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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May 24. 2020

파스타 공예의 험난한 세계

“난 봉 프랑이 좋아.” 아침에 눈도 뜨기 전에 내뱉은 첫마디였다. 밑도끝도 없이 von france라니... 내가 내뱉은 소리에 정신이 들었고,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지만 꿈 속에서의 좋은 기분을 유지하고 싶어서 눈을 감은 채 내가 탄 von france라는 비행기 안에서 커피를 마시려던 순간을 남편에게 이야기 주었다. 비행기 객실은 여유공간이 넉넉해서 참 좋았고 승무원이 내게 쥐어준 스낵의 모양과 색깔도 여전히 또렷했다. 스낵을 주길래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으로 커피를 마시러 가던 참이었다. 그 비행기의 커피잔은 말이야 이렇게 생겼는데 난 그 커피잔이 너무 맘에 들었어...라고 설명하며 웃었는데, 점점 정신이 들어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행 금단 증상인가..... 5월 말이면 학기를 마친 시간이고 나는 해마다 이맘때면 아이들과 여행을 준비했었다. 연례 행사와도 같이 5월이면 짐가방을 꾸리는 일을 15년 이상 해 왔지만, 이번 봄은 세계가 발이 묶였고 나는 그제까지  탈고하느라 마음이 묶여 심중에 여행이 들어올 여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은 꿈 속을 비집고 올라와 기어이 어딘가를 향해 날으고 있었던 거다.  심각한 정신적 트라우마로 인해 정신과적 질환을 겪은 사람들 중에는 해마다 그 시기가 돌아오면 증상이 재발하는 경우가 있고, 이를 anniversary reaction이라고 하는데, 오늘 새벽 나의 von france 탑승기는 anniversary reaction이 꼭 트라우마에 대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의식 세계로만 침투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내게 알려 주었다. 비의도적인 자가 학습이라니.....바이러스 역병 시대가 내게 가르치는 소소한 것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무슨 알고리듬으로 아름다운 파스타의 세계가 소셜 미디어의 피드에 떴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쿠킹의 단계를 넘어 공예의 수준으로 파스타를 만드는 흥겨운 동영상에서는 알록 달록 꽃무늬 포장지 같아 보이는 납작한 밀가루 반죽이 줄줄 밀려 나오고 있었다. 그걸 보았다고 난 왜 따라해보리라는 마음을 단번에 품게 되었는지.... 화려한 색색깔의 납작하게 편 밀가루 반죽에 문양을 넣어 여러장 겹치는 작업이었다.  만들어진 납작한 밀가루 반죽으로 토텔리니도 라비올리도 만들고 나비모양 면도 만들고...화면 속에선 신기한 밀가루 공예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아이들 어렸을 때, 사실은 지금까지도, 부활절, 땡스기빙, 할로윈, 크리스마스 등 절기와 축제에 맞춰 생산되는 예쁜 모양과 색깔의 파스타면 쇼핑도 재미있는 일상의 한 부분이었는데, 큰 아이가 대학 간 후로 파스타 쇼핑을 잊은지 오래되었다. 다음 달 쯤 여유로와지면 시도해 보리라 영상을 저장해 두고 있었다.


탈고를 마친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나서 두 달간의 말미를 받아두었다. 한 달쯤 덮어두고 다른 일에 몰두하다가 다시 원고를 들여다 보면 또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므로 이 과정을 거쳐 최종 수정을 하는 것이 맘이 편하다. 미루어 두었던 하고픈 일이 너무 많아 다음날은 꼭두새벽같이 일어나야 할 것 만 같았다. 실상 눈뜨자마자 손이 간 것은 밀가루와 색색의 야채들, 결국 파스타 생산에 하루가 다 갔다. 마음을 이완시키기엔 좋은 방법이지만 밀가루 반죽과의 씨름에 몸살직전까지 갔다. 아일랜드를 알콜로 소독하고 스탠드 믹서와 파스타 면기를 세팅했다. 저 쇳덩어리들은 무거워서 내가 다 들지도 못하는데.....아들은 냉정하게 저것만 놔주고 뒤돌아서 갔다. 세 가지 색 피망을 오븐에 굽고, 초록색 야채는 데쳐서 물기를 짜고, 색이 진한 비트 피클도 갈아서 다섯 가지 물감을 만들었다. 살균 멸균을 위해 야채를 가열처리를 한 뒤 아홉시 부터 시작한 작업이 오색 반죽을 완성했을 땐 정오를 훌쩍 넘어 있었다. 애초에 오색 도우를 만들 생각은 없었건만 일은 늘 시작하면 사건이 커지는 것이어서....점심을 먹은 후 반죽을 납작하게 펴는 작업을 1/3도 못했는데 두 시간이 흘렀다. 결론적으로 알게 된 사실은 반죽은 훨씬 더 단단해야 했다. 파스타 패치워크는 정녕 이태리 할머니들이 한평생 익힌 기술로 룰루랄라 참 쉽죠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내가 가진 쿠키커터는 너무 커서 그보다 훨씬 작은 것들이 필요했다. 동네를 다 뒤졌으나 5월의 그로서리 마켓에선 마음에 드는 쿠키커터를 구할 수가 없었다. 파인애플은 이상한 초록색 병모양이 되었다. 처음이라 오늘은 망했다. 망한 패치는 면이 되면 간단하다. 라비올리를 만들어 시식을 하니 입맛예민한 둘째는 색색마다 다른 향이 난다는 말로 서툰 솜씨로 밀가루와 씨름한 나의 노고를 치하하지만,.....다 큰 사내 아이들은 더 이상 쿠킹에 관심이 없다.하지만 인생은 부딪히며 배우는 것, 파스타 공예의 세계도 다르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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