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쉬는 대리석 -숨통
대리석은 시간의 퇴적과 물리적 압력이 만들어 낸 결정체다. 둥근 공모양으로 다듬어진 대리석은 매끄럽기 그지 없고, 사람의 온기를 빠르게 흡수한다. 박은선 조각가는 완벽한 구조적 균형을 이룬 조각에 균열을 일으키고, 균열을 통해 돌에 호흡을 불어 넣는다. 본인이 숨을 쉬고 싶어 돌에 숨통을 틔웠다는 작가의 설명은 외따로 떨어져 작업을 해온 그의 지난 25년 세월을 함축하고 있는듯 하다. 작품이 이끌어내는 보편적 공감에 더해 작가에 대한 주관적 공감이 깊어진다. 균열은 흔들림과 깨짐에 머무르지 않고 다음 상태로 나가기 위한 모색 임을 잊지 않는다. 균열의 축적이 균형으로 진행되어 기하학적 형태를 완성하고 패턴과 방향성을 갖는 그의 작품은 우리의 삶의 행보를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다. 삶이란 결국 균형과 균열의 이중주가 빚어내는 시간의 선형적인 진행이다. “각 존재가 현재의 상태를 버텨내기 위한 노력이 바로 존재의 정수”이며 이를 코나투스를 정의했던 스피노자의 말을 빌면, 박은선 작가가 돌에 세긴 숨통은 그 자신의 코나투스이며, 인류 보편의 코나투스의 상징이다. 균열과 균형이 반복되며 빚어낸 그의 작품은 삶의 명확한 은유가 아닐까. 그의 조각 작품들이 품고 있는 동력과 방향성을 갖는 추진력 또한 매력적이다. 숨통이 트인 둥근 조각들은 발아를 직전의 크랙이 난 씨앗을 연상시킨다. 갤러리 입구에 서 있는 두 가지 색채로 짜여진 10미터짜리 대리석 조각 두 개가 전시회의 분위기를 압도적으로 드러낸다.
작가가 가주하는 도시의 이름은 성스러운 돌이라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의 “피에트라산타”. 도시의 이름에서 작가가 왜 그곳을 거처로 정했는지 알 수 있다. 미켈란젤로와 이름난 역사적인 조각가들이 작업했던 곳이다. 박은선 작가는 2018년 조각가에게 부여하는 권위있는 상을 수상하고 이탈리아 피사와 피렌체 공항에서도 그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지난 해에는 아트 페어가 있었던 부산 벡스코와 서울의 국립현대 미술관에서도 전시가 개최 되었다. 17년 전, 전시가 없는 날의 벡스코 거대하고 조용한 실내에서는 돌 지난 아들이 걸음마를 연습하곤 했기에 그 곳에서의 전시소식은 더욱 반가웠다. 벡스코와 맞은편의 시립 미술관을 내집처럼 드나들던 시절, 그곳에는 세계각국으로부터 온 컨템퍼러리 전시회가 자주 개최되었다. 한국의 미술사가 한정적인 덕분에 한국에선 컨템퍼러리 미술에 대한 요구가 미국이나 캐나다보다는 훨씬 발달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발한 사고와 미학적 관점의 다양성을 보여주던 뛰어난 현대미술이 전세계로부터 부산의 바닷가 미술관과 숱한 갤러리로 모여들었던 것이 20년 전부터의 일이다. 그러고 보면, 대리석의 본산 “성스러운 돌의 도시”에서 쾌거를 이루어 낸 박은선 작가가 벡스코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일 것이다. 작가를 후원하는 분들이 부산에 계시고 작가가 남다른 애착을 가지신 도시라 대화가 길어졌다. 부산의 시립 미술관은 숨은 보석 같은 곳이다. 큐레이터의 안목이 뛰어나고 전시의 선진성과 화려함에 비해 인파가 북적이지 않고 늘 조용한 그 공간이 나는 참 좋았다.
조각전 리셉션이 있던 오후 하이웨이에 오르자 느닷없는 비바람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도심의 거리에는 스틸로 만들어진 맨홀의 뚜껑이 물을 튕겨내며 열렸다 닫히는 신기를 연출할 정도로 비바람은 거셌지만, 리셉션이 시작되자 언제그랬냐는듯 사방은 잠잠해졌다.
뉴욕에서도 작가에게 전시 요청이 여러번 왔었지만 통크고 시원시원한 휴스턴의 Art of the world gallery의 초청으로 미국 진출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는 이번 전시는 여러모로 반갑고 뜻깊은 자리였다. 소수의 예술가와 세상에 널린 예술가연 하는 사람들 중에는 대중과 거리두기를 예술적 전략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예술가로서의 사회적 소명에 충실하고 열린 마음과 대중친화적 태도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박은선 조각가는 후자였고, 작품과 삶이 괴리되지 않고 일체를 이루어 예술세계가 더욱 빛나는 작가다. 진솔하고 가식없는 작가의 인품이 존경스러웠다. 여름 방학 기간이라 가족들 모두 동행해 리셉션에 참석했던 점도 인상깊었다. 가족 모두 한국 전통 소재의 흰 드레스와 상의로 통일해 가족들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고 가족애가 느껴져 무척이나 보기 좋았다. 작가님도 가족들도 무척이나 소탈하시고 열린 마음의 소유자들이어서 작품 감상은 물론 작가와의 art talk 역시 매우 진지하고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이탈리아에서 로봇 공학을 전공하는 큰 아드님은 작가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영어 통역을 담당하며 자리를 지켰고, 젊음의 전형인 적극성과 우주로부터 해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호기심으로 똘똘 뭉쳐진 청년이었다. 전세계 거리 곳곳에서 박은선 작가의 조각품을 만나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현대적 대리석 조각에 무대를 양보하고 갤러리 귀퉁이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두 명의 경찰인형과 갤러리 이층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수영복 입은 여인도 인상적이었다. 극사실주의 조소도 유행인 모양인듯, 두어해 전에는 론 무엑의 너무나도 사실적인 거대한 인형들이 이곳을 휩쓸고 한국까지 상륙했었다. 크기마져 사실적인 경찰관은 론 무엑의 작품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