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 - <에밀> 中 “사보이 신부의 신앙 고백”이 가지는 철학적인 의미
'사보이 신부의 신앙 고백'은
칸트의 선험 철학(Transcendental Philosophy)의 기반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자, 사상가 루소는 철학자이자 정치 이론가, 작가이며 또 음악가였다. 그의 논문들과 소설은 프랑스혁명의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성주의, 계몽주의에서 낭만주의 세대를 선구적으로 이끈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장 자끄 루소는 1712년 6월 28일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태어났고, 1778년 7월 2일 프랑스의 에름농빌(Ermenonville)에서 죽었다.
루소는 제네바에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아버지의 양육을 받았으나, 아버지도 투옥의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도망가는 바람에 외가 쪽으로 옮겨져 삼촌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후 그는 사보이 공국으로 유랑하여 와랑 남작부인(Françoise-Louise de Warens)이라는 후견인을 만났다. 그녀는 16세의 루소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집사로 고용했다. 또한 그녀는 학교 근처에도 못 간 불쌍한 숙련공이었던 루소에게 철학가이자 음악가로 그리고 작가로 발전을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에밀>은 자연주의 교육을 강조한다. 책에는 '에밀'이라는 한 동명의 아이의 성장과정을 묘사하면서 성장과정의 각 단계별로 어떤 교육을 시켜야 하는지를 서술한다. 즉, 태어날 때는 선한 성격을 타고 나는 인간이 사회에 적응하면서 점차 나빠지고 병들게 된다는 것이 루소의 인간 이해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이대로 현재의 교육을 방치하면 더욱 인간이나 사회가 퇴보하기 때문에 이를 막고 좀 더 나은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루소가 이 책을 집필한 것이다. 루소는 이처럼 당대의 인위적 교육을 비판하고 인간의 본성(자연)에 맞는 교육을 세우고자 한 교육 개혁가였다. 이는 또한 그의 사회철학, 정치철학을 대표하는 “사회계약론”의 사상과도 일치한다.
루소는 "인간은 모두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사슬에 매여 있다."라고 했으며,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촉구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무리이므로, 사회 계약을 맺어서 타고한 자유를 사회에 양도하고 그 대신 법적인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된다.
에밀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
신은 모든 것을 좋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람은 모든 것에 간섭하여 모든 것들은 악하게 된다. (…)
하나님은 만물을 선하게 하시고, 사람은 만물에 참견하면 그것을 악하게 만든다. 그는 한 토양이 다른 토양의 산물을 생산하도록 강요하고, 한 나무가 다른 나무의 열매를 맺도록 강요한다. 그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자연조건을 혼동한다. 그는 그의 개, 말, 그리고 그의 노예를 불구로 만든다. 그는 만물을 파괴하고 추하게 만든다. 그는 모든 변형되고 괴물스러운 것을 사랑한다.
He destroys and defaces all things;
he loves all that is deformed and monstrous;
이런 루소의 자연 우선주의 사상은 인간들이 지나치게 자연을 왜곡하고 남용하는 현대의 인간 사회를 비난하고 있다. 루소의 말을 문자 그래도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인간은 그들의 탐욕을 위해서 동물이나 식물을 남용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현대는 인간 복제를 비롯하여 온갖 DNA 정보 조작 내지 간섭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자연을 고문하여 필요한 것들을 뽑아내고 있다. 오늘날처럼 자연과 인공의 경계가 사라진 시절이 없었다. 또 개나 애완동물의 경우도 인간들은 그들의 필요와 탐욕으로 인해서 동물의 본성을 억압하고 인위적인 장치를 덮어 씌우고 있다.
“사람들은 자연적인 것보다는 인위적으로 변형된 것 비뚫어진 것을 더 좋아한다” 라는 루소의 말이 새삼 심금에 와닿는다. 요즘 '나 혼자 산다', '혼밥' 등이 유행하면서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엄청 많아졌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들은 사실 가족 형성을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이를 생산하고 양육하는 것이 조물주가 인간에게 부여한 큰 즐거움인데 인간관계가 어려워지고, 또 우리나라의 경우 '헬조선'의 출현으로 결혼이 힘들어지니 아기 대신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다. 독일에서는 그런 애완동물들을 대체 아이(Stattkinder)라고 한다. 개를 실내에서 키우는 경우 주인이 아파트를 떠나면 개들은 긴 시간 홀로 지내게 된다. 그들은 하루 종일 주인 오기만을 기다린다. 인간이 좋아서 개를 키우지만 과연 그런 개들은 행복할까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동물들을 인간으로 여기고 정을 붙이고 사랑을 나누려는 추세는 점점 심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 교육이 없다면 상황은 더 나빠질 것이고, 인류는 어중간하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현재의 조건하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교육 없이)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은 나머지 사람들보다 더 괴물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태초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약육강식하는 동물들의 세계나 혹은 “아담과 하와” 같은 태초의 인간이 되어 낙원(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어릴 때의 불우한 환경 탓으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은 범죄와 죄악의 소굴에 빠지기 쉽다.
편견, 권위, 필요성, 사례 등 우리가 그 속에 빠져 있는 모든 사회적 조건들이 그의 본성(자연)을 억누르고 그녀(자연)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인간 사회의 부정적인 면들은 편견, 권위 등이고 우리는 그런 조건 곳에 빠져서 더 이상 자연을 볼 수가 없다. 여기서 자연(Nature)은 본성과 같은 말이다. 루소의 교육 철학은 이처럼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편견이나 사회적인 습관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인간의 본성과 또 사회성을 조화시키는데 교육의 목적을 두고 있다.
루소의 <에밀> 중에 있는 “사보이 신부의 신앙 고백”이란 장은 책에서도 특별한 부분이다.
이 글은 주인공이 사보이의 신부를 만나서 그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어린 주인공은 원래 개신교도인데 -루소 자신이 제네바에서 개신교도였다- 죄를 짓고 쫓기는 신세가 되어 이탈리아로 도망을 간다. 어린 도망자는 살기 위하여 천주교도로 개종을 한다. 그러다가 그는 무슨 산속에 사는 사보이 보좌신부(vicar)를 만나서 거기서 안식처를 구하고, 신부에게서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신분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게 된다.
여기는 교육 문제가 아니라 종교와 철학 문제가 다루어진다. 종교에 대한 루소의 비정통적인 견해 때문에 <에밀>은 출판되자마자 금서(禁書)로 지정이 되고 급기야는 불태워졌다고 한다.
그 이유는 루소가 정통적인 크리스트교의 교리(dogmas of the church)를 부정하고 자연 종교를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자연 종교(nature religion)란 성경이나 신학에 바탕을 두는 종교가 아니라 종교적 감정을 믿음의 기초로 두는 것을 말한다. 참고로 쉴라이어마허(Schleiermacher)라는 독일의 신학자는 종교란 “절대 의존 감정이다”라고 정의했다.
최고의 존재는 고정되고 불면적인 자연의 질서 속에서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낸다.
The Supreme Being is best displayed by the fixed and unalterable order of nature.
그런 과정에서 루소는 성경의 계시성(The Revelation)에 대해서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계시란 신 자신이 스스로 자기를 알려주었다는 뜻으로 크리스트교 최고의 진리에 속한다. 즉, 인간은 스스로 신을 알 수 없고 신 자신이 인간에게 계시해야 인간은 겨우 그를 신으로 모시고 살 수 있다. 이런 이야기는 특히 구약 성경에 많이 나온다.
가령 성경 출애굽기 3장을 보면, 떨기나무가 불타지 않은 기이한 장면을 목도한 모세를 부르는 야훼 하나님의 장면이 나온다. 또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기 이름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3장 14절)
계시 종교란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말과 이야기들은 사람이 신에 대해 쓴 신화나 전설이 아니라 신(神) (=성령, Holy Spirit)의 감동을 받아서 성경의 기록자들이 기록한 것이라는 말이다. 성경 군데군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라는 표현이 나온다.
예를 들어 이사야서 1장 18절은 다음과 같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이사야서 1장 18절)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 이후로 이와 같은 신 자신의 자기표현이라는 계시성(The Revelation, Die Offenbarung)을 의심했다.
특히 성경에 자주 나오는 각종 이적과 기사에 대해서 계몽주의자들은 이를 과학과 대치되는 것으로 불신했다. 그들은 가령 예수가 동정녀의 자식이라든지 물 위를 걸어갔다든지 혹은 물을 변화시켜 포도주로 만들었다 등을 의심했다. 루소 역시 이와 같다.
신의 명령으로 해가 뒤로 움직이고 하고 산이 사라지고 물결이 잠잠해지는 등의 기적을 믿지 않는다. - <에밀>
그는 성경 여러 군데 나타나 있는 기적(miracles)을 불신한다. 이는 계몽주의 시기의 일반적 특징이기도 하다.
루소는 또한 이스라엘의 선민(選民) 사상도 불신한다. 이는 인간 평등사상에 위배된다는 그런 이성적이 생각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또 신이 전쟁을 일으키고 분노, 질투한다는 그런 성경의 표현도 루소는 잘못으로 보았다. “전쟁은 여호와에게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7)” 등에서 나타난 전쟁의 신 개념을 계몽주의자들은 싫어했다.
즉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태 5장 2절) 이들은 예수의 일화 중에서 도덕적인 면만 존중하고 나머지 초자연적인 면은 무시했다. 즉 이들은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크리스트교와 성경을 이해하려고 했다.
이런 이유에서 루소의 <에밀>은 판금 되고 불태워진 것이다.
또 재미있는 한 가지는 루소는 천주교로 개종하기는 했지만 천주교의 의식주의를 많이 비판하고 있다. 파리에서 <에밀>이 불탄 것은 당시 프랑스의 경건주의 천주교 일파인 장세니스트들이 <에밀>을 비판한 것이 크다.
그러나 필자의 견지에서는 이런 종교적인 부분보다도 철학에 관한 부분이 훨씬 독창적이라고 본다.
특히나 루소의 비전문적이고도 솔직한 표현은 심오한 철학적인 함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루소의 사상이 독일에 전파되어 엄청난 반향을 낳았고 임마뉴엘 칸트의 비판철학 혹은 소위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Kopernikanische Wende, Copernican Revolution)를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필자의 독자적인 주장으로서 아직 학계에서 인정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