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km, 5시간 걷기
자다 깨다 반복하며 뒤척이다가 어차피 더 이상은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새벽에 일어나 아침도 먹고 여유롭게 준비했다.
어제 걷다 보니 배낭의 무게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버릴 만한 물건이 도대체 뭐가 있을까 한참을 생각하다가 숙소에서 편하게 입으려고 가져온 원피스와 그나마 덜 사용할 것 같은 멀티탭을 버리기 했다.
이 두 개만 버린다고 해서 배낭의 무게는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무게를 줄이고 싶었는데 걷다 보니 역시나 큰 차이는 느껴지지 않았고 나중엔 멀티탭이 필요한 상황들이 생겨나서 버린 걸 후회했다.
오늘은 걸은 지 3일 만에, 대도시 입성과 동시에 너무나 그리웠던 한식은 아니지만 중식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렌 상태로 출발했다.
해가 뜨지 않아 깜깜해서 랜턴으로 길을 비추며 가고 있는 도중 우연히 한국 분을 만났고 어쩌다 보니 같이 걷게 되었다.
원래 나는 굉장히 내성적인 성격이라서 처음 보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불편해하는데도 이상하게 이 길을 걷는 동안은 내가 오히려 먼저 인사를 하거나 말을 걸기도 하고 처음 보는 사람과도 전혀 불편한 마음 없이,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이런 내 모습이 참 신기했다. 오늘도 이 길은 나의 또 다른 면을 보게 해 주었다.
그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해가 점점 떠오르며 밝아졌고 하늘은 핑크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너무 이뻐서 잠시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었는데 ‘이렇게 이쁜 하늘을 한국에서는 본 적이 있었나, 한국에서도 이런 하늘을 볼 수 있었겠지만 하늘을 볼 여유나 관심이 없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그 순간을 눈으로 담고 한참을 바라봤다.
이쁜 하늘을 바라보며 행복했던 것과는 별개로 걸은 지 1시간이 넘어가니 어깨가 아파 오기 시작했지만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지금 쉬면 더 힘들어질 것 같아서 쉴 수 있는 카페가 나올 때까지 쉬지 않고 걸어 나갔다.
어깨는 계속 아파 왔고 발바닥도 조금씩 아프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2시간 넘게 걷다 보니 드디어 카페가 보이기 시작했다. 너무 기뻐서 얼른 카페로 들어가 신선한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쉬고 있으니 동행 중 몇 명이 도착했고 잠시 얘기 나누다가 나는 먼저 출발했다. 원래는 같이 걸어오던 한국분과 카페까지만 같이 쉬고 그 이후로는 따로 걷기로 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오늘의 도착지까지 계속 같이 걷게 되었다.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빛과 내 배낭의 무게 때문에 쉬고 걸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힘들어졌다.
몸은 너무 힘들었지만 걸으며 바라보는 풍경들은 너무 이뻤는데 힘들어서 잠시 쉬며 멈추기도 했지만 스페인의 어느 마을,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이쁜 풍경들을 눈으로 보고 담고 싶어서 잠시 멈추기도 했다.
오늘은 대도시에 입성하는 날이어서 4km 정도를 남겨 뒀을 때쯤에는 분명 이전에 보이던 자연적인 풍경과는 다르게 사람들도 좀 더 보이고 건물도 많아지거나 높아지는 등 보이는 모습이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목적지는 보이지 않았는데 다 온 거 같은데 아직은 아니라는 사실에 더 힘이 빠지고 힘들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오늘의 목적지, 앞서 걸어왔던 3~4시간 보다 마지막 1시간이 제일 힘들었다.
그렇게 겨우 오늘의 숙소에 도착했고 같이 걸어온 한국 분과는 숙소가 달라서 헤어지게 되었는데 힘들었지만 덕분에 오늘도 무사히 걸을 수 있어서 너무 감사했다.
숙소에 도착했는데 아직 오픈 전이라, 오는 길에 연락을 주고받던 동행이 알려준 바(Bar)를 찾아가서 이곳에서 유명하다던 음식과 함께 맥주 생각이 나서 또 맥주를 마셨다.
맥주는 오늘도 너무 맛있었고 이 맛에 다들 맥주를 마시는구나 싶었다.
맛있는 거 먹고 기분이 좋아졌고 숙소에 가서 짐 풀고 씻고 빨래하고 있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여서 누군지 봤더니 어제 걷던 도중 너무 힘들어 쉬어가던 바(Bar)에서 맥주 마실 때 같은 테이블에 앉아 얘기 나누던 한국인 부부였다. 이렇게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반가웠는데 같은 숙소여서 더 반가웠다.
워낙 정이 많으신 분들이라 이것저것 챙겨주려고 하셨는데 그분들에게도 몇 개 없는, 소중한 한식을 주셔서 죄송스러우면서도 너무 감사했다. 같이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는데 오늘도 힘들었지만 그분들의 따스한 마음이 느껴져서, 그리웠던 한식을 먹어서 너무 행복했다.
대도시에 왔으니 도시 구경은 해야겠다 싶어서 나가서 한 바퀴 돌았는데 전체적인 분위기, 사람들, 건물, 풍경들을 보고 있자니 새삼 신기했다.
‘내가 진짜 스페인에 왔구나, 이 길을 걷고 있구나’ 싶었다.
이 길을 걷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이곳에 올 일은 없었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지금 이 풍경이나 분위기 하나하나가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정처 없이 구경하며 돌아다니다가 중국 슈퍼에서 언젠가 라면이 너무 먹고 싶을 때 먹으려고 비상용으로 몇 개 샀는데 지금 라면을 먹는 것도 아닌데, 사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졌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순간이었다.
저녁에는 동행들과 여러 한국 분들과 같이 중식당에 가서 함께 밥을 먹었다.
꽤 많은 한국인들이 모였는데 걸으며 뵌 분들도 있고 아닌 분들도 있었지만 다 같이 모여서 밥 먹고 얘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한국 떠나온 지 며칠 됐다고 벌써 쌀이 그립고 한식이 그리웠는데 점심에는 한식을 먹고 저녁은 한식과 비슷한 아시안 음식을 먹어서 오랜만에 제대로 된 저녁을 먹은 것 같았고 너무 맛있게 배불리 먹어서 이 한 끼로 며칠은 거뜬하게 걸을 수 있는, 에너지가 충전된 것 같았다.
원래 순례길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계획했을 때, 이 도시에서 하루 쉬어가야 하나 고민했었다.
대도시여서 쉬어가면서 좀 더 구경해도 좋을 것 같았고 한 번도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걸어본 적이 없어서 몸에 무리가 올 것 같았는데 특히 원래 무릎이 좋지 않았기에, 무릎 상태가 걱정되어서 초반에 쉬었다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걸으면서도, 저녁을 먹으면서 까지도 계속 고민했었는데 쉬지 않고 더 걷기로 결정을 내렸다.
지금 여기서 쉬기엔 너무 이른 것 같았고 무엇보다 동행들이 좋아서 계속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지금까지 동행들과 쭉 같이 걸어온 건 아니지만 같이 출발하거나 혹은 각자 걷다 보면 길 위에서 만나게 되고 그러면 같이 걷다가 또 각자 걷기를 반복했지만 도착지는 같아서 같은 숙소에 묵거나 숙소가 다르더라도 만나서 같이 밥을 먹으며 얘기 나누는 게, 오늘의 하루를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나와 함께 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큰 힘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보다는 나은 오늘이었지만 여전히 내 가방은 너무 무겁고 발바닥도, 어깨도 너무 아픈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 더 이상 버릴 물건은 없는데 언제쯤 이 배낭이 적응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