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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Apr 06. 2019

인류의 마지막 아이에 대한 이야기

칠드런 오브 맨(사람의 아이들), 1992

영국에서 1990년대 쓰인 소설 <사람의 아이들(아작, 2019)> 소설과 그를 바탕으로 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칠드런 오브 맨>오메가라고 불리는 마지막 아이들이 태어나고, 인간이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하는 어느 근미래의 이야기이다. 어느 토요일 소설을 읽고 나서, 바로 다음 날 영화를 찾아보았다. 


 이야기의 주 무대인 영국에서는 독재정부가 출범해 주기적으로 국민들을 대상으로 점검을 하지만, 인간이 생식 능력을 잃었다는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오메가 세대들도 거의 성인이 되었고, 아이가 없어진 세상에서 학교가 줄줄이 문을 닫고 가족의 의미도 흐려진다. 사건의 시작은 별 볼 일 없는 교수인 주인공 테오의 삶에 임신한 여성이 불쑥 끼어들면서부터이다.


(영화와 소설 모두에 대한 대량의 스포 주의...!)




영화와 소설 둘 다 테오를 주인공으로 전개되는데, 영화에서는 아이가 죽은 뒤 헤어진 아내가 나타나, 그녀가 이끄는 혁명 세력에서 보호하는 젊은 여성을 보호하는 데 협조해 달라고 요청한다. 원작 소설에서는 혁명 세력 '다섯 물고기'의 핵심 여성 구성원이 임신한 설정이다. 이보다 눈에 띄는 두 작품의 차이는 원작 소설에서는 남성이 생식 능력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반면, 영화에서는 여성의 유산율이 점차 높아지더니 아예 임신이 불가능해지는 설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후반부에 태어나는 유일한 아이도 소설에서는 남자아이, 영화에서는 여자 아이이다. 불임의 원인이 되는 쪽의 성별을 가진 아이가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이 모종의 희망과 여전한 불확실성을 가장 잘 전달하기 때문이었을까?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그래비티, 로마에 맥을 잇는 여성의 힘과 생명이라는 소재에 특히 관심을 두기 때문에 이 설정을 바꾼 것일 수도 있겠다고 어림잡아 생각했지만, 이 설정의 변화는 소설과 영화 사이의 전개를 크게 바꾸는 작지 않은 차이이다. 


 영화에서 혁명 세력이 아이를 데리고 있으려는 이유가 일종의 협상력을 위함인 것으로 표현된다. 그들은 아이를 지키는 쪽이 권력을 쥘 것이라고 믿고, 이를 바탕으로 그들 집단이 원하는 것들을 독재 정부로부터 얻어내고자 한다. 일종의 디스토피아 액션 영화 같은 전개다. 반면 소설에서는 스스로를 아이의 아버지로 믿는 혁명 세력 중 한 명의 남자가 자신이 유일하게 생식 능력을 가진 남자일 수도 있으니 이를 바탕으로 자신이 권력을 쥐고 인류를 다시 세울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모든 국민의 아버지가 한 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주인공 테오는 그에게 현재 영국을 지배하는 독재 정부와 다를 것도 없는 소리라고 쏘아붙인다. 모든 인류가 한 명의 아버지를 갖는 것과 비교해 뭐가 더 절망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아이의 아버지는 그 야망을 키우는 남자가 아닌, 이미 중반부에 죽어버린 다른 혁명 단원인 것으로 밝혀진다. 영화에서 새 생명은 모두가 지켜야 할 희망이지만, 소설에서는 희망에 부풀었던 이들을 놀리기라도 하듯 인류 새 출발의 가능성을 일축해 버린다. 




원작에는 없지만 영화에서는 가장 강렬하고 주요하게 다뤄지는 장면은 혁명세력과 정부군 사이의 무력 대치 상황에서 아이를 안은 어머니가 구출되는 부분이다. 잿빛 먼지로 무너진 도심 한복판에서, 갓 태어난 아이를 안고 가는 어머니 앞에서 군인도, 반군도 무기를 내려놓고 길을 비켜선다. 모두가 경이에 찬 눈으로 아이가 지나가는 길을 바라보고, 누군가는 기도를 읊조린다.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라이프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구원을 받고, 영화는 암전 상태에서 여러 아이들이 웃는 소리를 통해 희망적 미래를 암시하며 끝난다. 원작 소설에서는 작은 헛간으로 쫓아온 독재자 총통과 평의회 의원들과의 작은(?) 실랑이 끝에, 평의회원들이 아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새로운 권력의 등장을 알리며 끝난다. 어쩌면 모두가 새 생명의 탄생을 목격하고 짧은 순간이나마 폭력을 멈추는 영화에 비해 소설은 훨씬 냉정하다고 느꼈다. 독재 정부 하에서 인류를 바꿀 기적이 모두의 눈 앞에 공평하게 공개될 리 없다. 소수가 희귀한 정보를 독점하고, 이를 자신의 이야기로 가공해 선심 쓰듯 대중에게 선포할 것이다. 


인류 영속의 기회를 앗았다가 다시 돌려준다면 우리는 그런 극단적인 상황을 겪고 나서 화합할까, 분열할까? 부모님을 너무 사랑하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은 아직 잘 모르는 나의 입장에서는 상상하기 쉽지는 않다. 혹은 애초에 모성애보다 훨씬 큰 사회학적 난제일지도 모른다. 몇 년 전부터 '인구 절벽'이 화두였다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불만족스러운 사회에 대한 가장 개인적 저항이라고 분석하는 저널리스트의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최근에는 자발적으로 아이를 낳지 않을 뿐 아니라, 일각에서는 환경과 생활습관 등을 원인으로 지적하며 인간의 생식 능력 자체의 약화를 우려하는 연구들마저 나오고 있다. 


 P.D.James 는 아이가 사라진 소설 속 시대 배경을 2021년으로 설정했다. 이맘때쯤 이런 고민이 시작되리라는 걸 미리 알았을까? 정말로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우리에게 큰 위기가 천천히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 걸까? 그런 위기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알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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