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세는 사람들>
에드워드 호퍼 <밤을 세는 사람들> 1942, 유화, 시키고 미술관
대도시의 밤, 안온한 가정의 실내가 아닌 거리의 귀퉁이 심야 식당에 앉은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무심함을 흘리고 있다. 그들은 아마도 고단할 것이고 뒤돌아 앉은 남자의 등 뒤로는 우울감이 번져 나오는것만 같다. 약간의 불안함과 초조감도 느껴진다. 리들리 스콧은 SF의 전설이 된1982년작 <블레이드 러너>의 영화의 미장센을 바로 이 작품 <밤을 세우는 사람들>을 모델로 했고, 최근에 리메이크된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도 해리슨 포드와 라이언 고슬링이 만나는 카페의 분위기 역시 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를 차용했다.
심야의 다이너의 불빛 아래 앉은 사람들 외에도 호퍼의 반복되는 주제는 카페에 앉은 사람들, 호텔방, 주유소, 기차의 객실 등이고, 이들을 집을 떠나 어디론가 이동중이다. 장거리 이동이 자유로와진 미국의 사실적인 풍경 속에서 인물들은 부유하는 마음의 상태,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벗어날 길 없는 고독감과 쓸쓸함을 물씬 풍긴다. 영화의 스틸컷 같은 느낌을 주는 건조한 배경을 뒤로한 마네킹같은 인물들은 대도시의 익명성을 은유한다. 가장 미국적 풍경으로 각인된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도시의 건조한 심야 식당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객창감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낯설고 쓸쓸한 감정이나 집에 대한 그리움을 객창감이라고 한다면, 일상을 살아가다가 때때로 엄습하는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이나 멜랑콜리한 감정을 삶의 객창감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결국, 이 세상에 잠시 세들어 살다가는 우리는 지상에서의 한정된 시간을 부여받은 여행객들인 것이다. 그림의 화려하고 감각적인 색조와 딱떨어지는 기하학적 화면의 구성만으로도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지만, 현대적 풍경과 영화적 화면구성이라는 매력 뒤에는 존재의 심연을 물들인 멜랑콜리가 조용히 번지고 있다. 20세기 초반의 미국을 그린 호퍼의 그림에서 노스텔지어를 느끼는 것은 역시 외로움과 고독함이라는 평등한 인간의 조건을 그림이 말없이 보여주기 때문은 아닐까. 마음이 이유없이 가라앉는 어느 저녁의 귀갓길에서의 심정을 그 시절 호퍼도 낱낱이 알고 있었을것만 같다.
애드워드 호퍼 <오토맷> 유화 1927
호퍼가 그려낸 것이 시대를 초월한 인간 내면의 풍경이었고, 그 중심에 자리한 것이 고독과 멜랑콜리 같은 습한 감정이었다면, 이를 좀 더 들여다 보기로 하자. 멜랑콜리 혹은 멜랑콜리아는 흔하게는 우울감 또는 심리적 고통이라는 말로 옮겨진다. 한때는 내 몸이 물로 채워진 유리병같아 조금이라도 잘못건드리면 깨질것 같은 때가 있었다. 말을 많이 해도 물병이 넘치거나 쏟아질것만 같던 아슬아슬한 상태는 외부의 과한 자극을 피해 다니게 만들었다. 우울감과 불안감이라는 심리적인 중력은 간신히 정상적인 상태로 일상을 유지할수 있을만큼의 무게로 마음을 끌어 내리던 시절이 있었다. 누구나 한번쯤 겪어보았을법한 그 시기는 10대의 격랑을 막 끝낸 20대의 초반부터 서른이 될 무렵까지 이어졌다. 아마도 발달 심리학자들이 아직 모델로 제시하지 않은 발달 과정의 한 단계였을지도 모른다. 20대의 풍경 한쪽에는 정신과적 진단장애 편람을 뒤적이며 나의 상태를 진단하려던 시간이있다. 기분부전 장애 (dysthimia)나 일반화된 불안장애 (generalized anxiety disorder)로 잠정적 진단을 내리고선 혼자셔 견뎌내던 그 아슬아슬하고 울적하던 20대에도 종말은 왔다. 30대의 현실의 무게와 일상의 책임이 내 몸을 채웠고 나는 뼈와 살과 피로 만들어진 튼튼한 생활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40대가 되자 몸도 마음도 돌처럼 단단해 졌다. 나이 40을 헛것에 미혹되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혹’이라 했던 공자는 과연 시간의 현인이자 세월의 달관자였다.
프랑스의 샤를 6세는 타인이 자신을 접촉하면 부서질 것을 두려워하여 몸에 아연 막대기를 꿰메 놓기도 했었다고 하니, 튼튼하지 않은 감정이 망상으로 진행되어 행동으로 옮겨진 극단적인 경우다. 노스텔지아는 선원들이 앓던 향수병으로 뭍을 떠나 오랜 시간 항해하면서 앓게되는 신체적 물리적 통증과 무기력증의 증상을 통칭했다. 아세디아acedia라는 중세에 만연했던 감정은 수도사들이 겪는 우울증과 비슷하지만 감정이었는데, 절망과 무력감이 엄습하면서 영성생활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영적 위기감의 상태를 일컽는 증상이었다. 유럽의 지적 전통은 알수없는 슬픔과 애수, 침울함에 잠식된 감정을 멜랑콜리로 부르고 뛰어난 지성을 가진 사람들이 종종 보이는 특징적인 감정 상태로 인식해 왔다. 고대 그리이스의 히포크라테스는 인체를 관장하는 네 가지의 체액증 검은담즙의 과잉으로 생긴 증상을 멜랑콜리라 했고, 아리스토 탈레스는 천재성을 가진 사람들의 우울한 기질을 멜랑콜리와 연결 짓기도 했다. 15세기까지는 천체의 운행을 측정하거나 기하학을 다루는 사람들의 복잡한 사고방식과 기질적 특징인 멜랑콜리아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알프레드 뒤러의 <멜랑콜리아 1>은 그 습하고 침울한 감정 상태와 천재성의 상관에 대한 당시의 정의를 시각화 했다. 기하학을 기본으로 다루던 예술과 건축가들도 멜랑콜리한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으로 인식했고,15세기 후반 이후로는 멜랑콜리아가 창의적 상상력의 기반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현대에 와서 멜랑콜리는 정신의학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예술인문학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파리에서는 2006년 뒤러, 푸생, 괴테를 비롯한 멜랑콜리아를 작품의 주제로 다루었거나 삶에서 멜랑콜리아의 시기에 놓여있던 유럽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한 자리에 모은 <멜랑콜리: 천체가 처한 응급상황>주제로 전시회가 있었고 호퍼는 이 전시에 초대된 유일한 미국 작가로 <뉴욕의 극장>과 <빛 속의 여인> 두 작품이 선정되었다. 현실의 공간과 이상적 공간 사이에 놓인 여인들은 생각에 잠겨있고고, 내부로 침잠하는 그녀들의 시선은 이상적 공간을 향한 갈망을 달래고 있다는 주제적 공통성을 갖는다. 호퍼 자신이 미국의 미술사에서 독립적인 행보를 걷고 있던 외로운 사람이었고, 그는 문학이나 시로는 표현되지 않는 인간의 경험과 감정을 그림을 통해 충만히 드러고자 했다. 유럽의 지성사에서는 멜랑콜리에 대한 모종의 낭만적숭배의 감정이 엿보이기도 한다.
멜랑콜리아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양가적 갈등 상태에 놓인, 결핍을 내포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비애의 감정상태이다. 불교에서 바라보는 인생은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과정이고, 성경에서도 인류의 조상은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낙원에서 추방된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동서고금의 경전과 고전들을 들여다 보아도 인간은 본질적으로 흠결을 가진, 고통의 바다를 건너 가야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무한한 자유를 원하면서도 안정된 소속감을 갈망하는 존재들이고, 공동체에 속하고 싶어 하지만 사회로부터의 기대와 의무는 회피하고 싶은거다. 생의 향락을 즐기고 싶지만 금욕적인 상태를 동경한다. 죽고 싶지만 떡복이는 먹고 싶어 서성이는 존재들인 거다. 양가감정과 결핍이 존재의 조건임을 인정하고 시선을 안으로 거두고 현재에 굳게 닻을 내린 마음에 일렁이는 잔물결을 멜랑콜리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멜랑콜리아는 심리학적 혹은 정신과적 개입이 필요한 심적혼동의 상태라기 보다는 결핍과 비애를 담담하게 수긍하고 걸어가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일찌기 괴테는 “멜랑콜리아라는 축복 (bliss)”을 이야기 했고 빅토르 위고는 “슬픔의 행복감”이라고 멜랑콜리를 정의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호퍼 그림을 매력적으로 느끼는 것은, 그가 우리 존재의 심연과 고독을 그토록 담담하게 표현해 내는데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공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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