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왜 반복되는가 :

『로봇 드림』이 보여주는 감정의 소비 구조

by 베로니카 Veron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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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왜 반복되는가 : 『로봇 드림』이 보여주는 감정의 소비 구조

[외로움을 위한 소비]



수없이 많은 예술 작품에서 사랑이 중요 주제로 통했던 이유는 그것이 가진 꿈같은 특성 때문 아닐까. 사랑은 한 편의 꿈. 눈에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빠져들 수 있다는 낭만적인 공통점을 공유한다. 그렇게 꿈을 꾸는 로봇이 있다.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로봇의 이미지는 차가운 금속의 몸체,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나 표정을 읽어낼 수 없는 얼굴이다. 압도적인 능력과 감정을 맞바꾼 존재, 인간이 내린 명령을 착실하게 수행하는 기계의 상위 호환 버전. 그런 로봇이 꿈을 꾼다면, 그것 또한 보편적인 일은 아닐 테다. 대개 로봇의 존재 목적은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바꿔주기 위함이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거나, 심부름을 하거나, 반복 노동을 해소하기 위해. 그러나 인간의 고난은 무척이나 다면적이라 신체의 안식이 매번 삶의 윤택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영화의 주인공인 도그 또한 마찬가지다. 도그가 염증을 느끼는 것이 반복되는 인스턴트 식사도, 청소되지 않는 방도 아니라는 점. 결국, 외로움은 그 어떤 고난보다 크고 질기다.


영화는 “낮”이 아닌 “밤”에서 시작한다. 밤의 빛은 낮의 빛과는 달리 선택에 따라 켜진다. 가로등, 간판, 거실 등, 침대 옆에 작은 등까지. 밤의 빛은 필요에 의한 것이라 종종 기분을 표현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되는데, 도그가 선택한 빛은 TV와 전자레인지가 전부이다. 냉동 맥앤치즈를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장면은 관객이 전자레인지 안에서 도그를 바라보게 되어 있는데, 내부의 밝은 빛 때문에 역설적으로 도그의 모습은 더 어두워 보인다. 불이 꺼진 집은 폴리 사운드를 제외하고 배경음이나 대사도 없다. 정적이 곧 공백이 되어, 관객이 도그의 빈자리를 관찰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도그가 자신의 외로움을 자각하게 되는 장면은 꺼진 TV 액정 속에 비친 자신과 눈이 마주쳤을 때이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부각시키는 것은 도그가 앉아 있는 2인용 소파의 빈자리이다. 옆자리의 공백을 함께 비춤으로써 도그의 외로움이 개인의 영역이 아닌 관계의 공백임을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TV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자각을 유도할지언정, 변화의 동기를 유발하지는 못한 것처럼 도그는 다시 TV를 켠다. 이때, 모든 것이 대비되는 이미지가 보인다. 바로 이웃의 모습이다. 도그는 빨대를 입에 물기 위해 고개를 권태롭게 돌리다가 우연히 이웃집을 바라본다. 밝게 불이 켜진 집, 소파에 나란히 앉아 팝콘을 나눠 먹는 이웃들의 모습. 그들은 2인용 소파를 꼬박 채운다. 그 행복한 장면과 도그 사이의 격차는 너무나도 선명해서 도그가 어둠 속으로 숨어들수록 오히려 빈자리는 강조된다. 보편적으로 어둠은 무언가를 감추는 데 용이하지만, 어떤 어둠은 외로움을 숨겨주지 않고 오히려 부각시킨다.


그런 도그 앞에 펼쳐지는 것은 다름 아닌 로봇 판매 광고. 캐치프레이즈는 “지금 외로우신가요?”이다. 보편적인 TV 광고와는 달리 그 도발적인 멘트는 적나라하다. 광고는 결핍을 자극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외롭냐고 묻는 것은 실례일 만큼 가혹하다. 생각해 보자. 일상생활 속에서 외롭냐고 묻는 광고를 몇 번이나 마주하겠는가? 아마도 포르노 사이트에서 제일 많이 볼 것이다. 외롭냐는 노골적인 물음은 결국 해당 로봇의 존재 목적이 외로움 해소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핑퐁 게임을 혼자 하는 도그에게는 절실한 존재이다. 도그는 로봇을 주문한다.


[존재의 닮음과 감정의 교환]


완성형으로 도착하지 않은 로봇은 DIY처럼 구매자의 조립이 필요하다. 설명서대로 조립하면, 로봇이 깨어난다. 이미 만들어진 타인을 통해 외로움을 해소할 수 없으니, 도그는 그 수단을 본인 손으로 만들어낸다. “구매”가 아니라 “창조”로 보이는 이 과정은 마치 탄생을 엿보는 것만 같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취약한 상태를 거름 삼아 태어난다는 점에서 도그가 로봇을 선택하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창조한 대상은 이미 관계가 맺어있어 그 진행이 한결 수월하기 때문이다.


외로움의 해소는 상호작용이라는 점에서 로봇은 오히려 로봇의 특성을 잃음으로써 상호작용을 원활하게 한다. 모든 것에 익숙할 것 같은 존재가, 무엇 하나 능숙한 것이 없다. 손을 잡을 때 힘 조절을 하지 못하고 너무 세게 잡는다던가, 스케이트를 탄 채 도그의 팔을 잡고 강하게 돌린다던가. 타인이 감수 가능한 영역을 예상하는 것은 경험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임으로, 로봇은 서툴 수밖에 없으며 자신을 창조한 도그를 통해 내사(introjection)한다. 로봇은 경험 없는 연인, 천진난만한 아이, 자상한 친구 등 무엇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다면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그야말로 동반자의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로봇이 그 어떤 존재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결국 그 어떤 존재도 아니라는 뜻이다. 로봇이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 이상, 그 다면적인 모습들은 반드시 수행해야만 하는 과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뚜렷한 것에는 자기 자신을 투영할 수는 없고, 로봇은 생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고착화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도그는 그런 로봇에게 마음 편히 감정을 투사(projection)한다. 버스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 위로 로봇의 모습을 그려 넣는 도그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 둘은 서로 겹쳐 보인다. 하지만 닮지는 않았다.


[꿈처럼 깨어나는 사랑]


사랑이란 서로의 세계를 사소하게 넓혀주는 행위이다. 하지만 이것이 사랑을 낭만적으로 만드는 이유라면, 이별의 순간 가장 큰 상처를 남기는 집요한 방식이 되리라. 얼마나 큰 흔적을 남기든, 그것이 관계의 재결합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취향이랄 것이 없는 로봇에게 도그는 자신의 “최애 곡”을 로봇의 “최애 곡”으로 고착시킴으로써 흔적을 남긴다. 도그가 두 번째 로봇을 구매하는 이유 또한, 본래 로봇의 빈자리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 이 둘은 이별 이후에도 서로의 영향을 지니고 각자의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관계가 구매 가능해지는 순간, 감정의 진정성은 의심받게 된다. 사랑의 목적이 외로움 해소라면 그것이 대체 가능하다는 점에서 얼마나 잔인한가. <로봇 드림>은 사랑이 왜 반복되고 망각 되는지를 보여준다. 꿈이 아무리 찬란할지라도 깨고 나면 그만인 것처럼. 사랑은 허탈할 만큼 쉽게 끝이 나고, 꿈은 꿨다는 기억 빼고 증거가 없듯이 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기에 사랑을 잊는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그래서 자꾸만 묻게 되는지도 모른다.


Do you remember? 기억하느냐고. 그대는 나를 기억하고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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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이 되어서야 쓰는 여담 : 비디오드롬 글과 마찬가지로, 2025년 씨네21 영화 평론상 공모전에 제출했던 글입니다. 사실 이 영화를 선택했던 된 이유는 그 당시 비슷한 의문을 품게 만든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를 기억하고 있냐는 물음은 끝내 전달되지 못했고, 그렇게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2026년이 되어 이 글을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결국 주장과는 달리 잊히지 못한 기억이 있고, 그렇기에 대체할 수 없는 관계가 있다면, 그저 대체했다고 착각하고 살 뿐이지요.


https://youtu.be/Gs069dndIYk?si=11b9f2HqI4ZMH2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