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베르메르 (1)
<서양미술사>를 저술한 곰브리치 (Earnst Gombrich)의 스승이었던 독일의 문화학자 바르부르크 (Aby Warburg)는 “신은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로 섬세한 묘사와 기억의 힘을 강조했다. 곰브리치는 베르메르의 섬세한 묘사를 “사람이 들어 있는 정물화”라고 극찬했다. 바르부르크와 곰브리치의 의견을 종합하면 베르메르는 그림의 신으로 격상된다.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항해술과 국제무역을 통해 경제적 부가 축적되던 17세기 네델란드, 물질적 경제적 풍요를 경험하기 시작하는 시민들은 신의 제단을 벗어나 일상의 범속한 물질성으로 시선을 돌린다. 유한한 삶, 불확실성의 시대,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먼토 모리 (Memento Mori)를 역설하던 격동의 시대에 개인들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질성에 주의를 돌렸다. 남부 유럽의 성화 중심의 장식적인 회화들과는 달리 북구의 네델란드인들은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대상들, 개인의 초상화와 세상의 소박하고 흔한 정물과 풍속화를 사랑했다. 그들은 시선은 부패하기 직전까지 숙성된 과일, 곤충과 나비, 시든 꽃잎을 주시했고, 날개의 가루가 손에 묻어날 것 같은 섬세함과 순간의 떨림이 느껴지는 정물화를 제작했다. 극도로 사실적인 정물화 앞에 서면 경건함조차 느껴져 숨을 죽인다. 손을 대면 허물어질듯 과하게 숙성한 과일의 검은 점은 삶에 깃들인 메멘토 모리의 메세지를 담고 있었다. 눈 앞에 마주한 소소한 사물들을 재현하는 일에 열정을 불어 넣자 새로운 가치가 탄생했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은 시적인 순간들로 승화된다. 일상의 소소하고 흔한 요소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기 쉽지 않지만, 의식적인 노력을 들여본 사람들은 그 시절 네델란드의 장르화가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정의 질서 혹은 무질서, 시끌벅적한 회합과 모임들, 혼자 있는 고독의 즐거움, 습기찬 대기 아래 놀고 일하는 일상의 서정, 아픈 아이들… 그들은 삶에서 친밀한 것들을 그림 속에 담았다.
베르메르와 함께 활동했던 호흐 (Pieter de Hooch, 1629-1684)같은 델트프 유파의 화가 역시 북해의 차분한 빛이 서린 실내와 거리의 고요한 풍경을 즐겨 그렸다. 차분한 실내의 정경들은 삶의 하모니와 즐거움을 전하고 마음을 안정시키고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교회의 건축구조를 중심으로 실내화를 주로 그린 비테 (Emanuel de Witte, 1617–1692)가 기하학적이고 수학적인 질서를 가진 실내화를 그렸다면, 베르메르와 호흐 같은 화가들은 기하학적 구도가 강조된 실내의 공간에 빛을 스며들게 하고 공간의 주인인 여성들을 조명함으로서 감성적 공간을 창조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베르고트는 베르메르의 그림을 보면서 글을 쓰는 일과 그림을 그리는 일의 연결성을 발견한다. 소설 속에서 그는 <델프트의 풍경>을 보면서 베르메르가 질감을 입힌 노란 벽의 작은 자락에서 자기가 추구할 예술의 이상을 발견했다. 베르메르가 덧칠을 하고 여러 겹을 입혀 완성한 바로 그 노란 벽의 작은자락이 손으로 만져질듯한 질감을 가지게 된것처럼, 자신의 소설 역시 몰아치는 영감의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완성한 작품이 아니라 삶의 작은 조각들을 정성들여 잇고 교정을 거듭하며 영혼을 담아 완성해야 할 작품이 될 것임을 깨달았다. 소소한 내적 과정을 기억하고 글로 기록하는 일은 결국 삶을 완성해 가는 작업이다.
델프트의 풍경이 베르고트의 마음을 사로잡았듯, 델프트의 차분하고 조용한 아침 거리 풍경을 그린 <작은 거리 Little Street> 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직은 일과가 시작되지 않은 이른 아침인듯 조용한 거리는 곧 시작될 분주한 하루를 준비한다. 낡고 붉은 벽돌로 장식된, 여러개의 창을 가진 건물 앞으로 조용한 거리가 있다. 지구의 반대편의 나라 300년 전 델프트의 거리가 내 기억에 있을리는 없건만, 특별할 것 없는 그 거리의 풍경은 유년기의 아침 풍경을 보는듯 노스텔지어를 일으킨다. 델프트는 아니지만 마침내 암스테르담의 거리에 섰을때 나는 여전히 같은 모습의 창문을 달고 있는 베르메르 시대의 건물들을 만났다. 미술관 창가에서 이국의 거리를 내다보던 그 시간엔 길 건너 건물의 창문 속으로 마음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건물의 창문은 베르메르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타임머신이었다. 델프트의 작은 거리보다는 훨씬 현대적이긴 하지만 창문의 장식적인 느낌은 여전했고, 같은 폭 같은 높이의 4층 건물들은 창문 주위를 돌로 된 패치워크 장식을 하고 있었다. 커튼을 실외의 창문 위에 둥글게 얹어 놓은 것은 마치 마스카라를 칠한 눈썹처럼 보였다. 창문 위에 설치된 눈썹 모양의 차양은 빛의 세기에 따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다. 실내로 강한 빛이 드는 것을 가려주면서도, 실내에서 거리 풍경을 내려다보는 권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북해 연안국가라 빛에 대한 갈망은 굉장했을 것이다. 외관이 아름답게 장식된 창문으로 들어온 빛. 그 실내의 창가에서 개인들은 편지를 읽고 쓰거나, 악기를 연주하면서 자신만의 시간을 향유하기 시작했다. 저기 외양을 아름답게 장식한 창문 뒤 실내 공간에서는 개인의 자아가 꽃피고 있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시선이 꿈꾸었고 그려낸 것은 그런 고요한 순간들이었다. 비록 자신의 현실은 가족들의 분주한 소음으로 혼란스러웠을지라도 그는 차분한 공간을 그려내면서 내면의 평화를 만들어 갔는지 모른다.
베르메르는 렘브란트를 이어 빛의 화가라는 타이틀을 물려 받았지만, 그의 생전에도 사후 200년 동안에도 각광받던 슈퍼스타는 아니었다. 일상의 평범한 순간들을 섬세하게 포착했던 베르메르의 미적 감성은 19세기에 와서야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1848년 토레 (Etienne Joseph Theophile Thore)라는 젊은 미술평론가가 뷔르거 (Burger, 시민)이라는 필명으로 베르메르에 관한 여러개의 글을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진다. 네델란드의 현대적 세계관은 프랑스와 유럽국가들보다 두 세기쯤 앞서 있었다. 1921년 파리에서 네델란드 화가들의 특별전이 열렸을 때, 프루스트(Marcel Proust)와 친구였던 보우아예 (Jean-Louis Vaudoyer) 라는 평론가가 전시 카탈로그에 <델프트의 풍경>에 관한 글을 썼다. 아픈 몸을 이끌고 보우아예와 함께 델프트의 풍경을 보고 온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갇힌 여인> 편에서 베르고트를 통해 이 경험을 그려낸다.
“마침내 다른 어떤 것과도 구분되며 강렬하다고 생각한 베르메르의 그림 앞에서 평론가의 글을 읽고 처음으로 파란색으로 표현된 작은 사람들, 그리고 분홍색 물, 노란 벽의 작은 자락을 구성하는 진귀한 자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현기증은 점점 더 악화됐다. 그는 어린아이가 노란 나비를 잡으려 애쓰듯, 노란 벽의 작은 자락에 시선을 집중했다. “나도 이렇게 글을 썼어야 했는데…. 내가 마지막에 쓴 책들은 너무 건조해. 이 노란 벽의 작은 자락처럼 내 문장도 그 자체로 귀중해질 수 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