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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희 Apr 14. 2020

자아가 탄생하는 사적인 공간-자가격리의 시대에

요하네스 베르메르 (2)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커다란 진주귀걸이를 하고 이국으로부터 수입된 옷감으로 만든 의상을 갖춰 입은 소녀는 알듯모를듯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고 있다. 물기를 머금은 듯한 눈과 입술은 눈 앞에서 보는듯 생생하다. 미스테리한 표정과 분위기가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닮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북구의 모나리자라는 애칭으로 네델란드를 대표한다. 개인이 주문한 초상화가 아닌 모델을 고용해 미리 그려놓고 미술 시장에서 판매하는 말하자면 기성 미술품을 트로니라고 한다. 트로니로 제작된 이 그림의 매력에 오랫동안 사로잡혔던 작가 슈발리에 (Tracy Chevalier)는 마침내 진주 귀걸이의 소녀가 전하는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야 만다. 스칼렛 요한슨과 콜린 퍼스가 열연한 이 동명의 영화 <Girl with a Pearl Earing>은 베르메르가 즐겨 사용했던 인디언 옐로우가 은은히 깔린 영상이 길게  여운을 남겼다. 영화에서는 화가의 조수겸 가정일을 돕던 스칼렛 요한슨을 모델로 이 유명한 작품을 창조한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의 그림이 풍기는 차분하고 관조적인 분위기는 베르메르가 매우 조용하고 내향적인 사람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생각에 잠긴듯한 영국 배우 콜린 퍼스는 흔한 자화상 하나 조차 남기지 않았던 베르메르를 연기하기에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기록에 의하면 베르메르의 할아버지와 삼촌은 동전을 제조하는 사람이었고 가짜 동전을 만든 전과로 투옥된 전과도 있었다. 프로테스탄트였던 그는 21세되던 해 부유한 가톨릭 가문의 여인 캐서린과 결혼하면서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화가들의 길드의 일원으로 장모 소유의 건물 꼭대기층에서 조용한 실내와 일상적인 가정 생활의 풍경을 주로 그리면서 지냈다. 그림 속의 소품을 정밀하게 묘사하고 빛과 그림자의 섬세한 변화를 세부묘사하는데 공을 들였던 베르메르는 일년에 한 두 점의 그림을 주문받아 제작했다. 1675년에 43세의 이른 나이로 사망했을 때 약 40여점의 작품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진주 귀걸이를 한 여인>1665, 유화, 마위리츠후이스 미술관, 헤이그


자아가 탄생하는 사적인 공간


17세기. 현미경과 망원경의 개발을 동반한 항해술의 발전은 포르투갈, 스페인, 네델란드, 영국이 주축이 된 대항해 시대를 이끌었고 지구의 거리를 좁혔다. 그 결과로 경제적인 부가 축적되고 시민계급이 대두되었다. 푸줏간 주인이 그림을 구매할 정도의 경제적 풍요가 도래한 사회의 개인들은 취향이 섬세해졌다. 예술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진 사회에선 개인의 시간과 사적 공간의 중요성이 고취되었다. 이와 관련해 영국 역사학자 스토운 (Stone)과 건축사학자 지루아드(Mark Girouard)는 17세기 영국의 건축물에서 개인 방, 밀실, 개인 휴식실과 같은 사적인 공간들이 중요성을 띄게 된 것에 주목한다. 이러한 개인성과 내향성이 사적인 내부 공간과 연관되어 발전되었던 것은 당시의 개인주의와 프라이버시에 관한 관심이 증가한 것을 짐작케 한다. 장모 소유의  저택에 기거하던 베르메르의 세상은 꼭대기 층의 스튜디오였다. 그에게 허락된 현실은 번화한 거리나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대가 아니라  가족들의 소음으로 시끄러운 주택의 꼭대기층, 빛이 스며드는 스튜디오의 귀퉁이 창가였다. 그의 현실은 일상의 소음으로 가득했을지라도 그림속 공간은 고요한 침묵만 감돈다. 유리창을 통과한 자연의 햇살은 베르메르가 바라본 좁은 세상의 귀퉁이를 부드럽게 보듬으며 정적인 아름다움을 전한다. 빛 속에 있으면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것일까. 창가에 스민 빛은 주인공의 일상을 돋보이게 하고, 그림 속에 배치된 소품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대항해 시대의 풍경을 증거한다. 베르메르가 그려낸 것은 내적 자아와 프라이버시를 담고 있는 여인들의 공간이다. 그것은 19세기의 버지니아 울프가 주장한 자기만의 방의 시작이었다. 물론 버지니아 울프는 전문적인 글쓰기와 여성이 독립적인 주체로 서기 위한 조건으로 자기만의 방을 언급한 것이지만, 그것이 자의식과 자신만의 취향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라는 점에서 베르메르가 그린 여성의 공간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예고한다. 베르메르는 사적인 취향과 존엄성이 발현하는 공간을 그려냈고, 관객은 한발짝 떨어져 그곳을 들여다 본다.


여인들은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우유를 따르거나, 레이스를 짜거나, 은을 저울질 하면서 경제적 활동을 하고, 악기를 연주하고 때로는 아마도 연인을 향한 것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누군가를 향한 편지를 쓰고 있다. 여행중인 남편이 보내온 편지를 읽고 있는 여인, 혹은 여인은 연애편지를 전달 받고 있다. 부유한 가정의 여인들은 목걸이를 걸고 있거나, 화려한 의상의 붉은 모자를 쓰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노란빛과 푸른빛을 띈 여인들의 의상, 습기를 머금은 눈망울과 붉은 입술을 표현한 색채는 아름답다. 실내의 공기는 치밀한 화면의 질감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손에 만져질듯 하고 차분한 감정의 동요가 마음 속에 인다. 그림 속 개인들은 특별하거나 거룩할 것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조용히 집중하는 모습에 덩달아 차분해 진다. 장면을 설정해 화면 속의 이야기로 우리를 초대하면서도 사적인 공간과 관객 사이에 분명한 거리를 설정한다. 지극한 친밀감을 느끼며 혼자만 음미하고픈 마음이 들게하는 그림들이다. 베르메르는 내밀하고 소소한 행복의 순간을 그렸고 때로는 몰입의 순간을 포착했다. 여인의 손은 화면의 소실점과 관객의 눈높이에 위치하고 있고 화면의 구성은 치밀하고 정교하다. 수평선과 수직선을 조화롭게 배치해 화면의 미적 질서를 불어넣은 기하학적 추상미는 이미 20세기의 미술을 예고하는듯 하다.


자아가 눈을 뜨던 사춘기 시절, 소년과 소녀들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닫고 가족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것으로 자신이 엄연히 자아와 존엄성을 가진 존재임을 선언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공간을 - 자기만의 고유성을 - 나와 외계 사이에 경계를 설정함으로서 확립한다. 그리고 존엄성을 인정받고 싶어한다. 자기 정체성은 자기 내부와 외부세계의 경계를 분별하고 나만의 영역을 분명히 하는데서 출발한다. 세포의 미시적인 생명 분화 과정은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고 세포막을 형성하여 환경과 자신을 경계 짓는 세포막을 형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인간 개체의 발달과정도 이와 유사하다. 자신의 감정과 내부에서 진행되는 그 모든 감정과 감각을 지각하고 선명하게 인식할 때 우리는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존엄을 존중받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그 결과는 내가 존중받은 경험만큼 타인을 존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여주인과 하녀> 1667, 유화, 프릭스 컬렉션, 뉴욕



독일의 신경생물학자 게랄트 휘터는 저서 <존엄하게 산다는 것>에서 존엄을 신경생리학적, 발달심리학의 관점에서 조명한다. 존엄(尊嚴: dignity ) 이란 한 개인이 가치가 있고 존중 받고 윤리적인 대우를 받을 권리를 타고 난 존재임을 의미한다. 헌법에도 명시되고 세계 선언서에도 등장하는 추상적인 개념인 인간의 존엄성 역시도 미시적인 신경생리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뇌의 신경세포들이 회로를 구성하는 조직 방식이자 그 회로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물론 천문학적인 숫자의 뉴런으로 구성되는 존엄의 신경회로는 엄청나게 복잡해서 인위적으로 재생하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존엄에 대한 분명한 자기 인식이 있고 존중받는 경험을 되풀이할 때 존엄을 형성하는 신경망의 연결은 강화되고 발전한다.  신경계가 가소성을 지닌다는 말은 사용하면 강화되고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된다는 의미이다. 신경세포들의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은 인간세계가 작동하는 방식과 동일하다. 인간의 뇌는 자기 보전의 감각을 타고 났지만,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반복적으로 경험하지 못한다면 신경세포의 연결 강화가 일어나지 못한다. 신생아가 필요이상으로 많은 신경세포를 갖고 태어나지만, 외부의 자극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신경세포들은 다른 세포들과의 연결이 강화되어 강력한 회로를 형성하고 그렇지 않은 세포는 소멸한다. 한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태도와 사고방식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길러지는 것이므로 타인들과의 상호작용은 개인의 존엄성을 공고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나” 라는 자의식 혹은 자기 정체성은 내적 표상의 가장 대표적인 예이고 “존엄” 역시 내적 표상의 하나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표상이란 결국 경험을 통해 신경세포에 축척된 정보의 패턴이라는 의미다. 인간이 존엄이라는 내적 표상을 갖게 된 것은 생명체가 엔트로피 - 무질서도 - 를 낮추고 질서를 세움으로서 스스로를 유지하려는 자기 조직화의 노력의 결과이다. 자아가 눈뜨는 청소년들이 가족 안에서 자신이 개성을 가진 독자적 존재임을 증명하려 노력하고, 그 노력이 자기 공간이라는 가시적 공간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 주장으로 부모 형제의 출입을 금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 처럼, 우리의 활동범위가 사회로  확대되면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나를 잃지 않고 중심을 잡고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한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장교와 웃는 여인> 1665-1660, 유화, 프릭스 컬렉션, 뉴욕


심리학자들은 개인의  자아 발달에서 사회적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페어베언 (William Fairbairn), 코후트 (Heinz Kohut), 위니콧 (Donald Winnicott) 같은 이론가들에 의하면 “유대감을 원하는 생물학적인 욕구”는 인간의 본성이자 영.유아의 자기 보존 수단이다. 유아에게 부모나 가족, 중요한 보호자들은 기본적인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대상들이다. 개인의 욕구를 만족시키는데 중요한 타인을 ‘자기 대상(self object)’이라고 한다. 유아는 대상 관계인 부모를 비롯한 중요한 타인들과의 경험을 통해서 대인관계에 대한 관념 (정신적 표상)을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정신적 표상은 대인관계에서 자기를 인식하는 기준이되고, 자아의 발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유아가 자기 대상과 정서적으로 연결되는 경험이 부족할 경우는 파괴적 충동으로 귀결되기 쉽다. 유아에게 필요한 공감이 결핍되고 욕구좌절을 경험한 결과, 아동은 강한 자기주장을 발전시키게 되는데, 이는 부정적인 충동이라기보다는 자아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라고 본다. 프로이트 (Sigmund Freud)가 말하는 본능적인  공격성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다. 우리는 자신의 존엄성을 인식할 때, 타인의 존엄성을 존중하게 되고, 자신을 향한 타인의 존엄하지 않은 행동에도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다. 그는 존엄을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는 방법, 인간이 인간을 위해 책임지는 태도의 문제로, 얼마나 존엄한 관계를 맺느냐의 문제”로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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