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여행의 기록
2016년 2월 아침의 노트
싸늘한 겨울 대기와 쨍한 햇살이 허락된 오늘은 완벽한 겨울 날씨다. 걷힌 커튼 뒤로 보이는 뒤뜰의 환한 햇살 아래 영글어 가는 레몬이 짙은 노란색에서 서서히 오렌지 색으로 변해 가는 것이 보인다. 내가 나이를 먹어서도 기억할 휴스턴의 겨울 풍경은, 은혜로운 햇살 속에 겨울을 잘 버틴 나무가 노란 레몬을 가득 달고 있는 이 그림일 것이다. 마음 묶인 데 없이 자유가 허락된 이 아침은 생산적이고도 소소한 집안일들을 하며 대기로부터 마른 지상으로 떨어지는 환한 햇살을 즐기기로 한다. 오전 운동도 산책도 거르고 집안에 틀어박혀 시간 속을 유영하며 마음에 잦아드는 고요를 즐기기로 한다. 내 무릎에 몸을 기대고 옆에서 자고 있는 콩이의 몸에서는 모처럼만에 강아지 시절에나 나던 꼴꼴한 냄새가 피어오른다.
매해 1월이면 미국 대륙을 발칵 뒤집어 놓는 눈폭풍이 올해도 어김없이 불어왔고, 올해는 하필이면 그 시기가 뉴욕 방문 시기와 겹쳤다. 센 겨울바람 쐬러 혹한의 동부로 멀리까지 갔던 겨울 여행이었던 셈. 친구들과의 만남, 끊어진 줄 알았던 옛 인연과의 재회 등으로 마음에 위로가 되었고, 눈과 귀에 아름답고 세련된 것들을 많이 담아 온 시간들이 되었다.
오페라의 유령
맨해튼에서의 짧은 한 주간은 발품을 팔며 음악을 들으러 다니고 그림을 보러 찾아다닌 정신이 호사로운 여행이었고, 한편으로는 마침내 가족과 함께가 아닌 혼자서 외출을 해도 좋은 이런 시간이 내게 허락된 것이 고마운 시간들이었다. 뉴왁 공항에 도착한 금요일 저녁, 우버 택시를 타고 허드슨 강을 건너 미드 타운에 위치한 호텔에 여장을 풀기까지 한 시간 여 남짓이 소요되었고, 어스름이 완연한 시간 브로드웨이에 있는 마제스틱 극장에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보기 위해 나섰다. 공연의 뜨거운 열기를 뒤로하고 극장을 나선 열한 시 경, 마침내 경고해 왔던 눈폭풍의 서막이 까만 하늘 마천루를 배경으로 살랑이듯 나부끼며 우리의 어깨 위에 내려앉기 시작하였다.
영혼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Jazz at Rose Hall
아이들처럼 눈 속에 갇힌 재미를 만끽하던 주말을 지나고, 공항이 닫히고 비행이 연기된 탓으로 하루 지체된 스케줄로 월요일 오후 남편이 집을 향해 떠난 다음날 저녁에는 친구와 불현듯 재즈의 선율에 정신을 담갔다. 로즈 홀에서 관람한 재즈 공연은, 엄마라는 이름 아래 십 수년간 잠자고 있던 감흥을 오랜만에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아이들이 고등학생과 중학생이 되기까지, 보살피고 양육하는 동안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재즈였지만, 세트럴 파크 건너편의 맨해튼 야경을 배경으로 세계의 구석구석에서 모인 뮤지션들이 펼치는 라이브 공연은 지난 세월의 간극을 단순 간에 뛰어넘게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56wFHiU7XE
Maria Stuarda, Metropolitan Opera
일주일간의 여정을 마무리 짓고 떠나기 전날 저녁, 친구가 미리 표를 예약하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관람하러 갔다가 현장에서 10불 더 내고 좌석을 업그레이드했더니, 무대 바로 앞 오케스트라로부터 여섯 번째 줄, 최고의 위치에 당첨되는 행운을 갖기도 했었다. Maria Stuarda. 스코틀랜드 여왕인 메리 스튜어트의 이름을 딴, 금번 시즌 첫 상영인 공연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와 그녀의 사촌이자 영국을 세계무대의 중심에 데뷔시킨 엘리자베스 1 세간의 대립과 갈등을 그린, 더 간단히는 메리 스튜어트의 죽음의 과정을 그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죽음을 앞둔 메리 스튜어트의 애절하고 비통한 노래에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다 좋았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을 엘리자베스 1세는 뒤뚱거리는 질투쟁이로 표현한 부분은 아쉬움이 남는다. 메리 여왕 역을 맡은 Sondra Radvanovsky 여사는 금번 시즌 튜터 왕조 시리즈의 세 여왕을 모두 공연한다는 표현력이 굉장한 가수라고 느꼈다. 돌이켜보니 음악 공연들을 보러 다닌 날들은 맑은 저녁이 계속되어 주었으나, 미술관에 들린 날들은 눈이 심하게 오거나 비가 오곤 했었다.
휴스턴 역시 맨해튼 다음으로 공연이 많고 다양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도시이지만, 타이트한 일상의 저녁들에 그 공연들을 보러 다니기엔 저녁 시간이 너무 짧을 만큼 거리가 멀다. 매일 저녁 공연을 보러 다니느라 맘이 바빴던 우리들의 발이 되어 주었던 뉴욕의 전철. 몸을 싣고 있노라면 심란함이 몰려오는 뉴욕의 지하철이지만, 그 신속성과 편리성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전철 없는 동네에 살다 보니 깨닫게 되는 바 한 가지는, 사람은 전철이 있는 동네에 살아야 한다는 단순히 소박하고도 웃기는 진실이다. 나이가 들면 더더욱 전철이 편리한 동네의 주민이 될 필요성이 있다. 더하여 전철의 필요성에는 이런 부분도 있다. 여행길에 들렀던 사진전에서 만났던 어느 나이 드신 작가도 그런 말을 했듯이, 사회의 다양성과 삶의 다양한 모습들에 대한 교육이 교실에 머물러 있어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사람들의 삶과 다양성에 대한 교육을 하는 데 있어서는 뉴욕의 전철만큼 효과가 큰 것은 없을 것이라고.... 나이가 들어 뉴욕의 전철을 타고 다닐 생각은 아니지만, 어느 도시가 되었든, 전철을 타고 이동할 수 있는 동네의 주민이 되는 것은 내 작은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