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름바다 Jul 12. 2020

바람의 힘으로 지구 한 바퀴- 하멜 표류기

한 네덜란드인의  탈조선기


섭씨 30도를 훨씬 웃도는 본격적인 여름이 찾아왔고 나는 두서없이 책을 읽거나 간간히 새로운 산책로를 찾아 나서거나 가끔 수영을 하러 가는 것 외에는 바깥출입을 삼가고 지냈다. 올해는 한국의 하늘이 맑아진 만큼 이곳에선 크레이프 머틀의 환호성이 온 동네 가득하다. 한국에서 백일홍 나무라 부르는 머틀이가 어릴 때는 하늘 향해 팔을 벌린듯한 모습으로 꽃송이를 가득 단 가지를 하늘로 뻗어 올려 마치 불꽃이 터지는 것처럼 화려하다. 좀 더 자라면 매끈한 나무의 몸통은 흠 하나 없이 위로 쭉 뻗어 올라가 나무의 정수리로부터 수 백개의 가지가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활짝 펼쳐진 우산이 서 있는 모양이다. 10년쯤 자라면 이웃 나무들과 어깨를 맞대고 한 몸채를 이루어 조그만 바람에도 온몸을 흔드는 작은 동산이 되는 나무다. 호수를 따라 난 산책로는 지열을 약하게 뿜어 올리고 있었지만 바람은 선선하게 불어 7월 오후의 공기는 견딜만하다. 가끔 힘센 바람이 한 자락 불어올 때면 범선과 거대한 돛단배들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바다처럼 넓은 온타리오 호수 위로 혹은 허드슨 강이 대서양을 향해 흘러 나가는 맨해튼의 앞바다를 흘러가던 범선은 근사한 위용을 자랑하며  광활한 수면을 유유자적 떠다니곤 했다. 대양을 가로지르던 애초의 용도를 상실한 지금은 미학적 가치에 기대어 여유로운 관광객들의 선상파티를 위한 말하자면 여객선으로서의 기능을 할 뿐이지만, 토론토의 CN tower 높은 전망대에서 혹은 맨해튼의 초고층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그림 같은 돛단배들이 바람에 밀려 반짝이는 수면 위를 미끄러져 가는 모습을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장성하고 나면 나도 오래된 친구들과 저 범선의 갑판 위에서 와인잔을 기울이는 여흥의 시간을 가져보리라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며칠 전에 읽은 하멜 표류기의 저자 네덜란드 선원 하멜이 타고 다녔을법한 배가 바로 그 맨해튼 앞바다에 떠다니던 그 감상용 범선이었다는 것도 발견했다.

  

맨하탄 앞바다를 떠다니는 그옛날 voc의 상선 batavia (자바)의 레플리카 그리고 여름 온타리오 호수 위를 떠다니는 큰 배 - 범선


수 세기 전, 가공되지 않은 자연의 동력인 오직 바람에 의지해 미지의 가능성을 찾아 대양을 넘나들며 대륙들을 탐험하던 인간들의 용기와 그들이 건설한 해양 구조물의 아름다움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숙연한 마음조차 들기도 하는 것이다. 인류의 발전을 담보해 온 무동력 범선들, 나무와 천과 밧줄과 바람과 물길의 힘으로 지구를 탐험하던 흥미진진했던 시간들. 온갖 종류의 동력이 넘쳐나는 요즘 시대에 오직 바람에 기대어 수만리를 항해하는 범선은 언뜻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정말일까? 정말 바람만 타고 다녔을까? 하는 덜떨어진 내 질문에 선박 전문가의 대답은 “그럼 그 큰 배가 노 저어 다녔겠니?” 간단하다. 바람과 물길을 타고 항로를 개척했던 용기 있는 사람들, 그러나 궤멸당한 식민지 억울한 주민들, 그 용기백배한 도전에서 실족한 사람들..... 해류나 바람을 잘못 만나 표류하고 삶의 터전으로부터 추방당한 존재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들이 있겠지만, 바람을 잘못 만나 표류했으나 구사일생으로 다시 삶의 정상궤도로 돌아간 사람들이 남긴 기록은 그 시절을  향한 상상의 창을 열어두었다. 우여곡절 끝에 13년의 억류 생활을 탈출해 본국으로 귀환한 한 바다 사나이의 이야기는 안도의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개인사이기는 하지만, 그가 뜻하지 않게 관통해야 했던 조선의 시간, 그리고 그가 전하는 그 시절의 풍경 -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의 조선의 시간 -은 실현되지 않았던 역사의 다른 가능성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만든다. 여러 해 전 가족들과 제주도 여행에서 서귀포의 바닷가에 세워진 하멜 기념비를 방문한 기억도 있다. 하멜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지난가을 암스테르담 여행에서 남편은 해양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낼 때 나는 홀로 렘브란트의 집을 찾아갔는데, 그때 해양 박물관을 함께 갔더라면 좋았을 뻔했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여러 해 전 홍콩의 어머 무시한 규모의 해양 박물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기억이 있는 터라, 선박과 해양의 역사를 알아보는 것은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에서 이미 바다와 배의 그림을 싫증이 날 지경으로 보고 난 다음 날이었기 때문에 렘브란트의 집을 찾아간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 어쨌건 렘브란트와 하멜은 네덜란드의 황금기를 함께 구가했던 동시대의 사람들이다.   



지난 가을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 라운지. 눈길을 끌던 빛장식

 <야햐드 선 데 스페르베르 호의 생존 선원들이 코래 왕국의 지배하에 있던 켈파르트 섬에서 1653년 8월 11일 난파당한 후 1666년 9월 14일 그중 8명이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할 때까지 겪었던 일 및 조선 백성의 관습과 국토의 상황에 관해-네델란드령 인도총독 요한 마짜이케르 각하 및 형의원 제원 귀하> 그들은 제주도를 켈파르트라고 불렀고 조선을 코레라고 불렀다. 하멜이 구사일생으로 조선을 탈출해 일본과 인도네시아를 거쳐 본국에 귀환한 후 동인도 회사에 제출했던 보고서의 제목으로, 그는 매우 소박하고 솔직한 문체로 과장없이 서술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하멜 표류기로 알려진 글의 제목이다.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스페르베르호는 설탕과 사슴가죽 비단 등을 싣고 지금의 타이완인 포르모사를 출발해 일본의 나가사키 만의 데지마라는 교역을 위해 지어진 섬을 향한다. 하멜은 이 배의 화물 감독관 겸 서기의 신분으로 승선해 있었는데 그는 20세에 고국을 떠나 2년간 인도에서 근무 한 후 나가사키를 향해 가던 중이었고, 불행히도 제주 앞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하고 만다. 그와 일행 36명 조선에 억류되어 13년을 하릴없이 보내기다가 결국에는 또 한 번 목숨을 건 탈주를 시도하게 되고 9시간 항해 끝에 자신들의 목적지인 데지마에 도착하는 데 성공한다. 아홉 시간 거리를 13년 걸려 도착한 것이다. 동인도 회사의 선박 화물 감독관/서기였던 하멜의 조선 표류기는 말하자면 네덜란드인이 기록한 최초의 탈조선기인 셈이다. 이 짧은 책은 당시의 조선, 그리고 일본과 네덜란드로 대표되는 동방 교역의 시대 상에 관한 힌트를 준다. 하멜은 누구이며 왜 조선에 억류되어 있었던가? 당시의 조선에서 하멜은 무엇을 보았는가. 하멜이 고용되어 있던 동인도 회사와 17세기 네덜란드 그리고 일본의 현황은 어떠했던가..


16세기 말-17세기 네덜란드 인들은 망원경을 제작해 별들의 항로를 관찰하고 현미경을 만들어 인체의 해부도를 제작하던 사람들이다. 그중에는 세상이 그에게 안겨주겠다는 명예와 영광을 외면하고 자기 철학을 저술하는 일과 렌즈를 만드는 일에만 에너지를 쏟다가 간 스피노자 선생님도 있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하시던 그 스피노자 선생님 말이다. 망원경과 지도라는 하드웨어와 조선 축조 기술이라는 소프트 웨어를 손에 쥔 척박한 영토의 주민들은, 오비드의 표현을 빌자면 "산꼭대기에서 소나무를 베어 넘실거리는 바닷가로 끌고 가 낯선 세상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스페인과 로마 가톨릭의 지배하에서 수탈당하던 네덜란드는 치열한 투쟁의 결과로 독립을 얻어내고 1590년에는 북유럽과 러시아에서 생산된 물자를 싣고 지중해 앞바다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룬다. 북해 연안의 네덜란드가 배를 지어 지중해로 내보내기 시작함으로써 포르투갈과 이탈리아 중심이었던 유럽 무역의 판도는 네덜란드로 옮겨 오게 되었다.  곧 아프리카는 물론, 대서양을 지나 아라비아 해와 인도양, 그리고 태평양 앞바다를 자신들의 주요 무역항로로 개척하고, 유럽의 생산품을 싣고 가 아시아의 향신료와 금, 은, 구리, 비단 설탕 등을 거래하는 동방무역을 전개한다. 인도의 면, 인도네시아의 설탕 등을 일본으로 싣고 가 은과 도자기 구리 등을 사들였고, 여기서 사들인 물건을 다시 유럽으로 되팔았다. 말하자면 물류와 유통으로 21세기 최대 거부가 된 아마존의 17세기 버전이라 할 수 있는 네덜란드 교역회사 였다. 아시아 총독이 거주하던 바타비아 (자바섬)를 거점으로 한 인도와 동남아시아, 포르모사로 부르던 타이완을 거점으로 한 중국, 그리고  나가사키를 거점으로 한 일본이 그들의 교역 대상국에 포함한다. 은자의 나라 조선은 이 네덜란드의 교역국 명단에 들어있지 않다. 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곧  난파해서 표류한 하멜이 13년이나 조선에 억류되어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아라비아와 인도양 교역에 활용되던 voc의 범선들

북해 연안의 신생국이자 후발주자였던 나라가 대항해 시대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올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주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인적자원과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금전자본이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종교의 박해를 피해온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자본과 기술력이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이베리아 유대인들을 종교 탄압과 온갖 구실로 들들 볶아서 재산을 빼앗고 반도 밖으로 쫓아냈는데, 이 쫓겨난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는 유럽의 어느 나라들보다도 관용적이었던 네덜란드를 향한다. 유대인들은 해상무역에 관한 자신들의 축적된 지식과 금권과 포르투갈어라는 통일된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세계적 무역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시작했고, 유대인들을 쫓아낸 포르투갈의 결과는 해상무역의 주도권을 네덜란드에 내주게 되는 것으로 돌아온다.  세계 금융과 무역의 역사는 유대인들의 이동과 궤를 같이한다는 관찰은 흥미롭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네덜란드로, 그리고 두 세기 후 산업혁명 시대의 영국으로, 그리고 나치 이후는 뉴욕으로... 회화의 황금기 역시 세계적 교역항의 이동과 궤를 같이 한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16세기 대항해 시대가 가톨릭을 앞세운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신의 이름으로 행한 신대륙의 원주민 학살과 무자비한 자원 수탈사였다면, 네덜란드는 동인도 회사라는 금융자본을 앞세워 자본주의적 국제무역을 시작했다는 차별성을 가진다. 동인도 회사는 북아메리카에도 물론 총독을 파견했는데, 1626년, 당시 북아메리카 식민지 총독이었던 페터르 미나위트 Peter Minuit가   신대륙의 델라웨어족 레나페 인디언에게 60 길더 (24달러어치)의 유리구슬과 장신구를 주고 작은 섬을 사들인 사실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현대의 기준으로는 농담 같은 이야기지만, 24달러어치의 유리구슬의 가치는 당시의 그것의 사회적 희소성과 1626년이라는 시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으니 교역의 당사자였던 델라웨어족과 동인도 회사 서로가 만족하는 거래였다고 기록은 전한다. 동인도 회사가 사들여 뉴 암스테르담이라고 이름 붙였던 그 섬이 오늘날의 맨해튼이다. 그래서 맨해튼 앞바다에는 동인도 회사 소유였던 범선 바타비아호의 레플리카가 여전히 떠다니며 역사를 증거 하는 것이다. 그들은 카 나시 부족으로부터 스태튼 아일랜드를 사들였고, 주변의 땅을 카나시 부족으로부터 중복적으로 사들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동인도 회사의 맨해튼과 스태튼 아일랜드의 거래 증서는 암스테르담에 남아 있다. 이 회사가 벌어들인 돈으로 네덜란드는 제방을 쌓고 땅을 넓혀 간다. 바다를 메워 땅을 개간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한 놀라운 더치들이다. 네덜란드의 황금기는 곧 동인도 회사의 황금기였다. 이 회사는 이후 두 세기 동안 번성한다.

한편, 1543년 우연히 일본에 도착한  포르투갈 상선과 교역을 시작하며 조총을 비롯한 신무기와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일본은 1590년대가 되자 그 칼끝을 조선으로 향해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조선을 초토화시켰으나 명나라 정벌이라는 애초의 계획은 실패했다. 그 후 에도 막부가 설립되고 1600년대 초에는 네덜란드 상선 de liefde호가 역시 표류하다 일본에 도착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이 배를 타고 온 네덜란드 사람 얀 요스텐의 해박한 국제적 지식에 반해서 그를 에도로 불러들여 외교정책을 상담하면서 두 국가 간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기존 질서와 가치체계에 어떤 새로운 도전도 원치 않았던 일본은 쇄국을 유지한 채 유럽과의 경제적 통상만을 원했고, 포르투갈이 전파하려던 가톨릭을 위협으로 느끼던 차였다. 일본은 자국 내의 크리스천들을 박해하고 포르투갈을 쫓아내고, 가톨릭과 적대 관계에 있던 신교 국가이자 경제적 실리에만 집중하는 네덜란드와 독자적이고 배타적인 교역을 진행한다. 향후 210여 년간 이 관계는 유지된다. 일본은 나가사키 만에 오천 평의 조그마한 인공섬 데지마라는 창을 내고 교역의 거점으로 삼고, 그곳에 네덜란드인들을 상주시키고 근대로 진입하는 유럽의 문물을 흡수한다. 유럽과 네덜란드에서 개발된 조선공학, 의학, 천문학, 공학 등의 모든 신기술은 난학이라는 이름으로 즉각 일본에 전해져 일본 근대화의 초석을 마련했다. 그러니까, 나가사키는 네덜란드를 향해 났던 일본 근대화의 창이었고, 그 상대가 네덜란드였던 것은 일본의 행운이었다. 일본은 유럽의 근대화에 발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200년 이후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개항을 요구받았을 때 일본은 이미 이전 두 세기에 걸쳐 서구문물을 흡수해 오던 중이었고, 미국에 의한 강제적인 개항은 그들의 현대화에 기폭제가 되었던 셈이다.  1653년 네덜란드의 동방무역의 일원이었던 하멜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이 나가사키의 데지마였던 것이다.   


1653년 동인도 회사의 스페르베르호에 승선해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 도착했던 하멜은, 그곳으로 부터 다시 타이완 (포르모사)를 거쳐 일본 나가사키를 향해 가다가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한다. 열여덟 명의 일행과 함께였다. 당시 네덜란드 사람들은 타이완을 포르모사로 제주도를 켈파르트라고 불렀고, 그들이 제작한 지도에도 그렇게 표기되어 있다. 제주도 부근에서 여름 태풍을 만나 배는 난파되고 그와 일행들은 제주도에 표류된다. 하멜이 표착한 동시대의 조선에서는...... 하멜의 표류기는 동시대 은둔의 나라 조선의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제주 목사는 그들을 불쌍하게 여겨 후하게 대접했으나, 후임 목사는 이들에게 제공된 부식도 뺏고 이들을 죄인 취급하며 모질게 대했다. 용감했으나 운이 없었던 불쌍한 외국인들에게 왜 그랬을까? 조선인의 어선을 하나 훔쳐 도망가려 하다가 잡혀서 칼을 차고 수갑을 차고 목사 앞에 불려 나가 곤장을 맞고 한 달 간이나 앓아누워있기도 했다. 서울로 압송되어 조선의 왕 효종을 알현하는데, 왕은 하멜 일행을 잘 대접하긴 했지만 그들에게서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의지도, 그들의 본국으로 돌려보내려는 의지도 없었다.  하멜보다 일찍 표류한 벨테브레는 조선에 적응이 뛰어났던지 25년 만에 모국어인 내델란드어를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더듬더듬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며 조선말 통역사 역할을 하다가 하멜 일행과 생활지 한 달쯤 되자 차츰 모국어를 되찾았다고. 조용한 은둔의 나라 조선의 왕은 “밥은 먹여 줄 테니 고향은 잊어버리고 내 곁에서 일생을 마치라”라고 난파한 네덜란드 선원들을 자신의 호위병으로 삼고 호패를 발급하고 월급을 지불했다. 그들은 일본으로 못 보내주겠으면 청으로라도 보내달라고 애원했으나 조선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싫었던 국왕은 난파 선원들이 청나라 사신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본국에 알리려는 시도를 차단하고자 그들을 남원 순천 여수 강진 등으로  뿔뿔이 흩어버린다. 하멜과 몇 명의 동료들은 전라도 강진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13년간 억류생활을 한다. (내게는 다산 초당으로 기억되는 그 전라도 강진). 본국 네덜란드에서는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여인들이 개인적 시간을 보내는 풍경을 그리고 렘브란트가 무수한 자화상을 그리며 자아성찰을 하던 바로 그 시간에 조선국에 억류된 하멜은 옷과 쌀을 동냥하고 구걸도 하고 관아의 노동에 동원되어 활쏘기 연습을 하는 군인들의 활 줍는 심부름도 하고 다닌다. 자주 바뀌는 관리의 성정에 따라 이 불쌍한 네덜란드 선원들의 삶이 롤러코스터를 탔는데, 관리는 기록에 의하면 거의 2년마다 바뀌는 듯했다.  하멜과 일행들은 금쪽같은 인생을 "이 심술궂은 사람들 아래서 매일 슬픔에 젖어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한 번 모험을 해보기로 하고” 탈출을 결심했다. 돈을 모아 조그마한 어선을 비밀리에 장만하고 원래 목적지이던 일본의 인공섬 데지마를 향해 탈조선을 시도하고 마침내 성공한다. 대항해 시기, 조용한 은둔국 조선은 명에 이은 청나라에 일 년에 세 번씩 노예와 조공을 바치며 육로를 통한 청과의 단일 무역 전략을 택하고 있었다. 명에 이은 청나라는 조선이 세상을 향해 터놓았던 유일한 창이었다. 하멜의 탈조선 이후에도 조선의 고립정책은 계속 유지되어 기본 질서에 대한 존중을 유지한 채 19세기에 외국에 의해 강제로 개방되기 전까지는 어떤 변화도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있었다. 두 세기 후 제이 코스트는 “조선 역사에 고요히 흩어져 있는 기록들”이란 글에서 ‘하멜은 조선의 예절과 관습에 대해 백성과 나라에 대해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죄소로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고 하는 장소들이 확인되어지고 있으며, 과거 이야기의 모든 특징이 마치 오늘날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다. 언어와 풍속 양면에 있어서  토착적인 보수주의가 너무 강해서 200년 전의 하멜의 표현은 오늘날 조선인들의 모든 생활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왕립 아시아 학회의 중국지부 저널 1893-94 “ 한국의 독창적인 외교정책이 회귀하고자 하는 방향의 연원을 찾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책의 후반부는 조선의 지리와 어업, 기후와 농업환경, 정치와 경제 제도, 근사제도, 행정 세법, 형법, 종교, 교육과 결혼 방식 등에 관한 짤막하지만 체계적인 기술을 싣고 있다.


데지마로부터 아시아 본부이던 자바를 거쳐 본국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 귀향한 하멜은 지난 16년간의 임금을 보상받기 위해 <야햐드 선 데 스페르베르 호의 생존 선원들이 코래 왕국의 지배하에 있던 켈파르트 섬에서 1653년 8월 11일 난파당한 후 1666년 9월 14일 그중 8명이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할 때까지 겪었던 일>이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 보고서는 <스페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라는 제목으로 즉시 3개의 출판사에서 출간되었고 프랑스어와 영어로도 번역이 되어 유럽 각국에서 굉장한 인기를 모았다고 한다. 번역 본 중에는 흥미를 위해 과장된 진술이 섞이기도 했다. 하멜이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와 이 보고서를 작성했을 때는 아마도 서른 일곱 쯤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멜은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았고, 그의 함께 동고동락했던 친구들은 조선에서 혼인을 하고 자식들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글 아트 엔 컬쳐가 제공하는 재미있는 프로그램 중에는 자신의 셀피를 찍으면 세계 각국의 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는 초상화들과 자신의 얼굴 사진이 닮은 정보를 비교분석해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있다. 지금도 제공이되는지는 모르겠으나.....우리 가족 중 절반에 해당하는 두 사람은 당연히 일본이나 중국인 그리고 한국인들의 초상화와 50-60% 매칭이 되는 것으로  나오는데, 나머지 절반은 17세기 이탈리아인을 비롯한 유럽인들의 초상화와 50% 매칭이 되는 것으로 확인되 나를 경악하게 만든다.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하멜 표류기가 궁금할 따름이다. 그리고 다시 확인되는 기록의 힘.    



매거진의 이전글 독서의 다른 형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