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현희 Apr 15. 2020

스카겐의 푸른 시간 - 달빛 어린 바다

유럽을 여행 중이던 몇 해 전 그 여름,  밤은 무척 더디게 찾아왔다. 한낮의 맹렬함을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태양은 심야를 향해 가는 시간에도 여전히 지상을 비추고 있었다. 열 시를 훌쩍 넘겨서야 거리마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고, 에펠탑은 불빛을 온몸에 휘감고 유려한 A라인의 실루엣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북구의 화가들이 사랑했던 유틀란트 반도의 땅끝마을 스카겐을 방문하기엔 너무 짧은 여정이었지만, 파리보다 위도가 훨씬 높은 그곳에는 어둠이 훨씬 더디 찾아왔을 것이 분명하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자면 덴마크의 유틀란트 반도는 어깨가 구부정하고 상투를 튼 거인을 닮았다. 그 거인의 상투 끝에서는 두 개의 바다가 만난다.  녹색의 북해와 푸른색의 발틱해가 서로를 향해 느리게 달려오지만 서로 다른 바다는 섞이지 못하고 염분의 농도차이는 선명한 색깔의 차이를 드러낸다. 땅이 끝나고 두 개의 바다가 만나는 곳이라니 상상해보지 못했던 낭만이 아닌가. 인적이 닿기 쉽지 않은 곳이겠지만 19세기 덴마크와 스웨덴, 노르웨이의 화가들은 바닷길을 건너와 이 마을에서 시간을 함께 보내곤 했다. 물에 씻은 듯 투명한 달빛은 스카겐의 밤바다에 보석처럼 흩뿌려졌고, 화가의 섬세한 시선은 캔버스로 보석을 받았다. 스카겐의 낭만적인 서정을 세상에 보여 준 화가의 이름은 페터 세베린 크뢰이어였다. 화가의 눈에는 한여름 밤 스카겐의 연보랏빛 해변은 아름다운 아내 마리를 위해 준비된 무대였다. 마리를 위해 반짝이는 달빛과 대기는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제임스 휘슬러가 안개 낀 런던의 아스라한 밤의 서정을 <녹턴> 시리즈로 보여주었다면, 크뢰이어가 거닐었던 스카겐의 푸른 밤엔 독일 작곡가 막스 리히터 (Max Richter)의  <푸른 노트북 The Blue Notebook>이나 <빛의 본질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Daylight>가 흐르고 있을 것 같다. 19세기 말 스카겐의 푸른 시간에는 스칸디나비아 땅끝의 황홀한 고요가 스며있다.




크뢰이어의 몽환적인 푸른 보랏빛 대기만큼이나 극적이었던 것은 그림 속의 주인공이었던 아내 마리와의 비극적인 사랑과 결혼 이야기다. 1880년 덴마크를 대표하는 외광파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유명세를 날리던 크뢰이어는 열 여삿살 연하의 미술학도 마리 트리펙 (Marie Triepcke, 1867-1940)과 열애에 빠져 결혼을 한다. 아름다운 마리와 크뢰이어 부부는 스카겐 예술가 그룹에서 파워 커플로 화려한 생활을 이어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첫 딸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크뢰이어의 양극성 장애 (조울증)으로 인한 불안정한 정신상태는 그들의 결혼생활을 극도의 긴장으로 몰아넣는다. 조증의 상태에서 연회를 베풀고 성공한 천재적인 화가로서 향락과 고양된 정신활동과 창작활동에 몰두하지만 그 상태는 곧 우울증의 무기력에 자리를 내주곤 했다. 화가가 되기를 꿈꾸던 아름답고 젊은 마리에게 크뢰이어와의 결혼 생활은 한순간에 예술가의 무덤으로 변했다. 1900 년 49 세의 크뢰이어는 정신병으로 인해 유틀란트의 한 병원에 7개월간 장기 입원했다. 치료 후 그의 병세는 회복되는 듯했지만 조증 상태에서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는 등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고, 매독의 합병증으로 시력을 상실하고 창의력마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존스 홉킨스 대학의 정신과 의사 제임스 해밀턴에 의하면 정신과적 장애를 앓았던 어머니의 유전적 약점이 화가에게 유전되어 대부분의 성인 생활에서 조울증 (양극성 장애)로 고통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빛과 우울증 - 계절성 정서장애


위도가 높은 국가들에선 가을이 내리기 시작할 때 일찍 찾아오는 어둠을 맞기 위해 촛불을 켜 집안을 밝히고 뜨거운 찻잔을 들고 벽난롯가로 모여 앉는다. 특히 스칸디나비아를 비롯한 일조량이 적은 고위도 국가들에서 자연광은 육체와 정신의 건강에 직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멜랑콜리 가득한 막스 리히터의 무언곡 <햇살의 본질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daylight>는 빛에 대한 갈구를 담은 연주라고 말하고 싶어 진다. 노르웨이 오슬로의 정신과 의사인 안드레아스 메그누손은 높은 위도와 북해 연안이라는 지리적 입지로 긴 겨울을 견뎌내야 했던 스칸디나비아인들은 계절적 정서장애에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그의 연구에서는 유병율의 범위는 최대 10%에 이르렀고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의 10~20%는 계절적으로 재발했다. 다시 말하면 백 명 중에 최대 열명은 우울증을 겪는데, 열 명 중 한두 명은 계절적 정서 장애를 앓는다는 의미다. 2005년 스웨덴에서 이루어진 또 다른 연구에 의하면 일반인의 8%에서 계절성 정서장애를 겪고 약 10%의 인구들은 계절적 정서장애에 준하는 증상을 겪는다. 북미에서도 강우량과 습기가 많아 일조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시애틀과 서부 연안의 도시들에선 우울증을 비롯한 정서적 장애의 발병 빈도가 높은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영국의 정신과 의사 노먼 로젠탈은 위도와 계절의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정서적 우울증에 주목하고 계절성 정서장애 (seasonal affective disorder: SAD ,1984년 )라는 개념을 제안했고, 정신의학에서도  계절의 변화에 동반되는 햇살 감소가 신경전달물질 분비에 불균형을 유발해 우울증 상태에 놓이게 하는 현상에 주목했다.  미국의 정신의학 진단과 통계 편람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for mental disorder 5)에서는 계절성 정서장애를 계절적 재발을 동반하는 주요 우울증 (Major depression with seasonal pattern)으로 분류한다. 발병률은 국가에 따라 상이하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미국 정신의학회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에 따르면 대략 5% 정도로 보고된다. 햇살이 우리의 정신과 육체의 건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경험으로도 알고 있는 오래된 진실이다. 빛은 우리 피부로 스며들어 비타민 D 합성과, 수면을 조절하는 멜라토닌, 감정을 조절하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을 합성에 필수적이다. 기원전 300 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강과 질병에 관한 논문인 <황제 의학>은 계절이 모든 생물체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고 일출과 함께 일어나는 것이 행복을 유지하는 비결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전한다.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 필립 피넬 (Philippe Pinel, 1745 ~ 1826)은 1806 년에 출판된 그의 정신장애 치료서에서 환자 중 일부가 12 월과 1 월의 추운 날씨에 상태가 악화되는 현상에 주목했다.


https://youtu.be/rVN1B-tUpgs



계절성 정서장애가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낮이 짧아지면서 해가 일찍 지면  24 시간을 주기로 하는 우리의 생체리듬 (우리의 식욕, 수면, 활동이 24 시간에 맞추어져 있다)에 교란이 생기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빛의 양이 특정 역치 아래로 떨어지면 짧아진 낮의 길이에 생체주기가 적응곤란을 겪는다. 망막을 통과한 빛은 전기신호로 변환되어 뇌의 시상하부 (hypothalamus)를 자극한다. 시상하부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은 역할을 하며 멜라토닌, 스트레스 호르몬인 콜티졸 호르몬과 세로토닌 등의 신경전달물질 방출에 관여한다. 일조량이 적어지면 시상하부에 전기자극이 줄어들어 멜라토닌의 방출 시간이 길어진다. 어둠에 반응하는 멜라토닌의 방출은 밤에 증가하여 졸음을 느끼고 아침의 밝은 빛에 의해 억제된다. 사람에 따라서는 여름철보다 겨울철에 멜라토닌이 증가가 과도하고 그 결과로 생체시계가 느려지고 잠에서 깨는데 곤란을 느낀다. 동물실험에서 동물들은 깨어 난 직후에는 높은 멜라토닌 수치를 보였는데, 이와 관련해 갑상선 호르몬의 활동이 강력하게 억제되어 뇌의 갑상선 수치를 낮추고 식욕과 에너지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관찰되었다. 뇌 세로토닌 수치는 겨울에는 가장 낮고 여름에는 가장 높다.  중증 SAD 환자들은 증상이 경미한 환자보다 세로토닌을 분해하는 단백질이 계절에 따라 크게 변화를 보이는 것도 한 가지 관련 요인이다. 드물게는 봄에 시작해서 초여름에 증상이 완화되기도 한다. 미국 정신의학회의 보고에 의하면 효과적인 치료법은 인지행동치료를 주로 하는 심리치료와 뇌에서 세로토닌 수준을 저하시키지 않도록 조절하는 약물치료, 빛을 이용한 치료가 주된 방법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겨울이 되면 우울한 기분 “winter blue”를 호소하기도 하지만, 계절성 정서 장애는 임상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증상들은 다음과 같다.


거의 매일 우울하고 우울한 기분이 하루 종일 지속된다.

좋아하던 일들이 재미없어지고 흥미를 잃는다

기운이 없고 수면 장애를 겪는다.

식욕이 감퇴되거나 증거하고 체중이 감소하거나 증가하는 등 평소와 달리 변한다.

초조하거나 피곤하고 무력하다.

집중력에 문제가 생긴다.

희망이 없고 무가치하게 느껴지고 죄책감을 느낀다.

죽음이나 자살을 자주 생각한다.


가을 겨울 형 - 잠을 지나치게 많이 잔다. 달고 칼로리가 높은 음식을 과식한다. 체증 증가. 피로와 무기력함

봄과 여름형 - 수면장애, 주로 불면증을 겪는다. 식욕감퇴, 체중 감소, 흥분과 불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