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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Jan 30. 2018

언제나 그대로인 바다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 자정이 넘어 도착한 부산.

하늘과 바다가 어둠을 껴안고 하나가 된 시간.

저곳에 바다가 있음을 알게 해주는 유일한 증거는

레이스처럼 일렁이는 바다의 끝단.

포말이 생겨나고 밀려오고 부서지는 움직임에

한참이나 눈길을 던져놓다가 잠자리에 들무렵

유리벽 건너 들려오는 포말이 부서지는 소리.

벌써 잠든 거니.....

공기를 품은 파도가 모래밭을 훑어내리는 단조로운 파열음에

귀를 열고 눈을 뜬다.

파도소리는 바다의 고른 심장 박동.

멈춘 적이 없었을, 멈추지 않을 바다의 심장 박동.

파도가 만들어 내는 단조로운 밤의 녹턴을 따라 호흡이 오르내리다 잠이 들었다.


창 밖의 해운대. 저 멀리 수평선 위에 오륙도


이튿날 아침, 방을 정리하고서 커피를 마시며 친구를 기다린다. 바다 저 끝에 보이는 오륙도를 눈으로 확인하고 반가움을 느끼고 있을 즈음, 친구 또한 호텔 로비에 도착했다는 메시지. 아침 일찍 달려온 눈웃음이 예쁜 친구는 대학시절 그 모습 그대로이다.  너그러운 웃음을 자주 웃어 눈가에 생긴 주름과 살짝 힘이 빠진듯한 눈꺼풀이 그간의 세월을 느끼게 할 뿐. 옛사람들을 만나 옛 공간을 거닐다 보면, 언제나 그러하듯이 그간의 세월은 숫자로만 가늠될 뿐..... 마치 아주 긴 외출에서 돌아온 기분이다. 여전히 그대로 그 자리에 있어준 고마운 친구. 그리고 언제나 그대로인 변함없는 푸른 바다. 바다는 역시 푸른 바다. 대서양 은빛 바다와 멕시코만의 황톳빛 바다는 내가 가진 바다의 원형에서 벗어나므로, 언제나 바다가 그리웠다. 눈시리게 푸른 태평양 바다.  



이른 주말의 아침 친구와 바닷가에서 따뜻한 식사를 마치고, 햇살 환하게 부서지고 바람 상쾌한 바닷가를 거닌다. 내가 살던 동네 광안리 앞바다를 가 볼 겨를은 없었고, 포근한 해운대 바다는 눈으로만 더듬고 지나간다. 그리고 또 달맞이 언덕을 넘어 고갯길을 달려가면 나타나는 여전히 고즈넉한 송정 바다. 봄이면 벚꽃터널을 지나 나들이 다니기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그 조용한 송정 바다. 십 년 사이에 그야말로 산전 벽해를 이룬 해운대 시가지와는 달리 그곳의 해변은 이십 년 전이나 십 년 전이나 변함없이 다소곳하다. 주인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구석구석 어루만진 예쁘고 한적한 카페와 레스토랑 몇 개만 명맥을 유지할 뿐, 외지고 한적한 곳에서 딱 좋을 만큼의 세련됨과 번화함을 유지하고 있는 해변이다.  바다 위에 세운 팔각정 위에 서니 호흡을 꼴깍 삼키게 할 만큼 차갑고 매서운 바닷바람은 머리칼을 마구 흐트러트리며 사방팔방으로 날아다닌다. 무척이나 상쾌한 바람이다. 그 옛날 아이가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와서 바라보았던 그 바다 그 자리..



이야기를 더 거슬러 올라가 본다. 20대를 보낸 산속. 모교는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고, 마음 동하는 날은 산정까지 긴 산책길에 오르곤 했다. 방법은 두 가지. 자동차가 올라갈 수 있도록 닦아 놓은 정상적인 길을 걸어 오를 수도 있었고, 꼬불 꼬불 산속으로 난 붉은 솔잎이 깔린 소나무 숲길을 따라 올라가다, 거친 바위의 숲을 돌아 넘어야 하는 약간의 모험심이 필요한 거칠지만 재미있는 코스도 있었다. 주로 모험심을 요하는 코스들을 선택했었는데, 가쁜 숨을 뱉어내며 해발 800미터의 산정에 올라서면, 편안한 낡은 성곽의 돌담과 너른 평지가 우리를 맞곤 했다. 돌담을 들어서서 갑자기 평평하고 너른 평지를 만나면 왠지 좀 막막해지는 기분도 들곤 했었지만, 나는 돌담 위에 앉아 동쪽 바다를 바라보고 있기를 좋아했다. 바다에 닿기까지 거쳐야 할 지상의 그 멀고 긴 거리를 한 순간에 날아 건너뛴 시선이 도달한 곳은 시간이 잠겨있는 듯한 수평선. 눈에 가득 들어오던 수평선. 왜구가 저 멀리 함대를 이끌고 들어왔었을 무시무시한 날들을 목격하고 있었을 누군가의 입장을 상상을 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지극히 운이 좋은 나는 한반도의 모든 전쟁이 막을 내린 이후에 태어나, 맑은 날 한낮에 이 졸리는 돌담 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정지된 시간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평화로운 날의 시간은 수평선 위에 정지해 있었다.  


해 질 무렵의 바다를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면, 섬과 구름, 대기와 바다가 헷갈리는 순간이 드디어 오고는 했다. 하늘 위를 떠가는 구름인지 바다 위의 섬인지 분간이 가지 않은 몽환적인 순간들. 그런 환상적인 환영의 순간들은 지상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선물 같은 것이었다. 그 산성의 돌담에 앉아 바라보던 바다가 지금 내가 서있는 여기 어디쯤... 이 아름다운 산과 바다를 두고 나는 어디 가서 뭐 하고 있는 것인지......



바닷바람은 살을 에이는데, 종종 눈이 띄는 서퍼들은 이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파도와 함께 넘실대고 있다. 테라스를 선룸으로 개조한 카페에 앉아 복사열에 뺨을 데우며 겨울바다에서 서핑을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반가운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 물어보고 싶었다. 그대들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노느냐고... 해변의 온도는 숨이 멎을 만큼 찬데, 물속의 온도는 그에 반비례하는지 들어가서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바다에 안녕을 고하고 기차를 타러 달려가는 길. 이리 편한 마음으로 이리 밝은 시간에 광안대교를 지나기기는 처음. 저기 다리 아래로 나 살던 옛집. 오랫동안 변치 않은 수십 년 그대로인 풍경. 그러나 이제는 곧 사라지고 말 옛집과 풍경들......  바닷가 방파제로 난 긴 산책길을 걷던 저녁 시간과 해변으로 걸어가는 길을 덮은 벚꽃나무 터널. 그리고 아기가 뒤뚱뒤뚱 걸음마를 시작하던 해변의 모래밭. 그리고 또 아름다운 컨템퍼러리 전시가 이어지던 바닷가 미술관들.....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니었고 떠나야만 했던 것도 아니고 굳이 떠날 이유도 없었건만, 모든 아름다운 일상들 무척 사랑했던 풍경들을 고스란히 뒤로하고 떠날 준비를 하던 날들은 마음이 참 아팠다. 젊음의 호기심과 에너지가 태평양을 훌쩍 뛰어넘어 버렸던 그 시절. 젊은 열기는 모두 무모하다. 떠날 때 그랬던 것처럼 또 훌쩍 돌아올 수도 있는 길. 누가 돌아오지 못하게 막을 이유도 없고, 돌아오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고,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는 곳.

언제나 그대로인 바다.

고른 바다의 심장 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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