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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Mar 05. 2018

La Primavera Lago Vista

봄은 지독한 열기와 함께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들이닥쳤다. 거리는 아직 겨울의 회색빛에 잠겨 있고 연일 날씨 탓을 하면서 의욕상실 상태에서 헤매고 있던 즈음, 한 여름 낮 시간의 온도로 봄은 찾아들었다. 그것은 다소 폭력적이었다. 아직 어린 자목련 나무는 흐린 하늘 아래서도 농담처럼 꽃망울들을 달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만개한 자태를 들이밀었다. 자목련 아래선 해당화가 영롱한 붉은색으로 따라 웃고 있었다. 뒷걸음질치고 싶은 봄의 당도....



사이클에 더 열성을 내는 아이는 장거리 원정 경기의 목록을 만들어 두었다. 이번 주말엔 서쪽으로 세 시간을 이동해야 한다. 센트럴 텍사스의 트레비스 호숫가의 언덕에 위치한 라고 비스타라는 동네다. 봄맞이 레이스가 펼쳐지는 이곳은 오스틴을 지나 살짝 북서쪽으로 융기 지형이다. 산이라기엔 쑥스럽지만 평지보다는 많이 높은 지형이고, 이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체조 선수의 손끝에서 휘몰아치는 리본을 연상케 하는 강의 흐름을 따라 난 비슷한 모양새를 가진 도로를 달려야 하니..... 나는 은근히 신이 났다.

 

토요일 새벽 세시 반, 아이는 내게 와서 늦어도 오십 분 후에는 출발해야 할 거라고 소곤거리고 나갔다. 오십 분 후, 우리는 언제 잠을 자기라도 했었냐는 듯한 말짱한 얼굴로 출발했다. 낮게 깔리는 새벽안개를 고속도로 곳곳에서 마주친다. 내가 달리는 속도 때문에 안개가 어둠 속에서 흰파도처럼 너울거리며 나를 덮쳐올 때는 무섭기도 하다. 안개가 짙어질 때는 70마일로 달리던 속도를 40마일까지 낮추어야 했다. 엉금엉금 기면서 안갯속을 빠져나가기를 기다리는 동안 엉금거리는 차의 속도에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부드러운 아스팔트가 새로 깔린 오스틴 입구까지, 평지의 질주를 마치고 힐 카운티에 도착하자 새벽 여명이 밝아왔고, 환한 빛 속에서 구불구불 경사진 도로를 따라 고원지대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고원으로 올라가는 길은 어두운 밤에는 절대 운전할 수 없을 것 같은 스릴 넘치는 드라이브였다. 호흡을 멎게 하는 엄청난 경사와 오르막 내리막이 마구 휘몰아치는 이런 도로에서 자전거 레이스를 해야 하다니... 진심인 거니? 아이에게 물었다. 한참 스스로를 몰아부며 마구 성장 중인 아이는 경사지형이 가진 매력에 금방 사로잡힌 듯했다.



Lago Vista, 동네의 경관에 딱 어울리는 예쁜 이름이다. 영어로 그대로 옮기자면 lake view 또는 waterfront 또는 Town on the lake 정도가 되겠지.... 한 단어로 똑떨어지는 지명이 대부분이지만, 지형을 설명해주는 긴 이름을 가진 옛스런 동네는 왠지 정겹다. 예를 들면, Niagara on the lake라든가 Manchester by the sea 같은... 그러나 라고 비스타도 예쁜 이름이다. 더욱이 이번 레이스의 이름은 무척이나 시적이고 환하다.

La Primavera Lago Vista라니...

라고 비스타의 아침 빛은 은은하고도 아스라했다. 색보정을 전혀 가하지 않은 자연 상태의 아침 빛. 해가 완전해진 아침. 저 중앙분리대 역할을 하는 늠름한 나무를 지나 이천미터쯤 오르막을 올라 가면 출발선이 있다.


사진을 찍을 줄은 알지만 조작에는 능하지 못한 터라, 어떤 친구분이 원본에 조작을 가하여 보내주신 아이의 경기 사진은 재미있다.


https://youtu.be/vG6pEBU6ds8


아이가 레이스를 펼치는 두 시간 동안, 언덕 아래 동네를 드라이브했다. 낯선 동네이기도 했으려니와 길이란 길은 모두 숲 속의 오솔길이라 평지의 도시 위를 돌아다니는 것과는 매우 다른 기분이 든다. 어디가 어딘지 모를 고원의 숲 속 길을 느긋한 마음으로 천천히 드라이브하는 동안 사방에서 스며드는 아침의 숲 냄새와 새소리가 마음에 잦아든다. 다소곳하고 조용한 봄날의 아침이 깨어나고 있는 이 곳은 에드워드 플래토우.... 에드워드 고원이었다. 고원의 아침은 폭력적인 열기로 마구 다그쳐 들어오는 휴스턴의 이번 봄과는 완연히 다른 것이었다.



레지던스인지 리조트인지 감이 잡히지 않게 현실과 동떨어진 분위기를 풍기던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는 언덕길을 한참 내려와 트레비스 호수에 면해 있다. 조용한 아침의 거리를 산책하는 생명체라고는 흰 꼬리를 가진 사슴들만 눈에 띄었다. 혼자서 또는 가족 단위로 어슬렁대며 아침 산책을 즐기고 있는 녀석들은 차를 멈추고 사진 찍는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어서 찍고 가라는 듯 포즈를 취해주기도 한다. 에드워드 고원은 흰 꼬리를 가진 사슴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서식하는 동네로 알려져 있다.  


정오가 지나 레이스는 막을 내렸고, 레이스를 마친 아이는 상당히 고무된 기분으로 라고 비스타를 떠나기 싫어하는 눈치다. 주말 새벽 세시부터 일어나 경기를 펼친 아이를 격려하고자, 트래비스 호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오아시스라는 이름난 음식점으로 데리고 갔다. 도로의 양쪽으로 거대한 단층을 드러낸 암석 지대가 유려하게 솟아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단정한 도로를 지나고, 도로가 눈 앞에 직립해 있는듯한 급경사를 올라가기도 하면서 오아시스에 도착했다.



처음 대면한 트래비스 호수의 전경은 십 년 만에 처음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아이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줄 곧 보이스카웃을 하면서 일 년에 네 번씩은 꼭 캠핑을 다녔다. 캠핑지의 목록에는 이름난 호수나 주립공원들은 대부분 들어있기에, 나는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도 내게 가르쳐 주지 않은 오아시스가 있었음을....


거대한 오아시스의 건물은 오르막 길의 아래에서도 한눈에 띄었다. 산 중턱에 놓인 건물이 눈에 들어오자, 어린 시절 흥얼거리던 오아시스라는 노래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들국화에서 기타를 치시던 최성원 씨가 젊은 시절 만든 노래였는데, 고등학교 때 쉬는 시간에 혼자 흥얼거리곤 하던 노래다. 오아시스를 부르던 시절을 지나서 제주도의 푸른 밤을 부르시곤 정말로 제주도로 낙향을 하셨는데, 아마도 현재 한국에 부는 제주도 열풍의 선두주자가 최성원 씨였을 것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닐 듯...


 



이 땅이 무척 광활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지만, 십 년이 지나서야 발견하는 이런 거대한 강과 호수와 산이 어우러지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 있다는 사실은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탐험할 곳은 아직 넓으니, 정신을 차리고 방심은 금물. 부모보다 훨씬 낙천적이고 적극적으로 조금씩 자신의 영토를 넓혀가는 아이는 무척이나 광대한 스케일로 흥미롭고 다이내믹한 인생을 살 것이다. 여전히 아기 같은 얼굴로 이제는 엄마를 리드하는 아이...


https://youtu.be/ll4-hoOyYh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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