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를 가야 하는 이들이 가지 않으면 벌어지는 일에 관하여 - 03편
나는 이 영화가 금단의 사랑으로 마케팅되어 수십 년 동안 살아남은 것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사람 중 하나라고 표현하지 않고, 사람이라 표현한 것은 나름의 용기다. 나는 이 작품을 명작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의견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굽힐 생각 없다. 치기 어린 무지와 무식으로 판단할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많이 다른 사람이니 지나쳐 가라. 설득하지 않을 테니까.
독자 배심원 여러분, 오해하지 말길. 나는 이 작품이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현란하고 매혹적인 표현을 사랑한다. 다만,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 나는 이 작품이 로맨스처럼 읽혀지는 것이 몹시 거북하다. 이 작품은 그 어떤 범죄소설보다도 서늘한 페도필리아의 기록이다. 성장서사도, 불가피한 마력에 이끌려 죄악을 저지르게 된 이야기도 아니다. 광기에 사로잡혀 죄를 저지르는 이를 구경하고 싶다면 에드가 앨런 포우의 글을 읽는 것이 나을 것이다.
위협적이지 않은 이상성욕은 없다. 이상성욕이란, 발휘되는 대상이나 상황으로 한정 지을 수 없으며, 그것을 만들어내는 과정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시체성애자는 시신을 위해 살인이라는 과정을 거치고, 종종 도굴이라는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그러니 미성숙한 어린아이에게 성적 흥분을 느끼는 페도필리아가 생산해 내는 과정 또한 무궁무진하다. 롤리타는 그중 한 갈래를 목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하게 한다는 영화의 밑바탕에서, 이 영화는 대단히 매혹적이고 사랑스럽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이다. 제레미 아이언스의 고귀한 외모로 인해 험버트에게 동정서사가 부여되었다는 말이 종종 보이던데, 반은 동의하고, 반은 동의하지 않는다. 제레미 아이언스의 귀공자 같은 면모도, 롤리타 속에서는 어찌나 박색 하게 보이던지. 힘없고 축 늘어진, 중년 남성의 추잡스러운 행동을 묘사하는 그의 연기력이 놀라울 지경이다. 그렇게 근사한 외모가 혐오스럽게 보이니, 그것도 대단한 연기라 할 수 있겠다.
나는 이 작품이 각종 예술로 수없이 환생하는 것이 거슬린다. 이 작품을 계속해서 살려내는 이들이, 본인의 취향을 대단한 탐구력으로 감추는 과정이 위선적이다.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이, 나 같은 사람을 두고 사랑을 알지 못하는 냉혈한이라던가, 인간의 고뇌를 그린 도발적인 작품을 한없이 격하시킨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신경 쓰지 않는다. 내 글 또한, 그 어떤 도덕적 교훈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은 이 작품과 피차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p.s. 나도 이 작품을 좋아한다. 이것만 좋아하겠는가. 마릴린먼로가 부르는 My Heart Belongs To Daddy나 Every Baby Needs A Da-Da-Daddy에 열광한다. 그렇기에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 같은 사람은, 심장을 가르면 추악함이 흘러나온다. 험버트처럼 굴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