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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Apr 24. 2016

차갑게 빛나던 대서양 은빛바다 (1)

역사의 시작 폴리머스 앞바다

케이프 코드의 6월의 아침은 맨발에 닿았던 얼음장 같았던 모래밭의 온도와 모래사장을 따라 환하게 피어있던 해당화의 붉은 빛깔로 기억된다. 한없이 깨끗하고 곱고 광활하게 넓기까지 했던 모래밭에서 맨발에 닿은 냉기에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은빛으로 빛나던 대서양. 하늘과 땅사이를 채우고 있던 것은 띠끌 한점 없을것 같던 눈이 시린청량한 대기. 그 대기를 호흡할 때 폐속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가득 차오르던  풍요로움의 느낌.

한여름으로 분류되는 6월의 대기가 이렇게 찬데, 이 땅에 처음 발을 디뎠을 300년 전 이민자들의 첫 겨울과 고단했을 하루하루가 몸서리쳐게 실감나기도 했고, 박물관으로 변한 케네디의 생가를 채우고 있던 고적함.


보스턴을 출발해, 케이프 코드에서 하룻 밤을 보내고, 다시 미국 역사의 발원지 중 하나인 폴리머스로 올라왔다. 6월의 대서양 위를 불어오는 바람은 가디건을 걸치지 않으면 한기에 몸을 떨 정도로 차거웠고, 하늘은 창백하게 푸르렀다. 대기는 청명하였으며, 햇살은 수면 위로 반짝이며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차겁게 빛나던 대서양의 은빛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애완견까지 태운 서핑보드를 띄우고 잔잔한 수면 위를 노저어 청명한 대기와 투명한 햇살 속으로 나아가는 소녀들도 몇명 눈에 뜨인다.


shallop boat. 메이플라워호가 실어온 아기 배. 짧게 정찰을 나가거나 할 때  타고 나가는 배라고 한다.  너무 예쁘다.
폴리머스 항구에 정박되어 있는 저 배는 레플리카로 20세기에  제작되었으며 메이플라워 2호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메이플라워양 전신샷. 그녀의 애기 배도 함께.



그래  이해한다 아들아. 그렇지만 너도 어느 날 문득, 모든 것이 완벽하게 평화롭고 한적한 6월의 폴리머스를 떠올리게 될 날이 올지도 몰라.


햇살 아래 단아하던 팬지꽃 무리



대서양을 마주보고 있는 미대륙의 동쪽끝 마을. 6월의 대기가 이리 서늘한데, 하물며 11월의 메사추세츠라니.... 1620년 8월, 영국 템즈강을 출발한 메이플라워호가 천신만고의 항해 끝에 보스턴과 케이프 코드의 중간 지점인 폴리머스에 도착 했을 때는 102명의 승객과 30명의 선원을 태우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네델란드로부터 온 승객들을 50여명이 함께 있었다. 그들은 애초에  스피드웰이라는 배에 탑승했던 사람들인데, 메이플라워호와 함께 출항했던 스피드웰은 여러차례 누수를 겪으면서 도중에 항해를 포기해야 했다. 애초에 배는 많은 음식과 무기를 비롯한 다양한 물자들을 비롯해, 강아지 닭과 같은 작은 가축들도 실어왔지만, 긴 항해에 음식은 바닥이 났고, 선체 역시 오랜 항해로 강한 파도에 맞아 키도 부러지고 여기 저기 누덕누덕해진 부분을 고쳐가며 행해를 완성해야 했다. 눈 덮인 들판 위로 겨울이 한창 진행중이던 11월이었다.



미니 역사 시간. 자세히 읽어 보지 않았기에 기억나지 않지만, 필그림들이 템즈강을 떠나 신세계를 향하던 당시의 정황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식민지 버지니아를 향해 먼 길을 왔으나, 배는 케이프 코트에 닻을 내렸고, 그곳에 정박한 채 입국 허가를 기다려야 했다. 이곳에 첫 발을 디딘 영국인들의 첫 해는 전혀 그들을 반기지 않았다. 네 다섯 달이 소요된 긴 항해 끝에 그들을 기다린 것은 지독한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갖가지 질병들. 그 다음 해 4월이 되어 하선이 가능해질 때 까지 이 배의 실내에 갖힌 채 신대륙에서의 첫 겨울을 나야했다. 애초에 선장은 승객들을 내려놓고 돌아갈 계획이었으나, 겨울에 발목이 잡히고, 승객들의 생존을 담보해야 했으므로 함께 남아 생존자들을 돌보았다. 살아 남은 사람은 오십 여 명.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어지러이 널려있는 생활용품들과 협소한 잠자리 앞에서 잠시 그들이 되어 보았다. 멀미가 일었다.




미래로 부터 온 관람객들을 위해 당시의 복장을 재현하고 생활을 설명하고 있는 여성인데, 1620년의 영국 영어를 알아 듣기가 쉽지 않았던 나는 경청을 포기하고 말았다.  



크리스토퍼 죤스 선장님이 생활하던 공간은 선상의 다른 공간들로 부터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었고 또 비교적 넓었다.



이 할아버지는 1620년에 머물러 계시면서 자신들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꽤나 유머러스 하신지, 미래로 부터 온 관람객들과 농담도 주고 받으신다.


이듬해 봄이 되어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순풍의 힘을 빌어 두 달 밖에 소요되지 않았다고 역사는 전한다. 4월에 폴리머스를 출발한 메이플라워호가 5월이 되어 고향에 닿았으나, 크리스토퍼 죤스 선장님은 대서양 횡단의 여파로 이듬해 돌아가시고 말았다. 1622년 프랑스 항해로부터 돌아온 후인 52세의 나이 였다. 메이플라워호와 운명을 함께 했던 선장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배는 템즈강변에 방치되어 있다가, 선박의 본채를 이루던 목재들은 분해되어 버킹험 사이어의 죠던 지방에 사는 한 농부에게 팔려 축사를 짓는데 사용되었다. 이름하여 메이플라워 반 Mayflower Barn 이라 불리는 그 축사는 아직 건재하며, 구 죠던지방의 퀘이커 묘역을 따라 위치해 있는데 이 퀘이커 묘지에는 펜실베니아를 개척했던 윌리엄 펜 역시 잠들어 있다고 한다. 한때 무성한 잎을 달고 호흡 했을 큰 나무가 잘려져 목재가 되고, 호흡 정지된 그 목재는 배로 만들어져 대서양을 건너다니다가, 역할을 바꾸어 조용한 농가의 축사로 서서 죽은자들 옆에 나란히 서 있다니. 언젠가는 영국의 죠던 지방을 방문해 메이플라워 축사를 확인해 보아야 겠다.


메이플라워호의 일생을 따라가다보니 목재의 생명은 영원한 것인가라는 엉뚱한 질문이 남는다. 남편의 회사가 몇해 전, 새로 지은 고층건물로 이사를 했다.  회사는 이 건물의 두개층을 사용하는데, 이 두개의 층을 엘리베이터가 아닌 내부에서 연결하는 모던한 디자인을 한 나무 계단이 있다. 층계와 층계사이가 뻥하니 뚤려 있는 이 계단 아래로는 해가 지면 형형색색의 조명조차 밝혀지는데,  그 계단을 이루는 나무판들은 펜실베니아의 폐쇄된 오래된 축사를 뜯어서 실어온 것이라 한다. 깨끗하고 실내 인테리어용으로  재사용해도 될 만큼 이차적인 처리를 거쳤겠지만, 그 이백년 쯤 된 묵은 나무판이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서 모습을 달리하며 사용되는 일이라니. 또 나무판의 과거를 기억하고 자랑스러워 해주는 사람들이라니.... 목재의 끝나지 않은 일대기를 또 이렇게 기록하는 일이라니. 누군가 역설했듯이 기록은 중요하다. 쓴자 영웅이라고도 했다.



환기창과 창문의 역할을 했을것으로 보이는 선체에 난 조그만 구멍은  400 미래에서 온 관람객에겐 로맨틱해 보이기도 한다.



좀 더 가까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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