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도네시아 학살로 본 집단행동

[4주차 액트오브킬링] by.화전

by 달달보름


영화의 제목만으로도 살벌한데 영화의 내용은 상상 이상으로 잔혹하다.


이게 실화라는 것도 기함할 노릇인데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까지 실제 그 인물들이라니.. 어떻게 뻔뻔스럽게 얼굴을 내밀 수 있었는지 그들의 정신 상태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인도네시아 학살은 1965년에서 1966년 사이에 공산주의자, 신공산주의자,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던 중국인을 대상으로 벌어진 대규모의 학살이다. 수하르토가 주도한 쿠데타로 인해 집권세력이었던 좌파정권(수카르노)이 몰락하면서 쿠데타의 반대세력이었던 지식인, 노동자, 화교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이들을 죽인다. 국가의 암묵적인 승인 아래 프레만에 의해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되고, 이로 인해 희생자가 50만에 달하게 된다. 이후 30년간 수하르트정권의 독재가 시작되고, 세월이 흘러 정권이 교체한 후에도 여전히 학살의 주범들은 사회의 기득권으로 존재 자신들의 건재함을 과시한다. 이로 인해 인도네시아의 학살은 5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역사에서 생략되거나 학살에 대한 문제의식 또는 성찰이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학살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은 가족들과 아이들은 오랜 세월 학습된 공포와 무기력으로 저항할 의지와 힘을 잃어버려 자신의 권리가 묵살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삶을 살기로 결정한 걸까?


수리오노는 새아버지가 중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하고, 공산당원 가족이라는 낙인으로 판자촌에 버려서 제대로 된 학습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힘든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런 그가 프레만의 리더인 안와르 콩고와 이웃으로 지내며, 학살의 재현 장면에 참여하는 자체가 아이러니하다.


특히 캄품 골란에서 주민들이 학살당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실제 학살을 자행하는 사람들을 향해 웃어주는 수리오노의 얼굴을 보면서 묘한 배신감과 슬픔이 올라왔다.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는 채, 환하게 웃는 바보, 멍청이...


학살을 재현하는 장면을 촬영하면서 사람들에게 생각을 많이 하지 말아라!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라고 외치는 학살자들을 보면서 이게 현실이구나 싶었다. 많은 사람들의 눈을 감게 하고, 듣지 못하게 하고, 생각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마치 그 일이 없었던 것처럼, 현실감 없이 기이한 영상들로 짜깁기 하여 우리를 기만한다. 그리고 그들의 살인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구원자처럼 꾸며 또 다시 우리를 속인다.


결국 꾸며진 현실에서 숨겨져 있는 문제가 뭔지도 모르고, 기만당한 사실도 모르 체 환하게 웃는 바보가 내가 아닌지 자문해 볼 일이다.







인도네시아 학살로 본 집단행동






정상적인 상태에서 개인은 집단이 보이는 이상행동(비 이성적이고,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성향의 행동)을 이해할수 없다. 그 이상행동이 살인과 같은 극악적인 행동일 경우 더욱 그러하다.


자유인이라는 뜻을 지닌 프레만의 살인행위의 시작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서구 영화의 수입이 금지되면서 암표를 팔던 안와르 콩고(프레만의 리더)는 생계에 위협이 느끼게 되어 공산주의자들을 공격하게 된다. 이에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내고자 했던 정부로부터 그들(프레만)의 행동은 정당성을 부여되고, 그들의 집단행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더 극단적인 폭력 양상으로 확대된다.


이런 집단행동은 군중 속에서 자신의 행동이 익명성이 커질 때, 그 행동의 결과에 대해 개인의 책임을 덜 느끼게 된다.


집단행동을 통해 시너지가 발생하면 사람들은 흥분상태가 빠지게 되고, 법이나 도덕과 같은 사회적 규범의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행동을 분출하게 된다. 집단의 비이성적인 사고와 정서가 마치 병균에 전파되어 집단 전체로 퍼져나가 사회 전염 현상이 일어나며, 정체성을 상실한 개인은 자기 통제력을 상실하고 생각 없는 꼭두각시가 되어버린다.


결국 몰 개인화된 상황에서 흥분한 누군가가 "죽여라"라고 소리치면 사람들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흥분하여 순식간에 끔찍한 일을 벌일 수 있는 것이다.







전쟁범죄에서 정의란 승자가 규정하는 것이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사람을 살해하는 행위는 어떠한 수단이나 목적을 가지더라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사회에서 용인될 수 있는 정당성 있는 살인으로 판단되기 위해서는 그 범행의 동기, 행위자의 의사, 목적과 수단의 정당성, 법으로 보호받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이나 가치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 법적인으로 살인 그 자체는 보호받아야 하는 개인의 생명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정당화될수 없다. 다만 살인이 정당방위로서 인정받는 경우가 있다. 급박한 상태이거나 현재 부당한 침해를 받으면서 앞으로도 이런 침해가 계속될 가능성이 있거나, 개인이나 다른사람들을 방위하기 위해 경우에 정당방위를인정 받을수 있다. 하지만 행위가 일반상식의 기준을 넘지않고 당연하게 인정되는 상당한 이유가 있을때에 비로소 성립이된다. 그렇다면 프레만이나 공산주의자의 학살을 지시한 인도네시아 정부와 기득권 자행한 자국민의 학살이 법적인 심판이 가능하다.



사형집행자인 아디줄 카드리는 전쟁에서 정의란 승자가 규정하는 것이기에 국제법규를 따를 필요가 없으며 도덕적 관점 또한 상대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말을 우리나라의 검찰 또한 한적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공한 쿠데타는 '고도의 정치적인 행위'이기에 정부 범위 내에 있는 행동에 대하여 삼권분립의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에 사법부가 이 행위를 판단할수 없다는 견해이다. 검찰의 잘못된 판단을 정정하기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런 과정을 통해 " 폭력에 의한 정권장악의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인될수 없으며, 군사반란이나 내란행위가 통치행위라 하더라도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면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됨" 법적으로 명시하게 된다.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담보로 공포심과 불안감을 조성하여 나라를 통치하고, 정권을 유지하는 행위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기에 법적인 제재를 받는다.


세계의 많은 국가들 중에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하는 기본권을 박탈당한체 국민들이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는 나라들이 있다.


특히 학살과 전쟁 범죄,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국제 재판 기구인 헤이그에 제소 될수있지만, 실제로 제소되어 법의 심판을 받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고, 현재 우리 사회를 정의롭다고 보기에는 여러가지 한계는 있다.


하지만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고, 현실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시도나 노력은 우리가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The Act of Killing' 은 우리에게 해결해야하는 과제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의미있는 영화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미국은 아직 사과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