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는 1935년 수에즈 운하 지중해 쪽의 항구 도시 포트 사이트를 출발해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여행을 했다. 홍해를 빠져나가 인도양을 건너 태평양을 항해하고 인상적인 여행기를 남겼다. 20세기 초 중국에서 그는 가난함과 비참함, 더러움과 아름다움을 보았다. 반면 일본에서는 신비한 관능, 사찰과 정원에서 우아함과 섬세함을 만났지만 한편으로는 군국주의로 치닫는 위험한 모습에 불안해했다. 카잔차키스 여행기의 일부는 일본의 역사애 있어 서양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게이샤의 나라인 일본은 쾌락과 신비로 가득 차 멀리 있는 수면 위로 미소를 지어왔다. 마르코 폴로는 아름답고 쾌락을 즐기며, 금빛으로 가득한 일본을 지팡구라고 일컬었다. 일본은 모든 상상력에 불을 붙였는데, 특히 콜럼버스의 상상력을 촉발시켰다. 실제로 콜럼버스는 일본을 찾아 세척의 날씬한 돛배에 몸을 싣고 바다를 건너갔다. 그의 나이 든 선생이자 위대한 지리학자인 토스카넬리가 그에게 이곳은 금과 진주와 귀금속으로 만들어진 섬이라고 쓴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집의 지붕과 문간이 금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그러니 탐욕스러운 그 제노바 사람이 어떻게 잠을 이룰 수 있었 겠는가? 그는 약탈을 위해 출발했지만 지팡구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아메리카라는 장벽이 그 앞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50년 후 일본은 포르투갈 출신의 또 다른 모험가인 페리오 멘데스 판토의 의해 발견되었는데 그가 판 배는 암초 때문에 위험에 처한 상태였다. 일본 영해에 정박한 그는 자신의 상품들을 비싼 가격에 팔아 선창을 금과 비단으로 가득 채웠다. 야만적인 바다의 늑대들은 일본의 풍요로움과 고상한 문화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당시 유럽에서 와는 달리 그곳 사람들이 손가락 대신 나무나 상아로 만들어진 두 개의 작은 젓가락으로 식사를 하는 것에 대해 감탄의 말을 아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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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서 모험가들이 굶주린 듯 찾아왔으며 선교사들 또한 종교적인 상품을 갖고 달려왔다. 그들 가운데서도 제일 먼저 온 온화한 성격의 성 프란시스 하비에르는 그의 여생 동안 이 새로운 땅이 자신의 마음에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고 거듭 말했다. 그는 일본인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덕이 많고 가장 정직할 뿐만 아니라 선하고 순수하며 다른 어떤 미덕보다도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도 말했다. 교회가 세워지고 몇 년이 지나 수천 명의 일본인들이 세례를 받았으며 평민과 귀족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부처를 숭배했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이 때묻지 않은 땅에 그들의 기독교와 함께 총과 매독과 담배와 노예무역을 가지고 들어왔다. 서구 문명은 그 뿌리를 넓히기 시작했고 양심도 없는 상인들과 서유럽 출신의 해적들, 여자 유괴범들과 주정뱅이들을 통해 수천 명의 일본인들이 노예선에 실려 가 먼 곳에 있는 시장에서 노예로 팔렸다. 그리고 그보다도 훨씬 더 나쁜 일이 일어났다. 기족교을 받아들인 일본인이 늘어나면서 그들은 고유한 관용과 온유함을 망각하고 자신의 민족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불교 사원들은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고 세례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가마솥에서 삶아져 죽어갔다…. 결국 일본은 더 이상 그것을 견딜 수 없었고, 그리하여 1683년 어느 날, 그날에 은총이 있길-끔찍한 대학살이 일어나 기독교와 유럽인들로부터 일본 땅을 정화했다. 항구들은 200년 동안 흰 피부의 야만인들에게 닫혀 있었지만 1853년 어느 여름 아침, 미국의 페리 장군이 일본 땅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최후통첩이 담긴 금상자를 들고 일본의 항구들을 미국 선박들에게 개방하라고 요구했다. 장군은 편지가 담긴 금상자를 들고 일본의 항구들을 미국 선박들에게 개방하라고 요구했다. 장군은 편지가 담긴 금상자를 지역 유지와 사무라이들에게 남기며 1년 안에 돌아와 대답을 듣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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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다. 안돼, 우리는 야만인들이 우리의 신성한 땅을 다시 오염시키게 놓아두어서는 안 돼. 선주들이 무덤 속에서 일어나 소리를 치실 거야. 하지만 그 이듬해 장군이 전함을 이끌고 돌아와 포탄을 몇 발 쏘자 일본인들은 금방 이해했다. 이제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 무슨 수로 저 하얀 악마들과 싸운단 말인가? 그들은 철갑 배와 대포를 가지고 있어, 악마 같은 기계가 달린 그들의 배는 돛이 없이도 바람을 뚫고 나아갈 수 있어. 그리고 모든 악의 힘은 그들의 편이야. 결국 일본인들은 항구를 개방했다. 그러자 봄에 피는 벚나무 숲과 가을에 피는 다양한 색깔의 국화 작은 체구의 다소곳한 여인들과 비단과 부채와 이상한 사원과 동상과 그림, 그리고 기쁜 과 은총으로 가득한 놀라운 광경이 백인들의 눈 앞에 황홀하게 펼쳐졌다. 심신이 지치고 옹졸한 성격의 피에르 로티는 일본에 와서 이 영원한 처녀지를 영혼은 없지만 은총으로 가득한 깨지기 쉬운 골동품으로, 여자들은 인형으로, 남자들은 피그미로 묘사했으며, 기모노를 벗기면 알몸밖에 없다고 표현했다. 그다음으로 낭만적인 성격의 라프키디오 헌은 일본을 영원한 목가와 영혼으로 가득한 절제된 파토스와 신비로운 미소라고 소개했다. 일본의 정수가 뭔지 알고 싶은가? 그것은 산에서 자라며 아침의 햇살 속에서 향기를 발산하는 벚나무이다. 감미로움과 섬세함과 침묵, 남자들은 미소를 머금은 채 죽고 여자들은 복종적이며 조용한 깊이를 간직하고 있다. 위대한 작가들이 이 나라에 눈을 돌렸으며 그들의 시각에 도취되지 않고 이 나라를 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등뼈가 가는 몸에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이국적인 꽃들을 수놓은 기모노를 걸쳤다. 그 기모노를 살짝 들어 올려 보자. 벚꽃과 코코로라는 두 단어밖에 모르고 떠나 이제 일본을 향해 가고 있는 나는 일본과 온몸으로 맞닥뜨리기 위해서는 세 번째 단어--아직 일본어로 그것을 어떻게 말하는지 모른다-를 하나 더 보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영어로 그 단어는 공포이다."
카잔차키스- 천상의 두 나라- 신비로운 관능, 일본 중에서 - 예담출판사
*그림 - < 성 하비에르의 순교>, 1617, 피터 폴 루벤스, 비엔나 국립 미술관
카잔차키스가 "(일본에) 제일 먼저 온 온화한 성격의 성 프란시스 하비에르는 그의 여생 동안 이 새로운 땅이 자신의 마음에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고 거듭 말했다."라고 썼듯이 하비에르는 예수회 사제로 동아시아 기독교 전파에 헌신했다. 하비에르는 1506년 지금의 피레네 근처의 스페인 지역인 나바라 왕국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 에스파니아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함으로써 집안은 몰락했다. 그의 아버지는 나바라의 하급 귀족이 되었고, 형들도 몰락한 왕국의 군인이 되었지만, 하비에르는 9세 때 세례를 받고 신학을 공부한 후 사제가 되었다. 동아시아에서의 포교 생활에 인생을 걸었던 그의 생을 기념하기 위해 얀트베르펜의 예수회는 루벤스에게 그림을 의뢰했다. 유려한 화풍으로 유럽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루벤스는 인도 고아와 일본, 중국에서 선교를 준비했던 하비에르 사제의 삶을 그림에 담았다. 배경에는 이교도의 우상들이 복음의 빛을 받아 파괴되고, 화면 중앙에서는 하비에르를 통해 이교도들 사이에서 환자들이 완치되는 기적이 행해지고 있다. 청나라의 변발을 한 사람, 아기를 안고 있는 인도 여인, 남미 원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도 있다. 상상할 수 있는 이교도들의 양식이 모두 들어있다.
* 그림 중앙의 금빛 옷을 입은 조선남자 - 루벤스의 스케치 <조선남자>로 유명하다. 이 조선 남자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나가사키의 노예시장에서 이탈리아의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에게 팔렸다. 카를레티는 아버지와 세계일주를 하면서 이때 나가사키에서 다섯 명의 청년 노예를 샀는데, 네 명은 풀어주고 한 명을 이탈리아로 데리고 갔다. 또한 그가 세계일주를 하면서 저술한 책이 1964년 미국에서 < my voyage around the world: the chronicles of 16th century folorentine merchant.>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일본의 항구에서 조선 노예를 샀던 일을 책에 기록하고 있다.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이름을 받은 이 조선 남자는 카를레티와 함께 플로렌스로 가서 교육받은 후 다시 그를 따라 로마로 갔다. 이때 로마를 방문한 루벤스는 안토니오 코레아가 도포를 입고 망건을 쓴 모습을 스케치했고 그 작품이 1980년대 크리스티 경매에서 역대 최고가로 낙찰되면서 조선 남자의 행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루벤스가 조선남자를 그린 것은 성 하비에르의 기적을 그리기 위한 부분 습작이었다. 남부 이탈리아에 남아있는 코레아라는 씨족 집단이 이 코레아의 후손인가 하는 의문이 한때 열띤 논란을 낳았는데 이와 관련해 관련해 부산대학교 곽차섭 교수는 엄밀한 문헌 검증을 통해 그럴 것 같지는 않다고 결론지었다. 이탈리아에 코레아들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포르투갈에서도 코레아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이탈리아로 건너와 자리를 잡았을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다.
피터 폴 루벤스 <조선남자> 1917, 게티 미술관 소장, 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