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km, 8시간 걷기
드디어 순례길 첫날.
원래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잘 못 자는 편인데 설렘 반, 긴장 반으로 잠을 설쳐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새벽 6시, 길을 나섰다.
첫날이라 그런 건지, 멀리 가야 해서 그런 건지 일찍 출발하는 순례자들이 있었는데 더 자고 싶어도 어차피 잠은 못 잘 것 같았고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일찍 출발했다.
이 길을 걷고 싶어서 왔지만 어두울 때 걷는 건 무서워서 혼자 못 걸을 것 같았는데 다행히 어제저녁을 함께 먹은 동행 중 한 명과 시작을 함께 할 수 있었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길을 동행과 걸으며 많은 얘기를 나눴다.
어제 처음 본 사이였는데도, 내향적인 성향이 80프로가 넘어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일이 거의 없고 힘든 일임에도 불구하고 만난 지 이틀 만에 이렇게 많은 대화를 할 수 있다니.
이 길은 첫 시작부터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해 주었다.
그렇게 동행과 얘기를 나누며 어두울 때 출발해서 해가 뜰 때까지의 풍경을 지켜봤는데 너무 이뻤다.
내 인생에서, 이곳에서 이런 광경을 보게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인데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게 느껴지면서 '내가 드디어 이 길 위에 서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발하고 두 시간쯤 걷다 보니 카페가 보였고 쉬면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쉬다 보니 어제 같이 저녁 먹은 다른 동행도 합류하게 되었고 같이 아침 먹고 얘기 나누며 휴식을 취하다가 이제부터는 혼자 걷고 싶어서 먼저 출발했는데 여기서부터 고난이 시작되었다.
첫날이라 컨디션 조절이 필요하고 무리하지 말자고 생각해서 배낭은 도착지까지 배달해 주는 업체에 맡겨두고 필요한 짐만 가지고 가볍게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늘 하나 없는 땡볕에서 오르막, 평지를 반복하며 걷다 보니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었지만 좋은 날씨와 풍경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고 그저 ‘언제쯤 도착할까, 발바닥이 너무 아프다’이런 생각들만 하며 걸어 나갔다.
발가락에 땀이 차고 발바닥도 아파졌는데 쉬려고 하니 그늘 하나 보이지 않고 쉴 곳도 마땅치 않아서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걷다가 겨우 그늘을 발견해 양말을 벗고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쉬면서 이렇게 걷는 게 맞는 건지, 시작부터 힘든데 과연 내가 끝까지 잘 걸을 수 있을까 등 온통 부정적인 생각들만 떠올랐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길을 나섰고 이제 거의 다 와가지 않을까 생각하며 걷다가 발견한 표지판에서 2시간 30분을 더 가야 된다고 알려주는데 눈에 보이는 건 오르막길.
지금도 힘든데 오르막을 올라가야 된다고 생각하니 힘이 다 빠지고 너무너무 절망스러웠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또 계속 걷다 보니 마지막 갈림길이 나왔는데 미리 알아본 바로는 왼쪽으로 가는 길은 가팔라서 위험하다고 했고 오른쪽은 완만한 길이라고 해서 오른쪽으로 가고 싶었는데 아무도 오른쪽으로 가지 않길래 오른쪽으로 가도 되는 건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 어제 알바르게에서 만났던 외국인 동행자를 만나 같이 오른쪽 길로 걸어갔다.
좀 더 돌아가는 느낌이라 힘들게 느껴지긴 했는데 이제 시작인 여정에서 내 무릎 보호를 위해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며 오늘의 마지막을 향해 걸었다.
둘 다 너무 힘들어서 어쩌다 보니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걷게 되었고 이정표가 없어서 중간에 헤맸지만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출발한 지 8시간 만에 도착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너무 기뻐서 그제야 얘기를 나누며 걸어갔고 그렇게 오늘의 알베르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너무 힘들고 발바닥도 아파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도, 할 수도 없어서 겨우 씻고 빨래하고 쉬고 있는데 오늘의 힘듦보다 당장 내일의 여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일부터는 10kg 정도 되는 배낭을 메고 걸어야 하는데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걱정만 앞섰다.
그렇게 걱정하고 있던 찰나, 어쩌다 보니 어제 함께 저녁 먹은 동행 중 몇 명과 자리가 가깝게 배정되어서 서로 오늘 어땠는지, 앞으로 잘 걸을 수 있을지 얘기하다 보니 잠시나마 힘들었던 기억과 내일의 걱정은 사라졌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첫날이어서 그런 건지, 오래 걸어서 그런 건지 생각보다 더 힘들었지만 그래도 무사히 도착했음에 감사하며 내일은 어떨지 기대가 되면서도 사라진 줄 알았던 걱정스러운 마음 때문에 쉽게 잠들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