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순애로 봐야 하는지, 변명으로 봐야 하는지.
남성의 광기는 자기 파괴적인 구조를 띄지 않고, 언제나 그 동기가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동기가 타인을 파괴할 정당한 권리라도 쥐여준 것처럼, 주인공은 여성을 살해한다.
영화는 증거물이 아니고, 그렇기에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밀어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는 없지만, 이런 영화를 보면 언제나 의문이 남는 것이다. 등장인물의 비정상적인 사상이나 가치관, 행동 동기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기이하게 바라봐야 하는지.
이 영화에서 어김없이 등장한 모성애는 사라진 자신의 신체 부위-손-를 아들의 것에서 대리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서글픈 착취이다. 하지만 그 서글픔을 지속시키지 못하는 것은 어머니의 괴팍한 성격과 더불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시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끊임없이 아들에게 살인을 지시하고, 명령하며 끝내 수행하도록 만든다. 그렇기에, 그녀가 환영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주인공은 살인의 책임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관객은 그가 당한 정서적/신체적 학대를 모두 목격했기에 상당 부분 연민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학대를 당하던 소년이 이해할 수 없는 살인을 자행하는 어른으로 자라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해가 가능하지만, 공감이라는 감정이 비집고 들어갈 틈까지는 확보하지 못한 듯하다. 그 이유는 시신을 매장하는 방식에 있다. 극 중 주인공은 살인에 대한 상당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시신들은 온전한 상태로 매장된다. 문제는 이 지점이다. 흰색 페인트를 칠하는 부분. 흰색 페인트로 칠하는 장면에서 나의 모든 연민은 힘을 잃었다. 흰색 페인트라니, 그것은 너무나도 개인적인 도착이 아닌가. 차라리 어머니가 심어놓은 광기에 시달려 시신의 팔을 모두 토막 내었다면 연민이 거세졌을 것이다. 하지만, 흰색 페인트를 온몸에 칠하는 것은, 얼굴의 흰색 분장을 뒤집어쓴 여자가 알마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너무나도 기이하다.
뒤틀린 모성이 아들을 살인자로 만드는 스토리는 70년대의 악명 높은 연쇄살인범, 에드 캠퍼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명치에 칼을 맞은 어머니가 아들을 향해 "난 네 안에 있을 테니까."라며 자신의 정체-환영-를 밝히는 장면은, 에드 캠퍼가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한 후, 그녀의 성대를 떼어내어 음식물 처리기에 집어넣은 사실과 닮아있다. 성대 조직이 질긴 탓에 제대로 갈리지 않고, 튕겨져 나오자, 캠퍼는 잘리지도 않는 성대가 참 제 어머니 답다고 생각했다고. 살아생전 그녀는 끊임없이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해댔기 때문이다. [He also cut out her tongue and larynx and put them in the garbage disposal. However, the garbage disposal could not break down the tough vocal cords and ejected the tissue back into the sink. "That seemed appropriate, as much as she'd bitched and screamed and yelled at me over so many years, " Kemper later said.]
나는 이 영화가 구원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경찰에게 체포되기 직전,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올리는 알마의 표정을 떠올려보자. 자신의 손을 되찾았다며 활짝 웃는 주인공과는 대비되는 현실 자각의 표정.
알마가 그를 구원했을지는 몰라도 그가 알마를 구원하지 못했다면,
이것이 어떻게 구원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