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비디오드롬』 을 통한 신체·폭력·미디어의 윤리

by 베로니카 Veron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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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비디오드롬』 을 통한 신체·폭력·미디어의 윤리

[괴물의 기원: 인간이라는 불편한 은유]



괴물을 떠올려보자. 누군가는 타인의 몸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프랑켄슈타인> 속 피조물(The Creature)을 떠올릴 수도 있고, 괴물이라는 단어 자체가 상품으로 전락했던 프릭쇼(Freak Show)를 떠올릴 수도 있다. 괴물에 대한 이미지는 이리도 다양하건만, 결국 그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괴상하게 생겨 도무지 알 수 없는 생명체“이다. 미지의 존재, 결코 인간으로 분류할 수는 없는 것.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미스테리한 낭만을 선사하는 존재로서 생존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괴물은 비유의 역할로 우리 곁에 남았다. 어떤 대상을 괴물로 정의하는 데는 여러 기준이 있다. 그 당시 사회를 이루는 다수의 가치관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누군가를 고립시키기 위해 단어를 악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기준은 고통에 대한 무지, 공감의 부재, 탐욕에 대한 긍정 정도가 있겠다. 이런 호칭을 얻는 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기준으로 움직이며 죄의식 없이 타인을 갈취한다. 패티 스미스의 「Gloria」 가사 중 일부,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그 죄는 내 죄가 아니고”를 착실히 수행하듯, 그들은 죄를 짓는 것에 열성적이다. 마치 그 누구도 자신들의 죄를 대리하여 용서받지 못한 것처럼. 이들을 바라보면 피와 살로 이루어진 것을 제외하고 인간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 가죽을 뒤집어쓴 짐승이 아닐까. 인간에 대한 기대가 높을수록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런 게 인간일 리 없다는 가장 기초적인 사회 믿음을 바탕으로 한 탄식. 극악무도한 범죄를 엿보게 될 때, 범죄의 질이 흉악하면 흉악할수록 괴물이라는 단어는 더욱 자주 등장한다.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 있느냐”라는 감상적인 불만도 뒤를 잇는다. <시계태엽 오렌지> 속 알렉스 일당이 근사한 낯으로 여성을 강간하고 남성을 린치하는 것을 보라. 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 있느냐”는 말은 결국 “인간이라고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물음을 필연적으로 설득해야 할 위치에 놓인다. 오로지 인간만이 인간을 착취하고, 인간만이 인간에게 악의를 가지며, 인간만이 인간에게 무심하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종족이 서로를 착취하고, 짓밟는 것에 최적화되어 있다면, 그래서 괴물과 인간 사이의 차이점을 도저히 찾아낼 수 없다면. 자기 자신을 섭취하여 끊임없이 재생산해 내는 우로보로스처럼 괴물과 인간이란 분리된 존재가 아닌 방대한 스펙트럼에 해당할 것이다. 인간과 괴물을 분리하는 기준이 전지전능한 신의 계시도 아니요, 결코 넘을 수 없는 삼도천도 아니라는 사실은 결국 뒤집어 말해 그 누구도 괴물이 될 수 있다는 명백한 예고이다. 괴물은 태어나는 존재가 아니라 만들어지는 존재라는 사실. 그렇기에 인간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삶을 타고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우리를 괴물로 만드는가?


[신체는 어떻게 미디어가 되는가: 맥스와 괴물의 탄생]

연속 살인으로 불리던 지금의 연쇄살인이 대두되기 시작한 1970년대 미국은 <비디오드롬>의 배경과도 유사하다. 영국의 록밴드인 레드제플린이 대세를 달리고, 베트남 전쟁, 사랑과 평화를 내건 히피 운동이 기승을 부리던 시대. 그 시기는 무척이나 혼잡하여 굵직한 사건이 몹시 많지만, 독특한 변화 중 하나는 바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원한을 찾을 수 없는 살인 수가 급증했다는 사실이다. 모든 살인에는 동기가 있다. 그리고 1970년대 이전에는 최소한의 설득력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사랑하는 이의 배신, 질투, 금전 관계의 분노, 조직 사이의 권력 다툼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를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다는 점에서 용의자를 특정하기 쉬웠다. 하지만 때는 1970년대, 새 시대에 맞춘 새로운 살인이 등장한다. 그야말로 연쇄살인의 황금기. 피해자들 사이의 공통점은 있어도,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연결고리는 없다. 이때의 인간은 한 인간이 오로지 본인의 쾌락을 채우기 위해 얼굴도 모르는 또 다른 인간을 기꺼이 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상하지 못했다.

"Are criminals born or are they formed?" 범죄자는 만들어지는가, 그렇게 태어나는가. 이 질문은 1970년대 프로파일링이 본격화되며 던져진 질문이다. 범죄가 변화하면 범죄를 쫓는 방법도 변화해야 했다. 괴물을 잡기 위해서는 괴물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잔혹한 필연이 탄생했고,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볼 것이다.”라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은 악을 이해하기 위한 프로파일링의 상징적인 문장으로도 사용되기 시작한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죄의식 없이 죽이는 이들은, 극심한 이상성욕에 시달려 기어코 타인을 해치는 이들은 그렇게 태어나는가, 혹은 만들어지는가. 이 질문은 결국 “인간은 변형되는가, 아니면 생산된 채로 유지되는가.”라는 문장으로 뒤집어 읽을 수도 있다. 성악설과 성선설을 모두 담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 문장은 흥미롭다. 그들은 악하게 태어나는가? 혹은 악하게 변형되는가. 괴물의 본질이 인간이라는 정의 아래 <비디오드롬> 속 신체들은 변형된다. 영화 내내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변화 종류는 ‘결합’하거나 (총) ‘탄생’하거나 (여성기) ‘발각’된다. (총을 맞은 배리 콘벡스의 몸) 신체적으로 다른 이를 괴물로 지칭하는 문화는 프릭 쇼가 사라지며 대가 끊겼지만, 주인공인 맥스는 신체가 변형되지 않은 순간에도 괴물이다. 배경은 현실, 맥스는 동료와 일면식도 없는 이를 총으로 쏴 죽인 범죄자가 되어있음으로.


70~80년대 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맥스도 그 흐름에 편승한다. 소비가 공급을 낳는다는 말은 최소한 힘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공급을 통해 소비를 꾀하려는 인물이다. 그 수단으로 비디오드롬을 이용하려는 담대함까지 갖췄다. 신원미상의 인물들에게 행해지는 잔인한 행위는 플롯도 없다. 스너프라고 분류할 수 있는 콘텐츠는 비디오드롬으로 불린다는 정보 외에는 알 수 있는 것이 많이 없다. 정치적인 목적을 예상하지만, 그 목적에 설득력이 없으므로 동기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동기 없는 살인. 누가 어디서 어떻게 왜, 그들을 대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가. 신화 속 판도라가 호기심을 견디지 못해 상자를 열어버리게 된 것처럼. 맥스는 호기심에 목줄 묶인 개처럼 끌려다니며 비디오드롬의 폭력성에 매료된다. 관음은 타인의 불행을 기꺼이 관찰하는 자세에서 시작함으로, 파악할 수 없는 폭력에 대한 감상은 관음으로 전락하고, 맥스는 비디오 속 인물들과 자신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오만함을 보인다. 그 오만함이 역설적이게도 그를 비디오로 인도한다. 소비와 생산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비현실의 경계. 그는 포르노의 배우, 살인의 범인, 자살의 주인공이 된다. 맥스는 결국 “You are what you eat"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이라는 말을 뒤집은 ”You are what you see“ 당신이 보는 것이 곧 당신이라는 블랙 유머의 교과서적인 예시가 된다.


비디오드롬에 노출된 이후, 환각에 시달리는 맥스의 복부 위로 제왕 절개 흉터를 마치 90도로 돌린 것만 같은 세로선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선은 2차원이 3차원이 되듯, 갈라진 틈이 되어 여성의 성기 같은 것을 탄생시킨다. 이는 미디어가 침투할 수 있도록 ‘개방’된 상태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그렇게 개방된 신체가 처음으로 삼킨 것은 ‘총’이고, 그 이후는 ‘맥스 자신의 손’이다. 그때까지 삼킨 것이 모두 ‘본인의 것’이기에 맥스의 신체는 격하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배리 콘벡스가 비디오테이프를 들이민다. 무엇을 원하냐는 맥스의 물음에 배리는 ”열어주었으면 좋겠다“(open up)는 말뿐이다. 그의 손에 들려진 비디오테이프에서 강한 바람이 뿜어져 나오자, 그 바람이 맥스의 옷이 무참히 벗겨낸다. 여성기가 복부에 있는 탓에 다리를 벌리는 ‘spread’가 아닌 마음을 터놓는 ‘open up’이 맥스에게 적합한 명령어라는 점에서 맥스의 위치는 더욱 유약하다. 급소와도 같은 곳이 무방비하게 노출되면, 여성기의 존재는 더 이상 망상과 현실을 가르는 존재를 넘어, 맥스의 위치 변화를 보여준다. 맥스는 본인의 신체 결정권을 잃고, 배리는 마치 강간이라도 하듯 테이프를 밀어 넣는다. 타인의 것을 삼켜낸 맥스는 고통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한다. 비디오테이프를 밀어 넣는 ‘삽입’은 결국 ‘메시지의 전달 수단’으로 육체를 격하시킨다. 비디오는 그 자체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비디오 플레이어의 존재 목적은 내용을 재생하는 것뿐. 플레이어가 된 맥스는 비디오의 내용을 그대로 수행할 수밖에 없다. 결국, 감쪽같이 사라졌던 총이 배리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다시 등장한다. 테이프를 삽입당한 순간부터 총이 악용되는 흐름은 마치 부엌칼을 떠올리게 한다. 식재료를 자를 때면 무고한 칼이 동기에 따라 살생의 도구로 이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광기와 윤리의 경계: 현실을 파괴하는 환각의 힘]


조절할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사내, 비현실적인 환상을 보고, 이성이 찾아오면 현실을 두려워하는 남성상은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 <배반하는 심장>, <베레니스> 등 그의 작품 전반적인 영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광기가 충동을 부채질하고, 가여운 이성이 힘을 잃으면, 살의가 활개를 친다. 후회와 책임은 이성의 몫이니,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한 이는 형벌의 대상이다. 맥스는 그런 부류와는 거리가 멀다. 맥스를 미쳤다고 규정시켜 편안해지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실패이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인간의 죄는 어찌할 수 없다는 홀가분한 회피로 그의 기행을 이해할 수 없다면, 맥스가 저지른 행동은 누구나 저지를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 누구도 맥스의 기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영국의 연쇄살인범, 데니스 닐슨은 피해자의 잘린 머리통을 삶아 끓이면서 그것을 태우지 않기 위해 불을 조절할 만큼 정상이었다. 유희가 끝나면 피해자를 전문적으로 처리한다는 점에서 그는 미치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행위를 했다는 판단, 살해를 들키게 되면 더 이상 이어갈 수 없다는 예상, 그렇기에 이를 숨겨야겠다는 동기까지. 이는 맥스의 행동기제와 유사하다. 영화의 후반부, 맥스는 ”동업자들을 죽이고, 우리에게 채널 83을 주시오”라는 배리의 명령에 복종한다. 동료들을 총으로 쏴 죽이는 장면은 맥스의 시선으로 펼쳐지면서 마치 형벌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그렇게 2명 모두 살해한 맥스는 총소리에 사람들이 몰려오자, 자신도 습격받은 연기를 하고, 부축을 받으며 장소를 벗어난다. “비이성은 이성의 근거가 된다”라는 철학자 미셸 푸코의 말처럼 말이다.

어떤 대상을 미쳤다고 말하는 것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음을 돌려 말하는 변명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괴물에 대한 화두도 동일하다. 그래서 그들은 미쳤는가, 미치지 않았는가. 광기가 초월적인 존재라면, 유혹에 약한 일부 인간이 광기로 인해 밑 단계인 괴물로 추락한다는 가설은 매혹적이지만, 지나치게 순진하다. 소설가 조지프 콘래드의 말을 떠올려보자. “악을 행하는 데 초월적인 존재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인간은 혼자서도 모든 악을 행할 수 있다.”

[죽지 못한 육신: 미디어에 박제된 존재란]

영화의 후반부, 맥스는 도망자이다. 맥스는 그쯤에서 벌써 4명을 죽인 범죄자가 되었다. 살인과 살인 사이의 냉각기가 없기에 연쇄살인보단 대량 살인, 그보다는 목적을 가진 개인적 복수극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그는 나름의 동기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비디오드롬에 대항한다는 목적이 그를 고립시키고, 더 나아가 죽음을 선택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비디오드롬> 속 죽음의 의미는 남다르다.

무엇이 죽은 것인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이들을 보면 죽음으로부터 돌아올 수 있는 마지막 경계선은 의사가 내린 선고로 보인다. 절대적인 선고는 육신의 부패, 육신이 썩은 이가 돌아온 적은 없다. 그렇다면 육신이 썩지 않으면 그것은 산 것인가. 푸코에 의하면 담론이란 특정 조건을 통해 그 시대에 진리처럼 사용될 뿐, 결국 시대에 맞춰 변화한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담론도 질문을 던져 재정립해야 하지 않을까. 썩지 않은 육신이 산 것이라면, 미디어에 박제된 이를 삭제시키는 것은 왜 새로운 장사(葬事)로 불리는가. 그런 일들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이들은 왜 디지털 장의사로 불리는가. 죽음의 의미가 확장되었다는 것은 미디어의 남다른 발전을 시사한다. 오늘날 죽음은 기억하는 이가 남지 않게 되는 것을 함께 포함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디어는 망각을 막고, 삶을 연장시킨다는 점에서 에드거 앨런 포의 <M. 발데마르 사건의 진실>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 속 주인공은 임종 직전인 친구(발데마르)에게 최면을 걸어 한 가지 실험을 진행한다. 만약 임종 직전에 최면이 걸린다면, 그 최면이 죽음을 막을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삶을 연장할 수 있는가. 그렇게 발데마르는 죽음의 경계에서 최면에 걸리고, 주인공이 죽어가는 발데마르에게 묻는다. “살아있는가?” 그 말을 들은 발데마르는 “죽어가고 있네.”하고 답한다. 이 서늘한 대화가 끝나는 시점은 윗입술이 말려 올라가고, 까맣게 부푼 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부터다. 결국, 발데마르가 사망했다고 결론짓고 간호사들에게 인도하려는 순간, 혀가 움직인다. ”잠들어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죽어 있네.“

죽어있는 이가 자신의 죽음을 타자(他者)처럼 설명하는 대목은 니키와 오블리비언 교수가 TV를 통해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카메라를 통해 박제된 육신은 미디어 내부에서만 기능하고, 최면과도 같은 상태에서만 비로소 만날 수 있다. <비디오드롬> 속 새 육신은 그것이 헌 육신을 닮았다는 점에서 박제의 성격을 띤다. 마치 살아있는 상태를 보존하는 것처럼 새 육신은 헌 육신의 연장선이다. 그러니 ‘새로운 육신‘ 보다는 ‘죽지 못한 육신’으로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 죽었음에도 생전의 상태를 유지하며 떠도는 것은 미디어의 발전 이후, 유령뿐이 아닌 것이다.

도망자가 되어버린 맥스의 마지막 장소는 폐선박. 몸을 숨긴 맥스의 앞에는 낡은 브라운관이 놓여 있고, 맥스는 그것을 통해 니키를 본다. 맥스를 인도하기 위해 왔다는 니키는 ”죽음은 끝이 아니란 걸 배웠죠. 난 당신을 도와줄 수 있어요.“ 라며 대화를 시작한다. TV는 본래 일방향이지만, TV로 대표되는 미디어 매체가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 의사소통을 시작함으로써 사실상 영화의 모든 일들이 벌어진다. 배경으로 깔리는 음산한 신스음과 어딘가 몽환적인 니키의 얼굴은 그 조합이 더욱 기묘하고, 관객은 맥스의 시점에서 니키를 바라보며 맥스와 함께 TV를 바라보는 경험을 공유한다. 길을 잃은 것 같다는 맥스의 말에 니키가 쥐여주는 선택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지점에서 회유도 권유도 아닌 유혹이다. “그냥 저한테로 와요. 니키한테 와요.” 그렇게 니키는 새 육신을 얻는 방법을 재생한다. 폐선박에서 벌어지는 모든 장면은 상반된 신호뿐이라 관객이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불길함을 제외하고 없다. 구원처럼 보이는 죽음, 산 것처럼 보이는 죽은 자, 현실 감각을 잃게 만드는 독립되고 고립된 폐선박. 이제 TV는 니키가 아닌 다른 것을 비춘다. 권총을 관자놀이에 대고 자살하는 맥스.

맥스는 말한다.”새 육체의 영원한 삶을.“

불멸은 다시 말해 죽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삶을 얻은 새 육체는 죽지 못하는 육체가 아닌가. 죽지 못하는 육체는 신체의 자기 결정권을 잃었다는 점에서 역시나 무력하고, ”죽었어! 죽었어! 날 죽게 놔둬!“라고 외치는 시신의 모습은 <M. 발데마르 사건의 진실>에서 볼 수 있듯 끔찍하다. 21세기, 디지털 장의사라는 직업이 새롭게 생겨나고, 이를 통해 미디어에 박제된 이를 삭제시키는 것이 새로운 장사(葬事)라면, 미디어를 통해 시신을 보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원치 않은 영생이 많다는 사실을, 지금도 수없이 박제되어 안식을 취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을 소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괴물을 응시하는 윤리: 인간으로 남기 위하여]

괴물이 된 맥스는 분명히 죄를 짓지만, 그 죄를 책임지는 방식은 총을 통한 자기 파멸이 전부이다. 맥스는 비디오드롬을 통해 고통받은 피해자이자, 비디오드롬을 소비하는 가해자이다. 하지만 그가 복수를 당하는 입장보다 행하는 입장에 가까운 이유는 소비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 같은 무지 탓이다. 그가 하는 것은 소비와 공급이 전부이고, 제조가 빠진 공급은 정확하게 말해 유통이다. 가축이 복수를 한다고 가정할 때, 복수의 일 순위는 도축업자이지, 유통업자가 아닐 것이라 예상해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일정 부분 무고하다. 이렇듯 관음은 그 특유의 손쉽고 간편한 기질로 책임을 축소 시킨다. 언제나 소비자의 죄가 생산자의 죄보다는 작아 보이기 때문이다. 미디어가 해소의 탈을 쓰고, 착취의 뿌리를 가리면, 소비자는 기꺼이 속아주면 되는 한 편의 잘 짜인 연극. 하지만 알지 못하기에 더욱 소비할 수 있다는 말은 결국 그 죄책감을 간악하게 회피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모르기에 삼킬 수 있는 것이다. 어린 새를 살찌워 익사시킨 뒤, 구워낸 요리사와 그것을 입안으로 밀어 넣으며 신이 볼까 두려워 흰 천을 쓴다는 거짓을 내걸고, 실상은 향을 즐기기 위해 천을 뒤집어쓰는 이들 중, 과연 누구의 죄가 더 클 것인가. 소비 또한 생산 못지않게 큰 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자주 무시된다. 그도 그럴 것이, 살면서 누구나 소비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 되도록 무고한 입장을 선호한다.

그렇게 소비에 정당성이 부여된다. 타인을 착취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그것에 죄를 물을 수는 없는 일일 테다. 하지만 그 정당성은 오히려 부당하다. 왜 성욕을 해소할 권리를 들이밀며 비명을 지르는 여성의 모습을 기꺼이 즐기는가. 왜 폭력을 해소할 권리를 들이밀며 유해한 호기심을 숭고하게 포장하는가. 성은 상품화되었고, 폭력은 일상화되었지만, 아무도 도축장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듯, 우리는 소비 뒤편에서 이루어지는 생산의 잔혹성을 적당히 모르고 싶어 한다. 회피하면서까지 무고한 입장에 머물고 싶은 것은 결국,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 남고 싶다는 바람과도 같다.


레이디 고다이바를 보지 않기 위해 등을 돌렸던 낭만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면,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나체가 마구 난도질되어 인터넷을 떠도는 것이다. 새로운 유형의 착취 앞에서 현대 사회는 참담함을 느낀다. 착취의 대상은 변하지 않고, 그 대상을 망가트리는 방식만이 다양해진다면, 인간 본성에 대한 비참한 호기심을 품게 된다. 공개 처형을 관람하고, 타인과 죄의식을 나눠 가지는 행위는 광장에서 미디어로 그 장소를 이전했을 뿐이다. 이제 레이디 고다이바의 나체를 몰래 훔쳐본다고 한들, 누구도 눈이 멀지 않고, 그 누구도 눈을 멀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레이디 고다이바의 나체가 인터넷을 충분히 떠돌고도 남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발전이 죄의 종류를 확장시키지는 않았지만, 착취의 종류는 확장시킨 듯하다. 톰의 눈을 멀게 한 신의 존재는 요즘 들어 부재이니, 신의 형벌이 두려워 죄를 짓지 않으려는 시대는 지났다. 더 이상 눈먼 피핑 톰은 없고, 죄라는 것은 이미 개인적인 영역이다. 그렇다면 그 은밀한 분야에 대해 과연 누가 죄를 물을 수 있을까. 인간과 괴물이 스펙트럼 위에 놓인 동등한 존재이기에 죄를 물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면 우리는 고해성사 대신 반복적으로 스스로에게 물어야만 한다. ”밥은 먹고 다니냐?“ 라고.

그럼에도 죄를 자랑스러워하는 이들이 있다. 착취가 수치가 아닌 미덕이 되는 세상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맥스가 그랬듯, 눈이 머는 형벌 대신 자기 파멸이 있으리. 그리고 자기 파멸을 순교로 착각하는 무지가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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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이 되어서야 쓰는 여담 : 2025년 씨네 21 영화 평론상 공모전에 제출했던 글입니다.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도전했던 것은 분명 객기였겠지요. 결과를 예상했던 것치고 저는 한동안 꽤나 추하게 우울해했습니다. 형식에 적합하지 않은 부적합 글을 보내면서도 아주 많은 운을 기대했던 것은 역시나 사람이 간절해지면 눈에 뵈는 것이 없기 때문일까요? 점점 습해지던 여름, Sofia Isella의 The Doll People을 들으며 키보드를 두드리던 시기가 있었고, 그에 대한 증거는 이제 이 글뿐입니다.


https://youtu.be/PD-uRFa2qkE?si=1lOtljdECuUTy4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