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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Apr 11. 2016

맨해튼 산책 (2) 거리의 정원

여행일기


거리의 정원


지평선의 한계를 밀어내며 넓게 펼쳐져 있는 휴스턴의 근교 도시들의 특징은, 새로 개발된 대부분의 동네가 그러하듯이 모든 것이 깔끔하고, 잘 정돈되어 있고, 구획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나지막하다. 고층 건물들이 불러일으키는 교통정체나 복잡함 따위는 없다. 주민들의 일상은 너무나 규칙적이고 규율에 따른 것이어서 예측에서 벗어난 삶이란 좀체 일어나기 어렵다. 주민 대다수가 계획되고 구획된 자연의 일부가 되어 표현 욕구 과하게 드러내지 않으며 굿 시티즌으로 조용조용히 들 살아가는 듯하다. 흔히들 말하는 서버번의 졸리는 생활인 것이라고나....

집 앞 연못



이에 반해, 거대한 매트로폴리스가 주는 또 다른 매력은, 웅장한 마천루의 숲이 드러내는 위용과 인간의 편의를 위해 고안된 각종 시스템에서 발견되는 인간 사고능력의 결집은 물론, 거리의 구석구석에서 찾아지는 잔잔한 생각의 흔적들 때문이다. 타임스퀘어의 육중하고 압도적인 회색 빌딩 숲이 피로하게만 와 닿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큰 건물들 입구와 사이드 공간에 배치되어 “앉아 쉬었다 가세요.”라고 발길을 잡는 휴식 공간들과 횡렬로 주주 룩 심어져 있는 세련된 모양의 나무들과 그들의 잎사귀, 예쁜 형태와 색깔들 때문이다. 뉴욕의 거리에는 부드러운 하트 모양이나 동그란 모양을 한 잎사귀를 가진 수종이 많이 눈에 띈다. 부드러운 잎을 단 나무를 심기로 맘먹은 조경전문가들의 손길이 고맙다.



남부 대도시의 단조로운 서버번에서의 생활을 일 년 만에야 벗어난 우리는 도시를 느끼고 싶어 거리를 걷기로 한다. 메디슨 에비뉴에 주차를 하고 매트로 폴리탄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 거리에는 가로수를 둘러싼 조그만 미니 화단들이 어설프게 만들어져 있고, 그 안에는 팬지나 베고니아가 색깔 맞춰져 나지막이 심겨있다. 지나가는 강아지들의 오줌을 방지하기 위한 듯이 보이는 투명한 방패막이도 무릎 높이로 쳐져있다. 땅값 비싼 고층 아파트 주민들의, 가든을 향한 갈구가 느껴져 귀엽다. 생각하는 존재인, 잔머리 굴리는 인간의 본성, 새삼 발견하고 반갑다.


꿈꾸어왔던 청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발짝 더 세계의 심장가까이 거처를 옮긴 친구는 맨해튼의 서쪽 끝, 허드슨 강을 바라보는 배터리 팍에 보금자리를 꾸렸다. 친구가 Battery Park City 주민이 된 덕분에, 맨해튼의 녹음과 자연, 그리고 거리의 정원을 감상할 기회가 생겼다. 눈길 닿는 곳마다 싱그러운 초록과 각양각색의 꽃들로 가득 차 있어, 도심 속 이 자연 광장의 아침과 저녁 풍광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번화와 세련 됨의 정도로는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마천루로 가득 차고 최신식 주거단지로 들어차 있으며 바다를 마주하고 요트장이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브룩필드 쇼핑센터 전경과 우리가 살던 해운대 바닷가 동네가 겹쳤다. 잠시 고향에 온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 옛날 큰 아이가 아기였을 때, 집에서 가까운 요트경기장에 자주 놀러 가곤 했었다. 평소엔 한적한 그곳에 가서 남편 운전 연수도 시켜주고 (운전면허 날짜까지 받아놓고 이곳에서 공짜 연수를 해 주었건만, 남편은 끝내 면허를 따지 않고 이민길에 올랐다), 비 오는 날이면 정박해 있는 요트들을 바라보며 차 안에서 빗소리를 듣고 비에 젖는 바다를 바라보곤 했었다.  재미있었는데...




금융가 중심의 거리 위에 펼쳐진 거리의 정원은 인상적인 스케일. 초고층 건물들 앞으로 인도가 운동장처럼 넓게 위치해 있는데, 그 위에 강아지 공원도 있고, 주민들이 운영하는 커뮤니티 가든도 있고, 놀이터도 있다. lower manhattan  서쪽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west avenue를 끼고 있는 이 인도와 주요 차도 사이를 꽤 규모가 큰 화단과 가로수 길이 차단하고 있다, 차도와 차도 사이에는 또다시 중앙분리대 역할을 하는 거대한 장미 정원이 길을 따라 놓여있다. 그러니까 이쪽 편 건물에서 저쪽 편 건물까지 가기 위해서는 강아지 공원을 지나고, 장미 화단을 건너서 5차선의 하행 차선을 건너고, 도로의 중앙에 다다르면 또 장미 정원을 지나고, 5차선의 상행 차선을 건너고 그쪽에 놓인 무릎 높이의 화단과 가로수 사이를 지나야 한다. 하하하 …. 그 거리의 이름이 도로가 시작되는 72번가 맨해튼 북쪽에서는 9A이고 맨해튼 미드타운 쯤에 이르르면 West Side Highway 로 이름이 바뀌는데 이 도로의 또다른 공식 명칭은 양키즈 야구단의 전설적인 야구선수 였던 Joe DiMaggio 의 이름을 따  Joe DiMaggio Highway로 불린다.  바뀌어 남쪽 끝 배터리 파크에 이른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동네 중 하나일 텐데, 그 비싼 땅의 적지 않은 부분을 이렇게 거리의 정원으로 할애하다니, 맨해튼 남서부, 인간적이다.


허드슨 강변을 따라 달라는 조 디마지오 하이웨이를 타고 가다보면 서울의 한강을 따라 난 강변도로, 올림픽 대로 어디쯤을 달릴 때와 비슷한 감상에 젖곤 한다. 특히 밤늦은 시간에 달리는 택시에 몸을 싣고 강 건너의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차가 달리는 속도만큼 내 뒷편으로 사라지는 도시의 열에 들뜬 분위기와 어우러져 신기하게도 고향에 온 기분에 빠져들곤 했다. 아마도 그때 깨달았던가보다. 맨해튼에 한국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유를..... 도시의 밤.. 어둠이 잠긴 도심 한켠으로 강이 흐르고 네온이 휘황한 밤의 도시가 풍기는 분위기는 서울과 맨하탄이 매우 비슷하다.






그 겨울의 허드슨 강


어느 겨울 다시 찾은 맨하탄에서의 며칠간의 기억. 출근하는 친구를 전철까지 배웅하고 돌아서는 길, ground zero 위에 우뚝 선 one world observatory는 길의 어느 방향에서 보더라도 한눈에 들어오는 일관성과 늠름한 위용을 뽐내고 있어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 배터리 팍 공원을 따라가다 허드슨 강변을 바라보며 아침 산책을 하던 아침. 겨울이 빚어내는 모노톤은 도시의 모든 색을 하나로 아우르면서, 부드러운 색과 유선형을 모두 털어버린 나목이 그려내는 앙상한 프랙털을 도드라지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 겨울 아침 풍경 속에서 날카로운 바이얼린의 속주와 그에 발맞추어 따라가는 피아노의 이중주가 와락 마음에 들어왔다. 외투의 주머니 속의 전화기에는 결혼 전에 사모은 260장의 시디가 고스란히 들어가 있었다. 문득 이작 펄만과 아쉬키나제가 젊은 시절 호흡을 맞춘  크로이쳐 소나타의 이중주에 손이 갔다. 베에토벤의 이 바이얼린 소나타는 날카로운 아내와 다독이는 남편의 합주가 이룬 부부생활을 보는 듯 하다는 매우 주관적인 감상평을 연발하며 남편이 내게 함께 듣기를 강권하던 곡이었고, 나는 못내 내켜하지 않던 곡이었다.

세상 어느 곳 보다도 분주하게 돌아가는 도시에서 맞은 영하의 아침. 사위는 얼어있고, 냉랭히 흐르는 허드슨 강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눈길을 헤치며 걷는 산책길은 바스락거리며 신경을 태워가던 일상의 광폭함과 긴장을 조용히 그리고 아주 멀리 밀어내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신경의 이완과 더불어 그 예리한  악기가 만들어내는 팽팽한 선율마져 갑자기 생겨난 마음의 여백 위에서 편안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런 아이러니라니...


또한 세상에서 가장 바쁘고 냉정한 도시라고 해도, 어느 구석쯤엔 가엔 정신을  고스란히 안정 상태로 되돌려 놓는  자애로운 공간이 하나쯤은 숨어있기도 한 것이다. 태풍의 눈 속에서 들어가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고요함 같은 안정. 눈길을 헤치고 brookfield place까지 걸어가 온갖 화려한 모양의 빵을 구워내는 프랑스식 베이커리에서 건네받았던 커피는 매우 진했고, 그 향기는 오래 기억된다. 친구의 아파트로 되돌아오기까지 40분 남짓 눈 길을 걸었던 산책길. 크로이쳐 소나타가 귓가에 머물기 시작한 영하의 겨울 아침.

친구의 거실은 쨍하고 포근한 복사열로 데워져 있었다.

출근을 완료하고 오피스에 도착한 그녀로부터의 텍스트에,

헛슨씨가 동행하는 산책길은 매우 훌륭했노라 전했다.

헛슨씨가 화해시켜준 크로이쳐 소나타.


                   © Yoon Hyunhee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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