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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Jun 12. 2019

boy brain- girl brain

저녁 준비를 하려는데, 큰 녀석은 지금 먹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엄마. 누구랑?

아들. 나피사랑.....

엄마........ 이미 먹었다고?.... 정말? 머리를 그 꼴을 하고서? 정말 실화냐?

아들. 응, 나피사도 도서관에서 책 읽다가 와서 엉망이긴 마찬가지였어... 괜찮아...

엄마.. 그럴리가 아들아..


니 꼴이 어떤지, 제임스 휘슬러가 젊은 날 제멋대로인 포즈로 찍은 사진을 찾아보라고 하자, 전화기에서 검색을 마친 아이는 깔깔 웃으며 it makes sense.  하더니 자기는 제 꼴이 오스카 와일드 같다고 생각했다며 큭큭거렸다. 지가 삼손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그 훤한 얼굴을 마구자란 헝클어트린 머리로 다 가리고 다닌다. 며칠 후 큰 녀석의 친구 예쁜이가 잠시 집에 들렀다. 서머 인턴쉽을 위해 이번 주말에 인도로 떠나는 그 아이에게 비행기에서 읽으라고 줌파 라히리의 책 두 권을 주었다. 자신의 문화적 배경과 자라온 이야기도 공감할 부분이 많을 것 같았다. 예쁜 친구는 프린스턴에서 international development를 공부한다. 알파걸이지만, 미국애들 같지 않게 배려가 깊고 우리 세대가 그 나이 때 가졌던 행동 코드와 비슷한 면을 살짝 비추기도 해서 내가 아끼는 큰 아이의 여자 동기다.


아이들이 시니어이던 지난해 봄, 내가 외출한 사이에 다른 친구들과 함께 우리 집에 놀러 와 있던 그 아이와 마주쳐 잠시 수다를 떨었던 것이 첫 만남이었다. 내가 작은 녀석의 활동을 돕느라 바빴던 어느 날은 교육청 주관으로 어워드 나잇이 있었다. 나 대신 간 남편은 큰 녀석과 친구들의 단체 사진을 찍어주고 나서는, 그중에 제니퍼 코넬리가 있다고 신나 하며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once upon a time in america에 나오던 그 어린 제니퍼 코넬리 말이다. 미국 내려와서 몇 년간은 매해 꼭 한 번씩은 이 영화를 보곤 했다. 영민해 보이고 조막만 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자신감 넘치는 포즈를 하고 있는 여자 아이가 녀석의 옆에 서있긴 했지만, 제니퍼 코넬리라니....  제니퍼 코넬리를 향한 어떤 중년의 팬심은 아직도 식을 줄을 모르는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어쨌거나 우리끼리는 그 아이를 제니퍼 코넬리라고 부르고 있는데, 지난겨울방학 잠시 휴스턴에 돌아왔을 때, 놀랍게도 내게 인사를 하러 들러주었다. 평범한 여느 저녁이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큰 녀석이 내 방 문을 열고 예쁜이가 엄마한테 인사하러 왔다고 알렸다. 그 순간, 저렇게 로봇 같은 녀석을 아직도 만나주다니, 제니퍼 코넬리는 꽤 괜찮은 아이구나. 자주 본 것도 아닌 나한테까지 인사를 하러 오다니 속이 깊은 아이로군.. 하면서 짧은 환대의 시간을 가졌다. 후드에 털이 달린 새빨간 코트를 입고 현관에 들어선 그 아이의 그림같이 예쁜 모습은 동부의 겨울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이 동네에선 겨울이라고 후드에 털이 달린 코트를 입는 여자 아이는 없다. 따뜻한 동네니까...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 싶다고 해서 그림을 보여주고 서재로 옮겨 차를 마셨다. 학년 전체가 700명밖에 안된다는 그 아이의 학교 생활 이야기를 듣다가, 마침 프린스턴 출신 게임이론을 제안한 수학자 존 내쉬의 이야기로 옮겨갔고, 존 내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보았느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제니퍼 코넬리가 부인으로 출연했었다는 이야기 끝에 '너 혹시 알고 있니? 우리 집에서는 너를 제니퍼 코넬리라고 부른다는 걸....'이라고 말해주고 말았다. 아이들은 제니퍼 코넬리가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세대라, 잠시만요 한번 찾아볼게요. 하고 전화기를 꺼냈다. 제니퍼는 몇 초간 말을 잇지 못했고, 우리는 곧 지붕이 무너지도록 웃었다. 큰 녀석은 서재 건너 다이닝 룸에 멀뚱하니 서서 우리가 자지러지는 소리를 못 들은 채 하고 있었다. 그 후 아이들은 가끔 만나서 서로의 레쥬메와 에세이를 읽어주는 등 여름 인턴쉽 준비로 짧은 방학을 다 보냈다. 각자가 계획했던 대로 큰 아이는 제가 자란 도시로 돌아왔고, 제니퍼는 부모님들의 고향 인도로 돌아가서 여름을 보내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니어 때, 학교에는 1500 club과 1400 club, 1300 club이 뚜렷하게 구분되었다고 큰 녀석은 전해주었다. SAT 점수를 말한다. 제니퍼 코넬리와 수영팀의 동기를 비롯해 아이비를 간 아이들은 의외로 1400 club에 속해 있었고, 우리 집의 자칭 오스카 와일드를 비롯한 1500 club에 속한 아이들은 오히려 세상을 향한 야망이 뭐예요? 하는 백지 같은 철부지 들이라 각자가 원하는 엔지니어링과 순수과학 쪽으로 지원해 갔다. 1300 club은 오스틴과 칼리지 스테이션에 있는 주립대학으로 몰려들갔다.   


 India chamber of commerce에서 첫 인턴을 하게 된 그 아이는 걱정 반 기대 반인 감흥을 전해왔다. 다음 해 여름엔 워싱턴 디시에 있는 유엔 산하 공중 보건국으로 갈 계획임도 알려왔다. 짧았지만 재미있었던 대화의 주제들은 대학 초년생에게 있어 글쓰기의 어려움과 졸업논문 계획.- 아카데믹 라이팅에 대해서는 내가 조금 가르져 줄 것이 있어 즐거웠다-. 프린스턴은 150 페이지 짜리 학부 졸업 논문을 써야 하는데, 이런저런 방향으로 주제를 생각하고 있노라고... 요즘 읽고 있는 책은 무엇이며, 벵갈계 미국 소설가가 다루는 주제들이며, 모녀간의 다이내믹, 모자간의 다이내믹, 언어와 정체성의 문제며, interdiciplinary의 문제들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던 끝에, creativity is all about connectivity란 명제에 동의했다. 이 아이와 이야기할 때는 둘 다 목소리가 10 데시벨 정도, 웃음소리는 30 데시벨 정도 더 커진다. 여자아이란 이렇게나 재미있고 따뜻하다. man brain의 전형인 아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재미는 있지만, 목청 높여 웃을 이야깃거리는 없는 셈이다.  


예쁜 친구는 나의 로봇 같은 아들과 대화했던 내용을 나한테 곧잘 전해주는데, 우리는 웃겨서 데굴데굴 구르곤 한다. 그런 이야기 중 하나는, 이 친구가 가진 사회적 친화력과 토론 때의 선명한 논리와 주장성 때문에 큰 녀석은 이 친구를 힐러리 클린턴이라고 부르곤 했다는 것이다. 논리가 분명하고 열정이 좀 넘치기로서니 이 아이를 사악한 힐러리에 비교하다니. 바보다..
두 번째는 얼마 전에 편지로 그 일을 사과했다는 것이다. 아이들 말로 대박사건이다. 그 아이는 “와~~ 이 녀석도  감정이 있구나!!! “ 나는 “와~ 로봇이 그런 편지를? “
세 번째는, 지난겨울 이 친구와 내가 서재에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 아들 녀석이  멀찍이 떨어져 있던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 I can’t handle you and my mom both in the same room.” 둘 다 웃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힐러리 클린턴이 둘씩이나 한방에 있으니 그 녀석이 얼마나 마음이 어려웠을까.... 음... 그래 동원이는 영락없는 boy brain이야. 엔지니어, 공돌이 마인드니 우리가 이해하자...라고 이야기를 끝맺었다.  

여자와 남자 사이의 거리는 이렇게나 멀고, 서로에게 이렇게나 이질적인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겠거니. 제니퍼 코넬리가 인도로부터 흥미로운 소식을 전해왔으면 좋겠다. 이 착하고 열정적인 아이들이 세상을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드는 좋은 조력자들로 자라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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