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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차 허니랜드] 적정한 삶이란

by. 화전

by 달달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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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랜드"의 포스터와 제목만 보면 아름다운 자연에서 양봉하는 한 여성의 삶을 그린 달콤한 영화일거란 상상을 하게된다.

노을의 찬란한 빛과 아티제의 노란 블라우스, 그 공간을 유영하듯 날아다니는 벌떼들의 모습은 마치 하나로 연결되어 최면에 걸린듯 넋을 잃게 하는 아름다움이(mesmerically beautiful) 있다.

이 아름다움처럼 아티제의 삶도 그랬을까?

영화의 주인공 아티제는 나이든 어머니를 모시고, 양봉을 하며 살아가는 중년 여성이다.

사람들이 다 떠나버린 마을에서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가 단촐하게 살아간다. 그녀의 삶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

아티제는 자신의 삶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족함을 안다. 지금 생활을 유지할 정도만 취할 뿐 그 이상을 가지려 욕심내지 않는다. 그런 태도는 꿀을 수확할 때 더 명확하게 보인다. "내거 반, 네거(벌) 반"

그녀는 어머니가 드시고 싶어 하는 음식을 구할 정도, 누군가에게 보여줄 일을 없겠지만 마을 축제에 갈때 자신을 아름답게 해줄 밤색 염색약 정도... 그거면 그녀는 충분했다. 그들이 오기 전까진.

요란스러운 자동차 소리와 함께 후세인(남편)과 올리제(아내)의 가족이 이사를 온다.

순식간 부부의 일곱 아이들과 소떼들이 적막하던 마을에 공기를 바꿔놓는다.

갑작스런 변화와 소란스러움이 불편할만도 한데 아티제를 그들의 존재가 싫지 않다.

아이들이 주는 생기와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웃과의 만남, 소통이 그녀에겐 즐거움이다.

후세인과 올리제 그리고 아이들이 소와 한바탕 난리를 치르는 모습에서 그들의 삶의 태도가 조금씩 보인다. 아이가 소에게 걷어차여도 그 누구도 아이의 상태를 살피지 않는다. 오히려 윽박지르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아이끼리 놀다 한 아이가 다쳤을 때도 다친 아이를 살피는 행동보다 다치게 한 아이를 협박하는데 더 집중하는 엄마(올리제)의 모습에서 양육방식의 문제가 느껴진다.

후세인 역시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드는 비용이 늘 고민이다. 후세인은 아이들에게 네가 써야 할 돈이니 네가 벌어라라는 식으로 아이들의 노동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또한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쉽게 분노하고, 그 분노를 아내나 아이들에게 쏟아내는 그런 사람.

늘 돈에 허덕이는 그는 돈이 될만한 일이라면 뭐든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때 눈에 띈 돈이 되는 일이 바로 양봉이었다.

아티제가 양봉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이 일을 해보고 싶다고 한다.

그의 욕심은 꽤 많은 양봉 통을 집에 들일때 부터 느껴진다.

상식적으로 양봉을 할 때 혹시 벌이 사람을 쏘지 않을까 해서 집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설치할 법도 한데 그는 집주변에 양봉 통을 놓는다.

좀 더 쉽게 일하고자 하는 생각인지 아니면 사람을 믿지 못해 보이는 곳에 둬야 한다고 생각하는것인지 도통 모르겠다.

어린아이도 있는 집에다 통을 설치하는 그의 선택이 이해되지 않는다.

아티제는 그런 후세인의 모습을 보고 못마땅하지 않을까 싶지만 그건 내 생각이다.

아티제는 후세인이 양봉을 할수 있도록 조언과 더불어 돕는다.

다만 수확을 너무 빨리하지 말 것, 그리고 나머지 반은 벌을 위해 남겨둘 것을 당부한다.

수확을 너무 빨리하면 후세인의 벌이 자신의 벌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후세인은 아티제의 당부를 지켰을까?

중개업자 샤롯은 후세인이 양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에게 꿀을 요구한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때는 아직 꿀을 수확한 시기가 아니라면 꿀을 판매하는걸 망설이지만 곧 샤롯에게 꿀을 판다. 샤롯을 그 후로도 후세인에게 꿀을 팔라며 계속 따라다닌다.

결국 후세인은 다 차지도 않은 양봉 통을 열어 샤롯에게 꿀을 팔게되고 너무 빨리 수확한 탓에 수확량을 많지 않아 요구한 꿀 양을 다 채우지 못한다.

후세인은 자기가 생각한 대로 수확이 되지 않자 아이에게 탓을 돌린다. 네가 일(양봉)을 잘못해서 수확량이 적다고 말이다.

눈앞에 있는 이익에 정신이 팔려 아직 다 차지 않는 양봉 통을 열어 수확한 게 문제라는 것을 알 만도 한데... 그는 그저 애먼 아이만 잡는다.

너무 이른 시기에 꿀을 수확한 후세인의 벌들이 아티제의 벌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아티제의 양봉도 타격을 받기 시작한다. 샤롯과 후세인은 아티제의 여왕벌까지 손을 데어 아티제의 벌들을 모두 죽이게 된다.


후세인과 올리제의 모습을 보면 불나방이 떠오른다.

아름다운 불꽃(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불속으로 뛰어들지만 결국 죽게 되는 불나방처럼 욕심과 어리석음 그리고 이기심으로 타인의 고통(아티제, 벌, 소의 죽음)까지도 외면하고 그 대가로 그들도 소멸(소의 죽음, 마을을 떠나는) 하고 마는 불나방.

자원을 무분별하게 소비하고, 환경을 망가트리더라고 지금 당장 괴롭지 않았기에 욕심껏 사는 삶은 20세기에는 가능했다.

그 욕심껏 사는 삶이 재앙이 되어 지금의 힘듦과 괴로움을 낳았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20세기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살고 있다.

후세인과 올리제의 삶이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허니랜드를 통해 정리해 본 나의 생각은 "적정한 삶"이다.

적당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족하는 지점의 적정선에서 삶을 사는 것.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끝없이 허기를 느낀다. 허기로 인해 계속 먹다보면 살이 찌고 결국 건강을 해치게 된다.

적정한 삶은 자기의 상태를 알고, 나의 만족감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다.

21세기 우리에겐 이런 지혜가 필요하다.





달씨네클럽: 영화 보고 말하고 쓰는 온라인 여성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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