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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Nov 09. 2017

그 겨울의 베일, 콜로라도 (2)


자정이 넘어서야 첫날밤을 묵을 호텔에 도착했고, 그 밤이 어떻게 지나갔던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애초의 계획은 저녁에 넉넉하게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고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다가 다음 날 아침 스키 스쿨로 직행할 계획이었으나, 도착 시간이 예정보다 지연되었다. 곤히 자던 새벽에 갑자기 찾아온 멀미와 구토와 함께 위경련과 유사한 증상 때문에 잠이 깨었다. 가족들이 곤히 잠들어 있어서 혼자 괴로워하다가 뜨거운 차를 마셨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자리에 누워 마음을 다독이자 다행히 다시 잠으로 빠져들었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가끔 경고하는 고산병 증상의 하나 일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새벽 비행기를 타거나 컨디션이 아주 말끔하지 않은 상태에서 비행기를 탈 때도 종종 나타나는 증상이라 많이 당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급격하게 찾아오는 메타볼리즘의 터뷸런스는 정말 되도록이면 경험하고 싶지 않은 고통이다.

  


다음날, 간밤의 고생을 말끔히 잊게 해 준 찬란한 아침이 밝았고 쨍한 햇살 아래 모습을 드러낸 침엽수림은 하얀 눈을 가득 이고 또 안고 있었다. 그 생경하고 서늘한 아름다운 모습에 한참 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사진을 찍어두지 못한 아쉬움. 심히 아름다운 것을 마주한 순간이나 지극히 즐거운 순간에는 감히 카메라를 손에 들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늘을 향해 그토록 길고 뾰족하게 솟아 오른 숲의 풍경을 올려다보는 일도 생경한 일이었지만, 그렇게 뾰족한 나무들 마다 눈 코트를 입고서도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서있는 모습도 경이로웠다. 스키 코스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첫날 저녁을 묵었던 호텔로부터 30분을 더 운전해서 들어가야 했다. 대륙의 산이란 굉장한 스케일이었다.



해발 2000미터가 넘는 고지대에 자리한 베일은 유럽의 여느 스키 리조트들과 흡사한 형태로 건설되어 있고, 건물들 역시 유럽의 그것들을 많이 모방한 듯했지만, 세월의 더깨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고 유명한 관광지 특유의 번잡스러움도 묻어났다. 세계 각국에서 겨울 스포츠를 즐기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은 자국의 언어로 겨울을 즐기고 있었고, 오랜만에 쏟아지는 여러 외국어를 듣는 일은 기대하지 못했던 작은 보너스였다.


나머지 3일 밤을 보낸 호텔은 베일 마을 중앙에 위치한 꽤나 중후하고 규모가 있는 호텔이었는데, 컨시어지를 나서면 곧바로 리프트 승강장이 연결되어 스키 코스로 바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스키가 처음이기에 강습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강습을 위해서는 메인 곤돌라를 타고 산의 정중앙의 스키스쿨로 집결을 해야 했다. 호텔에서는 스키 코스 전역을 순환하는 셔틀버스를 무료로 운영하고 있었다.

  


 산의 정상에 있는 스키 스쿨에는 푸른색 유니폼을 입은 강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과의 잠깐 동안의 대화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들려주었다. 강사들의 가슴에 세겨진 네임택에는 이름과 그들의 출신지가 새겨져 있었고, 오스트레일리아, 뉴저지, 메인 등등이 내가 확인할 수 있었던 지명들이었다. 나를 도와주었던 스물을 갓 넘겼을듯한 젊은 금발의 청년은 메인주 출신이었는데 매우 다정하고도 호탕한 사람이었다. 여름에는 호주에 가서 윈드 서핑을 가르치고 겨울에는 콜로라도에 와서 스키를 가르치면서 살아간다고 하였다. 굉장한 스케일의 자연인이다... 스키스쿨 주최측과 3개월씩 계약을 하고 주최측에서 마련해 준 콘도에서 겨울을 지낸다고 하였다. 메인 출신의 젊은 스키강사와의 대화는, 몇 해 전 애팔래치아의 스모키 마운틴에서 만났던 한 무리의 젊은 자연인들에게서 느꼈던  감동과 유사한 것을 떠올리게 했다.

    

애팔래치아의 남쪽 끝, 스모키 마운틴에서 만난 세상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고자 하는 한때거리의 젊은이들이었다. 180일간 애팔래치아 산맥을 걸어서 종주하고, 여름엔 테네시 강에서 화이트 워터 래프팅을 가르치며 살아가던 젊디 젊고 구속되지 않은 영혼에서는 색다른 향기가 풍겨났다. 그들이 내뿜는 신선한 자연인의 향기는 규칙적인 일상을 유지하며 세련된 생활습관을 가진 문명인들에게서 풍겨나는 인공의 향수 냄새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거대한 대자연의 엄청난 스케일의 품 속에 안겨있을 때 그들은 아마도 반짝이며 흐르는 테네시 강 위를 사뿐히 걸어가고 있는 신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또  숲 사이를 흘러가는 한 줄기 바람에 섞여 들려오는 신의 휘파람 소리를, 문득 바람이 멎고 사위가 정적의 상태에 놓일 때는 사색에 잠긴 신의 모습을 만나는 것일 터였다. 매일매일 모습을 바꾸며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그들 앞에 나타나는 자연의 신과 동행하는 길에 무슨 걱정이 있을 수 있으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의 철학은 내게는 십분 공감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었다. 테네시 강으로 래프팅을 나가던 우리를 인도하던 대장 언니는 말괄량이 삐삐처럼 머리를 양갈래로 땋은 카리스마 넘치는 이십대 아가씨였다. 그 모습은 대학 시절 농활대를 선도하던 자연대 학생회장 언니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그 느낌이 무척이나 친숙했었다.    

  


아이들은 나이별로 삼삼 오오가 한 그룹이 되어, 각각 다른 강사에게 맡겨졌고 남편과 나도 상황은 같았다. 그러다보니 가족은 모두 산의 이 계곡 또는 저 계곡 속으로 흩어져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는 셈이었다. 남편이 속한 그룹을 이끌던 말총머리의 강사 아저씨는 뉴저지로부터 온 중국계 명선생이었다. 그는 역시나 아시안의 근성을 십분 발휘하며 over achieving, 이산 저산에 놓여있는 스키코스 전체를 샅샅이 훓고 다느니라 종강 후 집결 시간인 오후 세시가 훨씬 지나도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3일간의 코스 동안 산봉우리 하나를 마스터 한것 같았다.정상으로부터 출발점인 곤돌라 승강장까지 여러번 내려갔다 왔노라 했다.    


첫날 새벽 위경련이 있은 후 간간이 어지러움증이 찾아와 나는 안타깝게도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많았다. 주로 통나무로 지어진 거대한 건물의 이층 레스토랑에서 시간을 보냈다. 레스토랑의 실내는 따뜻하기도 했고 삼면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 산 전체의 풍경을 관망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창가 테이블에는 복사열이 따뜻하게 전해지고 있기도 했다.


그 많은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있는 붐비는 장소에 있다보면, 예외 없이 꼭 한 두 얼굴쯤 낮익은 얼굴을 마주치게 마련이다. 그 대상이 한국인이 아니어도 내 기억 속에 있는 한국의 친구들 또는 지인들과 놀라울 정도로 닮은 사람들은 꼭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이다. 재미있고도 신기한 일이다.  


옆 자리에는 할아버지 한분이 기저귀를 떼지 못했을것 같은 나이의 손자를 데리고 식사를 하고 계셨다. 발음도 제대로 영글지 않은 꼬마는 그러나 꽤 사교적이었다. 사교적이기는 할아버지도 못지 않았기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마나님과 함께 메사추세츠에서 날아오셨고, 손자는 콜로라도로부터 그리 멀리않은 어느 동네로 부터 왔다고 했다. 대륙의 동부와 중부에 떨어져 사는 그 가족은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베일에서 가족 모임을 가지는데, 그 해가 4년째 가족모임이라고... 꼬마의 아빠는 아마도 스키 미국 대표로 동계 올림픽을 출전한다고 했던것 같다. 그리고 꼬마가 걸음마를 시작할 나이가 되자 스키를 신겨서 그 날 아침도 이미 기저귀를 찬 채, 스키를 신고 산 정상에서 곤돌라 승강장까지를 몇 번인가 왕복했노라 했다. 유아의 신비여...  

그리고 아마도 내 아이들이 자라서 꾸릴 가정과 노년의 우리 부부가 갖게 될 미래상의 좋은 예를 보여준 가족이었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의 전경 사진을 호텔로부터 빌려왔습니다.


vail pass라 불리는 도로는 이름난 scenic view 를 가진 해발 2000 미터 상의 도로이고 매우 협소하다.

신나게 하루 종일 눈 밭을 구르고 돌아온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에는 예쁜 엘프와 산타클로스가 호텔의 응접실에서 우리를 맞아주었다. 젊은 엘프로 분장한 여인은 사진 찍기를 무척 즐기는 것 같았다. 직업의식이 투철한 엘프였다. 산타도 약속했던 대로 우리를 찾아오긴 했지만 특별한 선물을 준비해 오지는 않았고, 아이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가 센스가 부족했다는 생각도 든다. 산타에게 대리 전달을 부탁을 했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너무 먼 길을 왔고, 전혀 낯선 상황이었기에 미리 계획을 세울 수도 없었던 탓이다.




숲과 맞닿아 있는 호텔의 뒤쪽 야외 수영장과 자쿠지에서는 뜨거운 수증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지만 하루 종일 눈 밭에서 꽁꽁 언 몸을 녹이기에는 샤워가 더 편했다. 가족 모두 몸을 녹인 뒤, 시내 구경을 할 겸 나가서 저녁을 먹곤 했다. 작은 마을 전체가 반짝반짝 이고 있는 풍경이 겨울 내도록 지속될 것을 상상하니 참 따뜻할 것 같았지만, 실외의 인정사정없는 기온은 낭만적인 기분이 오래 지속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해발 3000m쯤 되는 로키산맥 끝자락 Vail, Colorado. 기억에 담아 돌아온 눈 덮인 겨울산의 서늘하고, 화려하고, 다양한 얼굴을 가진 풍경은 텍사스 뜨거운 여름을 버티게 해줄 양식이 되었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겨울 여행객들이 쏟아내는 다양한 언어의 홍수 속에 잠시 빠져드는 것도 여행의 색다른 재미를 더한다. 해발 3000미터로부터 고도를 낮추어 뉴 멕시코 사막을 지나 멕시코만 연안에 위치한 휴스턴 집에 도착하는데 또다시 20여 시간이 소요됐다. 휴스턴에 도착한 우리를 반기던 것은 비에 젖은 색색의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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