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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Oct 11. 2019

비엔나 산책- 레오폴드 미술관, 그리고 심야 식당들

클림트와 에곤 쉴레


자신만만하게 굽이치는 낙타의 율동을 따르면 피와 더불어 영혼도 그렇게 된다. 서양의 명석하고 빈틈없는 이성에 의해 모욕적으로 토막토막 잘라진 기하학적 구분에서 시간이 스스로 해방된다 <사막의 배>가 흔들거리는 이곳에서라면 시간이 수학적이고 단단히 구분된 폐쇄로부터 풀려 나와 나누어지지 않는 액체이고 가벼우며 사상을 환상과 음악으로 바꿔놓는 어지러운 도취가 되어 하나의 실체를 이룬다. <카잔차키스 > report to greco 357p.


카잔차키스가 낙타의 율동에 몸을 맡기고 사막을 건너는 동안 인간의 이성이 인위적으로 나누어 놓은 시간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듯이, 2019년 10월의 나는 뜨거운 햇살이 여전히 내려쬐는 일상의 공간을 떠나 유럽의 내륙 깊숙한 곳에 머무르는 동안 시간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인간의 이성에 의해 토막토막 잘라진 시간은 익숙해 있던 일상의 시간보다 비엔나에선 한나절이나 앞당겨졌다. 유럽의 천년 역사가 생생히 숨 쉬고 있는 도시를 산책하다 보면, 그야말로 시간은 나누어지지 않는 가벼운 액체가 되고 도취가 되어 하나의 실체를 이루곤 했다. 아침엔 일찍 시내로 나가 미술관과 공원을 산책하고 우리의 몸이 익숙해 있는 시간에 따라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이른 오후가 되면 호텔로 돌아와 낮잠을 잤다. 그리고 해지기 전에 일어나 다시 거리를 산책하고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심야식당을 찾아다녔다.  




시청사 앞에 있는 호텔을 걸어 나와 시청 앞의 큰 정원을 가로지르는 산책을 했다. 여름이었다면 한밤의 음악회가 진행되고 있었을 공간에 호젓한 산책객들만 저녁 공기를 즐기고 있었다. 정원에는 장미 나무를 끝없이 길게 나란히 줄 세워 심어 놓았는데, 각각의 나무에 이름표를 달아놓았다. 장미의 이름 또한 사람의 이름만큼이나 다양하고 많다. 계량에 계량을 거듭해 나가며 원예사가 이름을 붙여가니, 장미를 계량하는 원예사들에게는 새로 탄생한 장미가 자식이나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래서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는 것일 게다. 장미의 이름은 영화배우 이름을 따기도 하고 유명인사들의 이름을 따기도 한다. 호프 버그 왕궁의 일부인 국립 도서관을 돌아, 길을 건너 미술사 박물관과 자연사 박물관의 중앙에 딱 버티고 계신 마리아 테리지아를 알현했다. 25년 전의 영화 before sunrise에서는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그 동상 아래 누워 새벽을 맞았다. 아무리 젊은 그들이었다지만 그 차가운 돌바닥에 잠시라도 누워있을 수 있었던 것은 영화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 차가운 돌바닥에 어떻게 눕나....


마리아 테레지아를 둘러싼 왕위 계승 전쟁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사방을 둘러싼 적들의 무시무시한 도전을 물리치고 어렵게 계승한 왕위가 헛되지 않게, 지혜와 용기로 신성로마 제국을 통치했던 왕후이자 오스트리아 제국 최초의 여왕이었던 테레지아 여왕은 당시 유럽 최고의 미녀로 칭송받기까지 했는데, 남아있는 그녀의 젊은 시절 초상화가 얼마만큼 진실일지 모르겠지만, 틴에이지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야말로 만화 주인공의 외모를 하고 있긴 했다.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왔던 로트링겐 공국의 프란츠 슈테판과 사랑에 빠졌던 그녀는 제국의 왕위 계승녀 신분으로 권력 확장을 위한 정략 결혼이 아니라, 로트링겐을 포기하기까지 하며 무려 연애결혼을 성사시킨다. 여왕이 미래의 남편에게 보낸 라틴어와 불어로 쓴 편지가 현재까지 남아있다고 하니,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보고 싶어 진다. 제위 기간이 1717-1780년인데 이 시기에 무려 전국에 초등학교를 설치하고 동일한 교과 과정을 광활했던 영토만큼이나 다양했던 지역어로 편성해서 국민을 교육하고 지적 수준을 향상했다고 하니.... 한 세기 후인 19세기 비엔나에서 프로이트,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건축과 예술 등 각계 각층에서 지성의 폭발적 분출이 일고 비엔나 대학에서 자연과학 연구의 혁명적인 진화가 일어났던 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영국에서 근대적 국민교육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초등교육-이 시작된 것도 1870년 무렵이고, 프랑스는 1879년이 되어서야 근대적인 국민교육제도의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에 비하면 오스트리아의 국민에 대한 근대적 공교육이 시작된 것은 무려 한 세기 이상 앞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학교에서 한번쯤 단체로 해본 경험이 있는 지능검사인 스텐포드-비네 검사가 프랑스에서 개발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학생들의 능력에 적절한 교과과정 배치를 위해 프랑스 교육부에서는 알프레드 비네라는 프랑스의 심리학자에게 능력-선별 검사를 개발할 것을 부탁했고, 프랑스에서 사용되던 지능 검사를 미국의 스텐포드 대학팀이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 바로 우리가 초등학교 저학년때 한번쯤 해보았던 지능검사이다. 물론 현대의 임상심리학 현장에서 사용하는 웩슬러 지능검사나 우드칵-존슨 같은 경우는 검사자와 내담자가 일대 일로 마주 앉아 행하는 것으로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이 소요되는 정밀 지능 검사이지만, 간략하게 단체로 진행하는 검사로는 스텐포드-비네 검사가 사용된다. 한국의 교육 현장에서 아직도 스텐포드-비네가 사용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정부에 의한 근대적 국민교육이 제도적으로 도입되지 않았던 시절, 아동의 육아와 교육이 오로지 부모의 몫이었던 시절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하층계급의 아동이 처한 열악했던 사회적 환경은 올리버 트위스트와 같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 등에서 어렴풋이 엿볼 수 있다. 조선의 근대 교육은 1894년 갑오경장을 전후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설립한 미션스쿨과 사학을 주축으로 일기 시작했으며 정부가 주도하는 초등 교육의 관제가 마련된 것은 1895년의 일이었다. 1895년 소학교령을 제정하여 1905년 을사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서울에 10개, 지방에 50개의 소학교가 개설되었다.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본격적인 초등교육이 시작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진행되었다.


여왕은 또한 무차별적 징병제를 실시하여 농민 출신의 군인들에게도 월급을 지급함으로써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동시에 민간의 생활을 안정시켰다. 제국의 생사가 걸린 복잡한 외교적 경쟁과 혈투 속에서 살아남은 강한 여왕이라 강한 국가 강한 국민들을 만들 수 있었나 보다. 동시대 조선의 영조는 양민들의 세금을 반으로 줄이고, 종모법을 실시하고 쌀 1 3섬과 노비의 신분을 교환할 수 있게 하여 17세기 숙종실록에 의하면 전체 인구의 30-40%에 달하던 노비의 수를 10% 이하로 줄였다고 하니, 18세기는 조선에도 긍정적 서광이 비치던 시기였던 것 같다. 이어 1801년 정순황후가 66000면의 공노비를 해방시키는 것으로 시작하여 1894년 갑오경장에 이르러서야 노비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전국민에 대한 근대교육을 -읽고 쓰고 덧셈 뺄셈-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노비제도를 폐지했다.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지난 백년간의 교육 역사와 계급제도의 변화를 서양의 그것과 비교할 때, 현재의 한국의 입시제도를 둘러싼 전 국민적 통증의 원인에 관한 일말의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결혼 후에 남편과의 사이에 열여섯이나 되는 자녀를 낳을 정도로 화목했으나 많은 아이들이 천연두로 요절했고, 프랑스로 시집간 막내딸은 혁명의 제물로 바쳐지는 아픔을 겪었던 어머니이기도 하다. 예나 지금이나 혁명은 선전선동을 위한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바, 주변 국가들로부터의 외교적 이간질과 성난 민심의 타깃이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앙뜨와네뜨에게는 온갖 음해와 사실이 아닌 이야기들이 덧씌워졌다. 어떤 종류이건 혁명은 앙뜨와네뜨들을 필요로 하는 듯, 앙뜨와네뜨들에게 덧씌워졌던 수많은 거짓말과 음해는 지금이라도 정정이 되고 사면 복권이 되어야 한다. 여성 제후를 상상할 수 없던 시대에 남성 군주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지력과 용기로 한 세상을 헤쳐나갔던 오스트리아의 아이콘 테레지아 여왕은 꽃동산에 둘러싸여 근엄한 자세로 앉아 비엔나 거리를 오가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오늘도 내려다보고 있다.  


 

여왕을 알현하고 길을 건너 뮤지엄 쿼터로 향했다.  첫날밤의 산책길에서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작품들을 모아놓은 레오폴드 뮤지엄의 심야 연장 개관을 열심히 관람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이마에 뮤지엄 쿼터라고 세긴 바로크식 건물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미니멀리즘의 외관을 한 검은색 mumok 현대 미술관이, 왼쪽에는 일체의 장식이 배재된 밋밋하기 그지없는 아돌프 로스를 연상시키는 사각형의 레오폴드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클림트, 에곤 쉴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는 레오폴드 미술관은 규모면에서는 비교가 안되지만 내용으로 치자면 프랑스의 오르세에 견줄 수 있을 것 같다. 호프 버그 왕궁 본관인 미술사 박물관의 미술품 소장 정도는 루브르에 견줄 수 있을 것 같다. 일곱 시에 레오폴드 미술관에 입장을 해서 아홉 시가 넘어 문이 닫기 직전에 나왔다. 쉴레가 꽈리를 배경으오 한 자화상과 세트로 그린 발리의 초상에서 두 연인들의 눈은 말할 수 없이 영롱하고 투명하다. 쉴레가 그린 인물화들은 퇴폐미와 불안한 감정 가득하기는 하지만, 그가 그린 사람들의 눈동자는 얼마나 투명하고 아름다운지... 해부학 책을 연상시킬 만큼 섬세한 손과 발은 얼마나 정성이 가득한지... egoist에다 오만방자한 젊은 쉴레가 살아 돌아온다 해도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야의 미술관은 관람객들이 없다시피 해 좋다. 에곤 쉴레를 보면 떠오르는 사람은 화가가 되기를 원했으나 실패했던 히틀러. 에곤 쉴레가 비엔나 예술학교에 합격한 그 해 히틀러 역시 시험을 보았지만 불합격했다. 히틀러는 두 해 연속 미술학교에 불합격하고선 다른 방향을 모색했고,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1차 대전 참전 후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히틀러가 제국주의의 야망을 키우기 시작하며 연설을 했던 바로 그 의회 건물 앞을 지나며 만약 그때 비엔나 예술학교가 히틀러의 입학을 허가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세기말의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예술과 건축, 사상가들이 결집해 있던 장소로 새로운 세상을 향한 갖가지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제국은 운명을 다했고 낡은 제도와 사회를 개혁하겠다는 젊은 천재들과, 사상가들, 정치가들.. 마르크스와 레닌과 조금 더 지나서는 히틀러에 이르기까지 혁신적이고 위험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교류하고 있었고, 각자가 생각하는 이상 세계를 향한 진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쉴레의 작품들은 발리와 세트로 맞춰 그린 저 초상화 말고는 죄다 무척 크기가 컸고 또 강렬했다. 쉴레는 사람, 나무, 집만 그렸기 때문에 참 공교롭다 싶으면서도 웃음이 난다. 한국에서는 심리검사나 심리치료 첫 세션에서 내담자에게 집, 나무, 사람을 그려보게 하면서 시작하곤 한다. 표준점수와 계량화된 수치로만 개인의 내적 상태와 심리적 특징을 이야기하는 미국의 심리학 현장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방법이지만, 애초에는 이곳에서도 사용했을 방법이다. 사람과 나무 그림에 반영된 내담자의 자아상과 집에 반영된 환경에 대한 인식 등을 알아보기 위한 일종의 투사검사인데, 그림에 대한 해석은 전적으로 심리학자의 앎의 깊이와 직관에 달려있다. 어린 내담자들은 정확하고도 솔직하게 자신의 욕구와 불만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경우가 많고, 성인들의 경우에도 그들이 가진 병증의 속성에 대한 대략적인 가늠을 해 볼 수 있는 간단하고 좋은 지표가 된다. 표준화된 심리검사가 객관식 시험지 같은 것이라면 투사검사는 일종의 주관식 시험 같은 것이다. 주관식은 때로는 모호하고 때로는 너무 빤하다. 실레의 나무들은 모두 겨울나무이거나 겨울을 향해 가는 계절 속에 서 있다. 회백색을 배경으로 그가 그린 겨울나무 한 그루는 거의 추상화에 가깝다. 쉴레의 집 그림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그림... 남루한 집 한가운데 걸려있는 가족의 빨래에 주어진 하이라이트. 그리고 너무나 현대적인 텍스쳐와 배경색... 이 그림이 어찌 100년 전의 그림이란 말인가...    

비엔나의 레오폴드 미술관과 맨해튼의 현대 미술관은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 클림트가 비엔나 대학 의대, 철학과, 역사학과 건물 벽화를 주문받은 것이 1896년인데, 아래와 같이 이따위로 그려놨다. 당연히 거절당했고, 굉장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10년쯤 지나서는 이 그림을 시작하면서 받은 계약금을 교육부에 다 돌려주었다고 한다. 첫 번째 그림이 철학과 건물, 두 번째 그림이 사학과, 세 번째가 의대 건물을 위해 그린 그림이다. 어떤 철학의 여신이 저렇게 얼굴을 머리칼로 휘감고 눈만 내놓고 저런 괴기스러운 눈빛으로 위를 훔쳐다 보고 있나..... 부적절 부적절... 이런 그림을 대학 벽에 학문의 상징으로 걸겠다는 클림트의 이런 배짱과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지 궁금하다. 개인적인 편견으로는, 클림트의 그림은 풍경화만 아름답다. 그가 그린 여인들의 초상화도 얼어붙어있는 자세 같아 부자연스럽고 과하게 장식적인 데다가, 여러 가지 세포와 생명의 씨앗들을 복잡하게 그려 넣은 것이 많고,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그림들은 귀신같은 형상을 그린 것들도 많아 혼자 보기 무섭다. 이른바 당시의 비엔나의 지성들이 몰두해 있던 삶과 죽음의 문제 - 리비도와 타나토스에 관한 상징들을 클림트 식으로 표현한 것인데, 역시 오늘 봐도 무섭기는 마찬가지다. 눈동자가 없는 몬드리안의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열 시가 넘은 시간에 호텔에 돌아와 프런트 데스크의 직원에게 물었더니 다행히 그 시간에도 문을 연 바나 레스토랑들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Trilogie라는 그리스 레스토랑을 찾았는데, 멋진 실내 인테리어에 촛불과 장미가 놓인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다. 무척 붐비는 분위기였지만, 바로 옆 테이블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비엔나의 사람들은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옆 사람들의 대화가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간단한 야채를 튀긴 안주에 와인을 한잔 마셨다. 둘째 날은 오전에 벨베데레를 들렀다가 화려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현재는 소박해진 정원을 산책하고 돌아와 낮잠을 자고, 저녁 무렵 일어나 시청 건물을 지나 호텔 입구 사거리에 있던 Eiles라는 180년 된 카페엘 들렀다. 에일 레스는 도착 첫날 호텔을 찾아가는 길목에서부터 눈길을 끌었던, 1층의 모든 창가에 글라디올라스 화병이 놓여 있어 무척 화려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맨해튼의 카페를 연상시키는 곳이었다. 180년 된 카페의 내부는 그러나 어두웠고, 장식이라면 창문마다 놓여있는 글라디올러스 화병이 전부였다. 글라디올러스 자체가 워낙 화려하고 키 큰 꽃이라 더 이상의 실내장식이 필요 없었겠지만, 역시 맨해튼이라면 빈틈없이 고급스러운 치장을 했을 공간인데, 길고 긴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유럽 레스토랑은 실용적이고도 담백한 공간이었다. 이차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 나오는 어두컴컴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거품 없고 음식 가격이 좋았다. 국회와 시청 바로 옆이라 수많은 정치인들이 이용해온 곳이고, 1934년 7월 국가 사회주의당 (오스트리아 나치)의 쿠데타 시도까지 그들이 모여 왔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오스트리아는 일인당 국민 소득이 5만 불이 넘는 나라지만 비엔나 음식 물가는 믿기지 않게 싸다. Horse Radish (좀 매운 무)와 Mustard (겨자)와 곁들여 먹는 프랑크푸르터 소시지 한 접시는 5 유로 내외. 비엔나 슈니첼은 돈가스처럼 네모나지 않고 동그랗게 얇게 썰어 튀겨 베리 종류의 잼, 그리고 시큼한 감자 샐러드가 같이 나오는데 10유로 정도. 우리가 비엔나커피라고 부르는 아인슈페너도, 500밀리리터 맥주도, 와인 한잔도 4유로 전후. 음식에 비하면 오히려 미술관 입장료가 비싸다 (16 유로 전후가 기본. 그래서인지 카페마다 사람들이 가득가득 가득한데 서빙하는 분들이 친절하기도 하고... 비엔나가 살기 좋은 도시 1위를 차지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먹는 문제가 쉽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한국으로 expat을 가고 싶어 하다가 포기한 미국의 이웃이 있는데, 포기한 이유 중 하나가 한국의 믿을 수 없이 비싼 식료품 비용 때문이라고 하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일이 있었다. 실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맨해튼과 서유럽 국가들에 맞먹는 식사료며 생활 물가에 놀라지만, 어차피 나는 여행 중이니 서울 여행비라 생각하고 놀란 마음을 다스리곤 한다. 다음날은 호텔 옆에 자그마한 엔틱가게에 들렀는데,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찻잔세트가 마음에 들었지만 들고 갈 방법이 없어, 대신 눈에 띄는 the blue riders의 화집을 구입했다. 독일 표현주의 회화를 선도했던 칸딘스키와 프란츠 막스, 그리고 파울 클레를 비롯한 청기사들의 작품 수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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