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40일 차 : 기대와는 달랐지만, D-1

15.9km, 4시간 30분 걷기

by 베라노드림

어제 분명, 아주 행복한 마음으로 자려고 누웠는데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알베르게에 순례자들이 많지는 않았는데 너무 시끄러워서 쉽게 잠들 수 없었고 알베르게 구조가 특이해서 다른 방에 있던 사람들이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는 내 침대가 있는 쪽을 지나쳐가야 했는데 새벽에는 그 순례자들이 화장실을 가느라 내 침대 쪽을 지나다녀서 그 소리에 여러 번 깼다.


원래는 일찍 출발하기로 했는데 어제 잠을 못 잔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그동안의 피로가 쌓여서인지 일어나기 싫어서 꾸물 거리다가 겨우 일어났더니 이렇게 못 일어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며 동행이 놀라워했다.

그렇게 간신히 몸을 일으켰고 씻고 준비 후 어제 마트에서 사뒀던 과일과 요플레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출발했는데 준비하는 동안에도 계속 꾸물 거려서 결국 나가기로 했던 출발시간보다 1시간이나 늦게 길을 나섰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아직 완전히 해가 뜨지 않아 어스름했지만 하늘이 맑아 보여서 오늘 날씨는 좋겠다 싶어 출발부터 기분이 좋았고, 해가 떠오르는 하늘이 예뻐서 조금 걷다가 멈춰 서서 바라보고 또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어제도 느꼈듯이 이 마을은, 가보지는 않았지만 저 멀리 노르웨이에 있을 것 같은 아주 작은 어촌마을을 떠올리게 했는데 이곳에서 보는 일출과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마을을 벗어나는데만 한참 걸렸다.


오늘은 오르막, 내리막길이 많았지만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았고 중간에 카페에서 한 번 쉬고 그 이후로는 쉬지 않고 쭉 걸었다.

걷다 보니 탁 트인 바다가 나왔는데 어제 보던 바다와는 분위기도, 그 바다를 보며 느껴지는 내 마음도 달랐다. 넓게 펼쳐진 바다는 너무 예뻤고 그 주변을 산책하고 있거나 쉬고 있는 사람들,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를 보며 걸으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걸은 지 얼마 안 됐지만 드디어 피스테라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을 향해 걸어갈 때는 주변 풍경이 너무 예쁘고 좋았는데 막상 마을에 도착하고 나서는, 세상의 끝이라고 불렸던 곳이라고 해서 잔뜩 기대를 했었는데 내 기대가 너무 컸는지 상상했던 모습과는 달라서 살짝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좀 더 기대했던 곳은 0km라고 적혀 있는 비석이 있는 곳이었기에, 피스테라 마을에 도착 후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곳까지 3km 정도 더 걸어갔다. 10km가 넘는 거리도 힘들지 않게 잘 걸어왔는데 이상하게 마지막 이 3km 구간이 더 힘들었다.

마침내 도착했고 0km라고 적혀 있는 비석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드디어 여기 도착했구나' 싶으면서도 이게 뭐길래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나 싶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교차하면서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이곳의 지금 분위기와 내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사진도 찍었다.

사진을 찍고 나서도 떠나기가 아쉬워서 그 자리에 있었는데 여기서 머문 지 30분도 안 됐는데 갑자기 햇빛은 사라지고 먹구름이 가득 뒤덮였다. 비는 안 왔지만 순식간에 이렇게 변하는 모습에 너무 당황스러웠는데 그래도 날씨가 안 좋아지기 전에 이곳을 충분히 즐겨서 다행이었다.


점심을 먹으려고 마을로 내려가면서 맛집을 찾아봤는데 구글지도에 영업 중이라고 되어 있어도 막상 가보면 대부분 닫혀 있었다. 아마도 비수기라 그랬던 것 같은데 몇 군데 더 찾아봤지만 다 문이 닫혀 있어서, 맛집을 생각하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문이 열려있는 곳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빠에야를 먹었는데 다행히 맛있었다.


알베르게로 가서 산티아고에서 피스테라까지 왔다는 인증서를 받았다. 이게 뭐라고, 그냥 종이일 뿐인데 지나온 여정들이 생각나면서 괜히 뿌듯했고 한동안 그 종이를 바라봤다.

짐 정리하고 씻고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점심때 가려고 했었는데 문이 닫혀 있던 레스토랑에 한 번 더 가봤는데 다행히 문이 열려 있었고 오늘의 메뉴를 시켜서 애피타이저, 메인 요리, 디저트 이렇게 코스로 먹었는데 메인 요리는 그저 그랬지만 애피타이저로 나왔던 까르보나라 파스타와 디저트가 너무 맛있었다.

저녁을 다 먹고 알베르게로 들어가기 전 마트에 잠깐 들렀다 들어갔는데 9시가 안 된 시간이었는데도 알베르게는 벌써 불이 다 꺼져있어서 조심스럽게 들어갔고 나도 일찍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오늘은 평소보다 짧게 걸었는데도 어제 잠을 못 자서였는지 아니면 피로 누적이었는지 너무 피곤했다.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저녁 먹으러 나가기 전까지 비가 약하게 내리긴 했지만 마을 구경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평소 같았으면 당장 구경하러 나갔을 텐데 내가 생각했던 마을 분위기가 아니어서 그리고 몸이 피곤해서 구경을 하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동안은 마을 구경을 하고 싶어도 날씨 때문에 나가지 못했던 건데 오늘은 내 마음이 원하지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고 이런 마음이 들었다는 게 놀라우면서도 아쉬웠다.


내일이면 이 길이 끝나는 날인데 산티아고 도착을 앞둔 그날과는 느껴지는 마음이 다르다. 산티아고 도착을 앞두고 있었을 때는 산티아고에 도착은 하지만 또 걷기로 했으니 완전히 끝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지금은, 몇 년 동안 버킷리스트로 꿈꿔왔고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 떠난 이 길의 끝을 하루 앞두고 있으니 그때 느꼈던 마음보다 더 크게 다가오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이상하고 복잡하다.

내일 도착하는 묵시아는 일몰이 예쁘다고 하던데 꼭 날씨가 좋아서 일몰을 볼 수 있길 바라며 내일도 무사히 잘 걷고 편안하게, 조용히 잘 마무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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