매거진 마지막 호의 표지로 쓰인 것을 본다. 마지막 호의 표지는 바로 도시 한복판에 앉아 열심히 사진을 들여다보며 궁리하는 월터 자신이 찍힌 사진이었다.



 '열일하는 나', '이렇게 성실한 나'를 셀카로 찍어 올리는 부끄러움을 감수하지 않는 한, 누구 하나 나의 고된 일상을 알아주지 않는 현실에 사는 우리에게 월터의 이야기는 거의 판타지급이다. 게으르고 수동적인 우리를 억지로라도 여행하라고 떠밀어주는 계기는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닐 것이다. 스타 사진작가가 열심히 사는 우리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인생의 정수'라고 불러주기를 기대하기는 더욱이 어려울 것이다.






 타인에게서 극적인 반전이나 구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삶이라면, 나라도 이 일상에서 스스로를 구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열심히 하루를 살아낸 나에게 보상으로 텅 빈 시간을 선물한 게 지난 3년의 나의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채움으로 내게 보답하고 싶다. 한 때 친구들의 카카오톡 상태명을 휩쓸었던 'YOLO(You only live once)'라는 말에는 그다지 공감을 못하지만 (난 여러 번 영원히 살고 싶어!) 몇 번을 살든 간에 인생은 그 자체로 설레고 재밌어야 한다는 핵심만큼은 더없이 공감한다. 그래서 지난 3년간의 스스로에게 조금 지겨워진 이 시점, 나를 다른 각도에서 사진 찍듯 재발견하는 글쓰기를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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