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세계
"와인을 고르기 어려우실 땐, 병의 라벨 속 그림으로 골라보세요."
첫날 방문 이후 부쩍 친밀해진 와인 세계의 점원은 와인 매대 앞에 서서 이십 분째 고민하고 있는 승아에게도 친절히 응대했다. 승아는 그가 와인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평소 물건을 구매할 때마다 승아는 여러 측면을 고려하곤 했는데 가격과 품질, 디자인뿐만 아니라 상품의 아우라도 고려 대상이었다. 쉽게 말해 SNS에 업로드한다면 얻게 될 자신의 품위 같은 것. 어느 적엔가 읽었던 밀란 쿤데라의 소설 속 구절처럼 그녀의 피드는 그녀의 정체성을 드러내 주었다. 아름답고 고귀한 사물은 그녀에게도 전염되었다.
그러나 상점의 점원들은 본인들이 중시하는 측면만을 강조하여 추천하곤 했다. 대부분 가격 대비 성능을 자랑했다. 승아는 그 점이 불편했다. 집중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물건을 선택하고 싶었지 강요받고 싶진 않았다. 시야에 닿는 모든 것들이 광고성 이미지였음에도 그녀는 모든 선택에 자기 의지가 있다고 믿었다.
한 번은 생리대 판촉 직원과 실랑이를 벌어야 했다. 한 여름에 생리를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신경이 곤두서는 일이었다. 텁텁하고 습한 열기에 두툼한 면 재질의 생리대는 물론, 부드러웠으나 적합하지 않았다. 물에 흠뻑 젖은 머리로 습한 도시를 걷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 젖은 머리는 결코 절로 마르지 않는다. 그 상태로 일주일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판촉 직원은 쉼 없이 100% 면 재질의 생리대를 강조했다. 승아는 잘 만들어진 미소로 반응하면서도 눈은 계속해서 흡수율이 높으며 접착력도 좋은 생리대를 찾고 있었다. 매장의 실내엔 상쾌한 에어컨 바람이 습기를 앗아가고는 있었지만 승아의 속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배와 허리 양쪽을 공격해대는 생리통은 판촉 직원이 내뱉는 말과 리듬을 맞춰가며 가속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절정을 향해 나아가는 오케스트라단 같았다.
"정신이 없네."
그랬기에 그녀는 평소라면 내뱉지 않을 혼잣말을 내뱉고 말았다.
"정신이 없어요?"
판촉직원은 승아에게 퉁명스레 말하며 몸을 획 돌렸다. 직원이 입은 조끼의 천이 급작스런 마찰에 바스락거렸다. 승아는 아차 싶었다. 직원은 승아에게 어머니뻘의 중년 여성이었고 체화된 도덕성은 그녀에게 죄책감을 안겼다. 뒤늦게 사과했지만 직원은 자리를 뜬 뒤였다.
승아는 무언가를 선택할 때마다 종종 그날을 회상했다. 영미 씨에게 추천받은 데이팅 앱에 자신의 정보를 기입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사진첩에 저장되어있는 사진들 중 가장 잘 나온 사진을 고르면서, 자신의 학력과 나이, 키, 몸무게를 입력하면서, 현란한 문장으로 자기소개란에 자신을 진열하면서 생리대를 고르던 날을 떠올렸다. 쑤시는 고통과 쉴 새 없이 쏟아지던 홍보 직원의 말들 속에서 신경증적 반응을 보였던 그때 그녀는 사실 외로움을 느꼈다.
고통이라는 것은 사람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질환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자신의 고통을 사회 규격에 맞게 서술할 수 있어야 한다. '욱신거리는'이란 형용사와 '찌르는'이란 형용사는 다른 것이다. 정신이 없다도 고통을 서술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규격에 맞게 서술하지 않으면 그저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는 여자가 되었다. 예민하고 신경질적이고 과민한. 그러지 않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도덕성을 높여야 했다.
외로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외로웠지만 외롭지 않다고 말해야 했다. 그녀가 외롭다고 말하는 순간 온갖 불행한 것들이 달라붙었다. 늦었다는 시간이 가장 그녀를 괴롭혔다. 34살의 미혼 여성에 따라붙는 불온한 시선은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외롭지 않은 여성을 연기해야 했다. 영미 씨에게 데이팅 앱을 추천받을 때에도 그녀는 결혼할 생각이 아니지만 다른 이성을 만나볼 마음이 있는 쿨한 여성 역을 수행했다.
"다 입력했으면 저장해요. 저녁때쯤이면 승인이 나겠네요. 그럼 그때 상대방 카드가 도착할 거예요."
"심사도 받아요?"
"그럼요. 제삼자가 심사를 해야 안전이 보장되죠."
매대에 진열된 와인병을 보며 승아는 심사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 와인병들도 와인 세계에서 심사를 받아 선택된 것들이었다. 와인들은 크게 레드, 화이트, 로제로 나뉘었고 국가별로 한번 더 나뉘었다. 그녀가 일전에 맛보았던 내추럴 와인은 섹션이 따로 있었다. 내추럴 와인 코너엔 레드와 화이트, 로제 와인들이 카테코리화 되지 않고 무분별하게 섞여 있었다.
"그건 오렌지 와인이에요."
그녀의 눈길에 닿는 와인을 짐작한 점원이 말을 덧붙였다.
"오렌지로 만든 건 아니고요. 색깔이 오렌지와 같아서 오렌지 와인이라고 부르죠."
점원이 말하는 와인이 어떤 와인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말하는 오렌지 와인이 무엇인지 되묻고 싶지도 않았다. 대신 그녀는 한 여성의 초상이 그려진 라벨지에 시선을 두었다. 단발머리의 여성은 눈을 내리깐 채 승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거만한 표정이 맘에 들었다. 승아는 단숨에 그 병을 집어 들었다. 점원이 그녀가 선택한 와인에 대해 무어라 첨언하기도 전에 계산대로 성큼성큼 걸어가 와인 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자신이 어떠한 정보도 없이 눈에 띈 와인을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자 어떠한 통제력이 느껴졌다.
“역시, 라벨 그림을 보고 선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점원이 와인병에 부착된 바코드를 찍으며 말했다. 때마침 휴대폰에 설정해 둔 알림 진동이 울렸다. 데이팅 앱의 승인이 완료되었다는 알림이었다. 화면 속에 10장 남짓의 프로필 사진이 나열되어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드를 하나 선택하면 사진이 뒤집어지고 그 사람의 정보를 간략하게 알려주었다. 하단에는 대화 신청하기 버튼이 반짝이고 있었다. 승아는 와인을 선택할 때와 달리, 카드를 하나씩 다 눌러 기술된 정보를 꼼꼼하게 읽었다. 그중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한 사람을 선택해 대화를 신청했다. 와인병을 포장하던 점원은 그녀가 선택한 와인에 대한 정보가 적힌 카드를 그녀의 손에 들려주었다. 그녀는 어쩐지 무력한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