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보이 인 뉴욕, 2017
마크 웹 감독을 잘 알지는 못한다. 다만 <500일의 썸머>를 매우 좋아해서 한 10번은 본 것 같다. 그래도 그 감독의 신작이라고 해서 기대가 될 만큼 그를 잘 아는 것은 아니라 사실 아무 정보 없이 영화를 보게되었다.
뉴욕이 예전의 영혼을 잃었다는 나레이션이 귀여운 그림체와 함께 흐르는 오프닝만 해도, 이 영화가 뉴욕과 예술에 대한 향수를 그리는 내용인 줄만 알았다. 사실 영화의 제목, 서두와 말미에 나오는 뉴욕에 대한 대사, 토마스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플롯이 약간 따로 논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다. 어쩌면 감독이 보여주고자 한 메시지를 나는 다 느끼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리빙 보이 인 뉴욕>은 사라져 버린 뉴욕의 예술가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전에, 평범했던 소년의 일상에 찾아온 소설같은 일들이 팝콘 튀듯 연이어 일어나다가, 놀랄 만큼 이 모든 것이 쉽게 마무리되는 이야기이다. 성장 영화로 보기에도(이 일련의 사건들이 주인공이 성장하기 위한 단계라고 볼 수 있을까) , 로맨스 영화로 보기에도 (주인공이 겪은 감정은 과연 사랑이었을까?) 애매한 지점이 있지만, 분명 즐거운 영화였다.
늘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꿈을 향해 늘 정진하지는 않는 보통의 우리와 비슷한 주인공 토마스. 그는 늘 스스로를 포함한 주변 환경에 대해 쓸데 없으며, 평범하다는 회의감에 빠져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아버지의 불륜을 알아채며 평범치 않은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토마스는 어머니가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과 우울에 시달린다는 걸 염려해, 이 불륜을 스스로 막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정작 아버지 앞에서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핑계로 그는 불륜 상대인 조한나를 미행한다. '아버지를 그만 만나세요'라는 한마디를 하겠다고 몇날 몇일을 쫓아다니다 보니, 조한나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 버린다. 그리고 토마스는 '우리 가정을 망치지 말아줘요'라고 하면서도 무의식적에 자신 또한 매력적인 조한나에게 끌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를 만난다는 이야기나, 출생의 비밀 등의 '막장 요소'가 불편하거나 싫었다는 사람들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주인공 토마스가 염려하는 것처럼 한 가정이 파탄난다. 누군가는 평생 용서받지 못하고, 누군가는 다시는 사랑할 수 없을 만큼 상처받아 버리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리빙 보이 인 뉴욕>은 등장인물 중 누구도 피해자로 오롯이 남지 않게끔 모두에게 하나씩 약점을 쥐어 준다. 마지막 반전은 모두 하나씩 가진 그 약점으로 하여금 상황을 공평하게 만드는 열쇠로 작용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 하다.
주요 등장인물인 여자 셋, 남자 셋은 내내 마음이 엇갈리지만, 마지막 비밀이 드러나면서 비로소 깔끔하게 정리된다. 세월이 흐르고 오랫동안 서로를 그리워하던 한 커플은 재회한다. '이혼과 두번째 결혼'이라는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던 다른 커플은 이따금 만남을 이어가는 연인으로 남는다. 해피엔딩으로 무작정 엮어주기 애매한 사이인 주인공의 여자 사람 친구는 해외로 떠나 너무 잘 지내는 나머지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고 한다. 한 때는 여자를 두고, 진로를 두고 다투던 아빠와 아들은 정감 어린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걸어간다. <리빙 보이 인 뉴욕>의 세계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거나 받는 이 없이, 한 차례의 폭풍이 지나 모두가 담담히 자신의 길을 다시 걸어간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가볍고 즐겁게 마무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를 통해 우리 현실의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이나 질문을 남길 수는 없었다. 현실의 우리는 무언가를 택할 때 전후 상황,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극 중 토마스는 삶(또는 자신의 존재)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청년이라는 정체성 외에도, 아버지의 불륜으로부터 어머니를 지켜내고자 하는 아들이자, 어른 세계에 물들지 않은 착한 남자 사람 친구의 역할도 맡고 있다. 픽션 속 토마스는 그 모든 역할의 기대를 깨버리고도 파멸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나는 누군가의 딸이자, 착한 친구이기 전에 내 맘대로 사는 인간이다!' 를 외치기 쉽지 않은 '현실의' 존재들이다.
요즘을 살아가는 이들이 '책임감'이나 '역할'이라는 말에 유독 지쳐있는 듯 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최근 베스트셀러에 오른 도서 제목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처럼 나 하나 챙기기 빠듯한 시대다. 가끔은 헌신이나 책임을 던지고 모르는 사람을 만나 아무말 대잔치, 아무행동 대잔치를 벌이는 게 차라리 편하겠다 싶을 만큼 우리는 기존의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스스로에게 질리기도 한다.
마크 웹이나 우디 앨런의 영화 속에서 개인의 도피나 일탈은 달콤한 기억을 남길 뿐 상처를 주지 않는다. 그런데 왠걸, 현실에서 도피를 택하면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어제 스트레스를 받았으니 오늘은 일탈을 한 번 해보려다 다음 날 이불킥만 한다.
인생은 어쩐지 편리한 방향으로 잘 풀리지 않는다. 현실의 우리는 '일단 오늘만'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하지 말고 직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가끔 필요한 게 아니라 생각보다 더 자주, 내 삶을 직면할 용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