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41일 차 : 40여 일의 마침표

28.8km, 8시간 걷기

by 베라노드림

드디어 오늘, 피스테라에서 좀 더 북쪽으로, 피스테라와는 또 다른 세상의 끝이라는 의미가 있는 묵시아로 향하는 날이다.

오늘로써 이 길을 마무리하는 거라 설렘과 아쉬움이 공존했는데 오늘 비가 안 온다는 소식에 조금은 기쁜 마음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마지막이니 만큼 조금 긴 거리를 가야 해서 이른 시간에 출발했다. 해가 뜨지 않아 캄캄했지만 춥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었고 이렇게 어스름할 때 걸으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이것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아쉽기도 했다.

걷다 보니 점점 해가 떴고 날이 밝았다. 구름이 참 이뻤고 걷는 길도 이뻤다. 오랜만에 구름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이렇게 좋은 날씨에, 이 길을 걷고 있으니 기분이 좋았고 햇빛이 내리쬐는 날씨였지만 숲 속 길을 걷고 있어서, 나무들이 햇빛을 막아줘서 그것 또한 좋았다.

오늘은 긴 거리를 걷는데도 불구하고 가는 길에 카페나 식당이 거의 없었고 13km 지점 마을에 딱 하나 있는 걸로 나와서 무조건 여기서 쉬어가야 했다. 순례길과는 벗어난 곳에 위치해서 약간 헤맸지만 다행히 잘 찾아갔고 여기서 점심을 먹고 쉬다가 다시 출발했다.


오늘은 걷는 동안 순례자들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산티아고에서 피스테라까지 가는 길에도 순례자들이 현저히 줄어서 거의 보지 못했는데 오늘은 특히 더 심했다. 중간 마을까지 가는 길에, 아니 묵시아에 도착할 때까지 순례자뿐만 아니라 현지인도, 사람 자체를 만나기 힘들었다.

이 길에는 오직 나와 동행만이 걷고 있었는데 조용했던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지막이라는 아쉬움 때문인지 동행과 이런저런 얘기를 더 많이 나누며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바다가 보였고 피스테라에서 보던 바다와는 느낌이 달랐다.

피스테라 마을로 가는 길에 보였던 바다도 좋았지만 묵시아 마을로 향하던 중 마주한 바다는, 내가 상상했던 곳과 비슷했고 나에게는 이곳이 세상의 끝이라는 상징과 더 잘 어울리게 느껴져서 감동이 더 컸다.





사람 한 명 없는 길을, 바다를 보며 걷는데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울컥하기도 했다. 다른 동행들에게 우리가 드디어 여길 왔다고 전해주며 영상 통화를 했다. 한국으로 돌아간 동행들도 있고 여행을 계속 이어 가고 있는 동행들도 있었는데 못 본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애틋하면서도 어제 본 것처럼 익숙하고 반가웠다. 다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고 다 같이 여길 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묵시아 마을에 도착해 숙소로 바로 가지 않고 0km라고 적힌 비석이 있는, 마을 안쪽으로 더 걸어갔다.

도착 후 동행과 바다를 보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아무 말 없이 앉아서 쉬었다. 세상의 끝이라는 이미지와 드디어 이곳에 왔다는 마음 때문에 이곳에서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어느 정도 쉬고 나서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0km라고 적힌 비석을 발견했고 사진도 찍었다. 바람이 많이 불긴 했지만 이곳을 떠나는 게 너무 아쉽고 미련이 남아서, 자리를 뜨는 게 쉽지 않았다.


겨우 그곳을 떠나 알베르게로 가서 체크인을 했다. 이 길에서 머물게 되는 마지막 알베르게였는데 시설이 좋고 깨끗해서 만족스러웠다.

짐 정리하고 씻고 피스테라 <->묵시아 구간을 완주했다는 증명서를 받았는데 어제 증명서를 받을 때보다는 조금 담담했다. 인증서를 받고 숙소로 돌아간 후 빨래방으로 가기 위해 다시 나왔다. 빨래가 돌아가는 동안 일몰을 보기 위해서 맥주와 간단한 간식거리도 샀다. 원래는 일몰을 보러 아까 갔던, 0km 비석이 있던 곳으로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촉박해서 거기까지 갈 수가 없어서 빨래방 근처에 있던 바닷가로 향했다.


이때 본 일몰은, 아마 평생을 잊지 못할, 내 생에 최고의 일몰이었다.

너무 이뻤고 날씨도, 분위기도 다 좋았다.

주변은 고요했고 붉은빛, 핑크빛, 파란빛, 보랏빛 등 다양한 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지나온 여정들이 생각나면서 마음이 뭉클했다. 마지막으로 걷는 날은 제발 비가 오지 않길 해달라고, 아니면 일몰 볼 때만이라도 비가 안 왔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었는데 그 마음이 닿은 것 같아서 기쁘기도 했다.

원래는 산티아고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오는 길은 혼자서 조용히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좋지 않았던 날씨와 사람이 너무 없어서 무서웠을 것 같은 이 길을 동행과 함께 걷게 되어서, 지금 이 감정을 공유할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었고 너무 감사했다.


오늘 드디어 40여 일간의 일정을, 몇 년을 버킷리스트로 생각해 왔고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 떠난 이 길을 무사히 끝냈다.

이제 진짜 끝이라고,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뿌듯하면서 후련하지만 아쉽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교차했고 특히 일몰을 볼 때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참 복잡한 마음이었다.

나는 이 길을 걷기로 결심하면서 걱정 아닌 걱정을 했었다.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무릎도 안 좋고 체력도 안 좋은데 분명 몸살 날 텐데, 당연히 아플 거라 생각해서 일정도 여유롭게 잡았었는데 그런데 나는, 정신력으로 버틴 건지 생각보다 강했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내 체력을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이 여정에서, 생각은 정리하지 못했지만 내 체력, 정신력까지 시험해 볼 수 있는 시간이지 않았나 싶고 충분히 만족스럽다.


어느 날, 걷던 도중 동행이 그랬다.

내가 짊어지고 갈 무게들을 버리지 못할 거라면 그걸 짊어지고 갈 수 있는 힘을 키워야겠다고, 걷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띵했다.

이 길을 걷는 동안 10kg 정도 되는 배낭을 메고 매일을 힘들게 걸었다. 물론 가방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가방의 무게 때문에 힘들었고 그렇게 힘들면 무게를 줄이면 되는데 그러지 못한 내가 보였다. 그래서 동행의 그 말에 깊이 공감했다.

동행의 그 깨달음이 나에게도 영향을 주어 그날은 걷는 내내 그 생각만 했다. 내가 감당해야 하거나 짊어지고 가야 할 것들이 버겁다면 혹은 그걸 버리지 못한다면 그걸 짊어지고 가야 할 힘을 키우면 되겠다고, 근데 아마 나는 그런 짐들을 버리지 못하고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될 것이라는 걸 알기에 반드시 그만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40여 일 동안 행복했지만 힘들었던 일들도 많았는데 그래도 잘 견뎠고 안전하게 잘 도착했다.

혼자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 떠난 길이었는데 끝내 생각은 정리하지 못했지만 애써 생각을 정리하기보다는 지금 느껴지는 것들에 집중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통해 나를 돌아보며 많이 배웠고 큰 깨달음도 얻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고 감사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해 조금은 더 알 수 있게 해 준, 귀한 시간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웠던 건 후반부로 갈수록 좋지 않은 날씨에 걷는 게 힘들어서 하루하루 무사히 도착하는 것만 생각하며 걷느라 이 길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한번 더 이 길을 걷고 싶다. 그때는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이 길을 온전히 즐기고 느끼며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여러모로 너무 힘들어지면 이 길에 섰던 그때의 내가 떠오를 것 같다. 그럴 때마다 그 기억으로 잘 이겨낼 수 있기를, 이 길에서 깨달았던 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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