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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오 May 19. 2020

 루소와 데카르트

데카르트의 "에고 코기토" 원리에대한   루소의 변형

루소의 <에밀> 중 '사보이 신부의 신앙 고백'에 나타난 루소의 철학  


지난 글에서 우리는 <에밀> 전체와 그중 '사보이 신부의 신앙 고백'이 가지는 의미, ①에밀 전체의 자연주의 교육관 ②'신앙 고백' 장에 나오는  자연주의 종교를 알아보았다.      


① 자연주의 교육은 인간에게 가해지는 인습과 사회적인 폐단을 줄이고 건강하고 자발적인 인간 교육을 하자는 주장이고, 또 종래까지 무시되었던 인간의 감정을 고양한 공로가 크다. 더불어 사물 교육, 감각교육, 기술교육, 관찰 교육 등 획기적인 요소가 많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라고 하는 루소의 교육 철학은
근대 교육학의 태동을 알리는 역작이다.


②자연주의 종교는 신을 믿기는 하되 성경 그대로 맹신하지 말고 또 교리적 독단을 비판하고 이성의 한계 내에서 믿음 생활을 하자는 취지였다.<칸트 :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 참조>

그러나 루소의 독창적인 부분은 종교적인 부분보다 철학적인 부분에 더 있다. 왜냐하면 종교 부분은 거의 다 계몽주의적인 관점과 일치된다.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와 에고 코기토의 원리 (the principle of ego cogito)


사보인 신부의 신앙고백에서 루소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출발점으로 하여 자신의 사상적인 토대를 쌓기 시작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데카르트부터 시작되는 근대 철학을 약간 살펴보아야 한다. 데카르트는 종래의 철학과 상식에 대해서 의심을 해보았다. 하다 못해 우주나 주변의 인간에 대해서도 과연 그들이 그렇게 존재하는가 의심을 했다. 이를 “방법론적 회의”라고 한다. 그 목적은 절대로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기 위함이다.


그런데 불변적인 것을 찾던 데카르트는
자기 생각 속에서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는다.      

“내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의심하면 할수록 더욱 확실한 것은 내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의심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외계로부터 지각하는 모든 것이 착각일 수도 있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허위일 수도 있으나, 이 모든 회의를 통해서도 끝내 나는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나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의심할수록 더 확실해지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의심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 배운 온갖 지식이나 현재의 세계나 가족 같은 소중한 존재들을 다 의심할 수 있어도 그 의심을 하는 나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데카르트의 자아는 불교의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즉, 하늘과 땅 위에 나만 홀로 존재한다 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또 예수는 한 사람의 목숨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했다.(마태 16:26)

데카르트의 자아 즉 “생각하는 자아”를 더 설명하자면 모든 연구와 노력의 주체는 “나”라는 것이다. 하여간 인간은 항상 자기중심적이고 또 세계와도 바꿀 수 없는 존엄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인간은 나약하고 무가치하고 악(惡)할 수 있다. 연구와 인식의 측면에서 인간 특히 생각하는 자아는 우주와 맞먹는 가치가 있다.


이와 같이 데카르트는 철저한 의심을 바탕으로 하여 이 유명한 명제를 으뜸가는 부동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서양 철학사(하)권 p.58 슈퇴릭히 지음, 임석진 번역)


나는 생각한다, 고(故)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Je pense, donc je suis.
I think, therefore I am.
Ich denke also bin Ich.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어도 사유하는 나 자신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 이게 근세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의 자랑이다.


데카르트와 그 후에 이어지는 계몽주의(Enlightenment) 그리고 영국의 경험론자들에 의해서 종래의 신학과 철학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기초를 둔 중세의 철학, 스콜라 철학의 붕괴를 말한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 르네 데카르트(1596-1650)


사실 중세의 철학은 존재의 철학으로서 <실존과 본질>, <형상과 질료>, <가능태와 현실태>라는 범주를 통해서 신으로부터 자연과 우주 그리고 인간의 본질에 대한 광대하고 세밀한 시스템을 말한다. 그리고 근세 철학가들이 종래의 형이상학을 비판하긴 했으나 결국은 중세 스콜라 철학의 개념들을 빌려 겨우 그들의 사상 체계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데카르트와 계몽주의 등에 의해서 중세의 철학이 불신을 당했다. 존재의 철학이 의문시되었다. 그러나 이는 실은 오해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어쨌든 데카르트와 더불어 시작한 근대 철학은 나 또는 자아(ego)의 확실성을 토대로 한다. 세상 무슨 진리보다도 나의 의식이 더 확실하다는 것이다. 내가 지식과 진리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이게 근대정신이다.      


루소에 의한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 종합


칸트의 비판철학의 토대를 이미 루소가 건축한다.

루소는 데카르트의 의심 혹은 “방법론적 회의”라는 방법을 다시 의심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오랫동안 의심을 하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동기나 마음 등은 의심을 오래 할 수도 있지만 데카르트처럼 모든 것을 오래 의심할 수는 없다는 심리적인 사실을 지적한다. 이때 의심이란 믿지도 안 믿지도 않는 상태를 말한다. 사람은 이런 상태를 오래 지속할 수 없다. 그래서 루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Such philosophers either do not exist, or they are certainly the most miserable of men. To be in doubt, about things which it is important for us to know, is a situation too perplexing for the human mind;

그런(데카르트와 같은) 철학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그들은 가장 비참한 사람들이다. 의심 속에 있는 것은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에 아주 난처한 것이다.


이처럼 루소는 근대철학의 원리로써의 의심 혹은 회의주의(Skepticism)를 비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데카르트의 자아 주의 혹은 주관주의 원칙은 수용을 한다. 즉, 생각하는 나(Ich)가 가장 확실하다는 것이다.


In the first place, I know that I exist,
and have senses whereby I am affected.
This is a truth so striking that I am compelled to acquiesce in it.

무엇보다 앞서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또 내가 영향을 받는 그 감각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해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원리는 다르게 표현하면 “나는 나다”라고도 한다.

 cogito ergo sum = Ich bin Ich = 자기의식


생각하는 자아, 불변적인 의식이 자아와 다른 어떤 것 즉 감각에 이해서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게 루소의 영원한 철학적 업적이다. 이 때문에 후일의 칸트가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종합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된 것이다.


여기서 루소는 데카르트를 인정하면서도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즉 “나는 나다” (Ich bin Ich)라는 자기의식(Selbstbewußtsein, Self-consciousness)을 제1의 원리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감각(sense) 역시 그와 못지않게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데카르트와 다른 점이다. 감각과 외계의 사물을 믿을 수 없다고 한 데카르트와 달리 루소는 감각과 감각을 통해서 들어오는 외부 사물들 역시 분명하다고 하는 것이다. 나의 존재와 더불어 내가 영향을 받고 있다는 즉 나의 밖에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실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세상을 보고 있고 또 그런 나 자신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철학적으로는 획기적이다.-여기서 철학과 상식이 많이 다르다- 왜냐하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생각하는 자아의 절대적 확실성이 데카르트에 의해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 역시 철학적 반성적 사유에서 비로소 파악된다. 보통은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주변의 사물들을 보고 있을 따름이다. 내 주변에 책상이 있다는 사실을 루소는 “내가 영향을 받는 그 감각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 눈을 통해서 빛과 색이 들어오고 사물이 들어온다는 것을 안다.


How can I tell whether my self-consciousness be, or be not, something foreign to those sensations, and independent of them.
나의 자기의식이 이런 감각에 낯선 것인지 아닌지 혹은 감각으로부터 독립된 것인지 아닌지를 나는 구별할 수 없다. - 루소 <에밀>           


다시 말해서 나 또는 자기의식이 감각과 분리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감각적 인식을 의심하거나 부정하고 나서도 남는 것이 있으며, 그것이 곧 '나는 생각한다(Ich denke, I think)'라는 의식이었다. 데카르트는 감각적인 존재 즉 외계의 존재를 의심할 수 있으나 자기의식 즉 Ich denke는 의심할 수 없다고 했으나 루소는 자기의식이 감각과 항상 붙어 있다고 한다. 따라서 감각의 세계 혹은 외부 세계도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다시 말하면 가령 우리가 빨간 사과를 보고 있을 때 빨간 사과라고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 사과를 보고 있는 “나” 혹은 “자아”를 동시에 인식하는 것이다.      


예전의 필자의 은사였던 손봉호 교수님은 '나는 생각한다'는 데카르트의 원리가 '실은 그 목적어를 내포한다'라고 하셨다. '생각한다'는 늘 '무엇'을 생각한다. 그 무엇이 루소에 의하면 바로 일차적으로 감각이고 사물인 것이다.


루소의 이 사상 즉 자기의식(Ich denke)이 감각에 대해 서로 구별이 되는지 아닌지 혹은 서로 독립적인지 아닌지 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물론 루소는 “양자의 관계를 잘 모른다”라고 한다. 그러나 양자가 서로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고와 감각이 결부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여기에 후일 칸트가 말하는 통각의 종합적 통일 개념이 숨어 있다. 피히테 식으로 말하면 “자아(Ich)에 대해서 비아(Nicht-Ich)가 정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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