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재오 Mar 17. 2020

박사학위까지 14년, 철학자의 삶을 선택한 이유

내가 철학을 전공으로 한 이유는 바로 '행복' 때문입니다

제가 철학으로 박사 학위까지 한 동기는 어릴 적의 경험 때문입니다.


저는 6살 때 아버지를 잃고 과부이신 어머님의 슬하에서 살았고 그래서 무척 외로웠습니다. 저희 집은 어머니가 술집을 운영했는데 손님들이 늘 북적거려 저는 조용한 시간을 찾기도 어려웠습니다. 어머니는 늘 힘들고 바빠서 저에게 잔정을 베풀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 대신 제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 사주셨습니다.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는 자신의 삶이 매일 너무 힘들어 두 아들을 곱살스럽게 돌보기는 거의 불가능했고, 따라서 나와 내 동생은 주로 가게에서 일하는 누나들이나 이모할머니(당시는 식모라고 불리었음)가 키워주셨습니다.      


특히 제가 힘든 것은 명절 때였습니다.
명절 차례상

 추석 같은 명절에도 술집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어머니와 함께 동업하시던 외삼촌은 가게 문을 닫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명절에 우리 형제는 더 외로웠습니다. 방학 때 어머니는 어린 저를 항상 고향으로 보냈습니다. 경주가 제 고향입니다. 구정 때면 고속 터미널에는 선물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든 부모님의 손을 잡고 고향으로 가는 아이들과 달리 저는 어린 나이에 혼자서 외갓집으로 가곤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남편이 없어서 시에 가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그 대신 저를 항상 방학 때나 명절에 본가와 외가를 방문하게 했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가문의 종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어린 저의 서러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에서 우연히 “행복”이란 말을 배웠습니다.


저는 '행복이 과연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친구의 집을 가보니 그 집은 행복이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모여 먹고 마시며 웃는 모습을 보고 “아! 행복이 책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왜 세상에는 도대체 행복과 불행이 있는가?'라는 생각과 동시에 모두 저처럼 불행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훗날 철학의 동일(Identity)과 차이(difference)라는 중요한 개념을 미리 느낀 것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언어와 사물의 관계 등의 관념도 이때 싹이 텄습니다.


이런 삶의 문제의식과 고민이 저로 하여금
철학 추구의 긴 여정을 인도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즉, 말(기호)에 해당하는 사실(지시체)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제 장래 희망도 바뀌어져 갔습니다. 원래 전 과학자가 꿈이었습니다. 초등학생 때는 방과 후 집에서 항상 무엇을 만들고 실험하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예를 들어, 주로 키트를 가지고 납땜질하여 라디오로 조립하였습니다. 당시 “전파 과학”이란 전문 잡지도 사서 보았습니다. 광석 라디오로부터 트랜지스터 4개 있는 라디오까지 만들어 보았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와서 곧장 납땜질에 열중하는 저를 보고 이모할머니는 “야야! 국 식는다, 밥 먹고 해라.” 하던 기억이 납니다.


과학자를 꿈꾸는 어린이

 어머니는 당시 사업을 하셨기 때문에 형편이 여유로웠고, 제가 하고 싶어 한 것은 모두 사주셨습니다. 그다음은 알코올램프로 시험관에 넣은 목탄을 가열하여 발생하는 목탄 가스에 불을 붙여보는 실험 등 여러 가지 화학 실험도 했습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는 6.25 전쟁 참전용사로서 공병 대위로 제대를 했습니다. 아버지의 피를 물려 받이서인지 저도 무언가 만들고 수리하는데 취미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광에 소규모의 다이너마이트 같은 하여간 폭발하는 장치를 숨겨 두셨는데 제가 그것을 발견하여 고리까지 잡아당기다가 갑자기 무서워져서 집에서 그 상자를 가지고 나와 부산 자갈치 시장 앞바다에 폭발물 1박스를 풍덩 던진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런 과학적, 공학적 취미는 점차 문학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이유는 불행과 외로움이었습니다.


 어머니도 공부를 잘하셔서 일제 시대 경주에서 수재로 날리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장사하고 쉬는 때에는 독서를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 어머니와 저는 “황순원 전집” 같은 것을 같이 보곤 했습니다. 저의 취미는 점점 문학, 심리학, 철학 등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교 때 영문학을 전공하려고 계획했으나 서울대 인문학부에 떨어진 후 한국 외국어 대학에 가서 영어를 전공했습니다. 외대에는 타(他) 대학처럼 영문과가 없고 대신 영어과가 있었습니다. 외대 영어과 시절 고(故) 이영걸 교수님이 영시(英詩)를 가르쳤습니다. 저는 다른 것은 물라도 영시(英詩)와 영소설 등은 A학점을 받곤 했습니다.

 

 대학시절 저는 친구를 많이 찾았습니다. 우리 하숙집은 같이 술 마신 친구들이 와서 자고 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친했던 친구들도 하나, 둘씩 각각 제 갈길로 가고 저도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군에 갔습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초상

복학한 뒤 제가 든 생각은 영문학에 대한 회의(懷疑)였습니다. 영문학이 싫진 않았지만 영문학의 시스템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셰익스피어 하나만 해도 거대한 하나의 섬과 같고 그밖에 티 에스 엘리엇(T. S. Eliot) 등 영문학은 위대한 작가들이 이루고 있는 은하수와 같습니다. 그런데 학문의 체계성과 전체성을 구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저는 학문의 전체성 혹은 체계성을 원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철학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철학에는 학문의 총체성과 체계성 유기적인 구조성 등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외대에서 영문학을 전공으로 부전공으로 서양철학을 했습니다. 그때 철학의 은사님이신 손봉호 교수님, 강성위 교수님 그리고 장욱 교수님, 이기상 교수님 등이 계셨습니다. 지금은 모두 은퇴하셨고, 그중 하이데거 철학을 하시는 이기상 명예교수님은 지금 저의 페이스북 친구입니다.

바움(M.Baum) 교수와 뒤징(K.Duesing) 교수

독일 유학을 가서 쾰른 대학의 뒤징(K.Duesing) 교수님과 마지막으로 학위를 도와주신 부퍼탈 대학교의 바움(M.Baum)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두 분 다 헤겔 철학 및 독일 관념론 철학의 대가들이십니다.

                 

 여기서 빠뜨린 부분이 있습니다. 철학을 하는 가운데 저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는 제가 서울대 대학원을 마친 뒤 어느 신학교에서 철학개론을 강의하던 것이 그 계기입니다. 그때 제자였던 신학생들의 기도와 간청 때문에 저는 기독교에 귀의했고, 그 후 저의 철학적 재능은 더욱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생계를 위해 주로 영어를 가르치고 있지만, 늘 철학을 향한 영원한 열정을 품고 살고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