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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Sep 03. 2020

독서의 다른 형태

꼭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고 무료함을 타파하기 위해 타운센터의 몰에 나가 예쁘고 소소한 것들을 구해오는 정도의 대면접촉이 요구되는 나들이는 할 수 있다. 비누와 노트는 기분전환으로 쇼핑하기 좋은 소소한 아이템이다. 그날은 허니서클 향 비누가 세 장이나 나와 있었고, 재스민향이 나는 비누도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수채화로 커버가 장식된 튼튼하고 예쁜 노트들을 잔뜩 사들고 들어왔다. 내게 노트는 포스트잇과 같은 용도라 평소에는 찢기도 쉽고 스테이플러로 이어 붙이기도 쉬운 스프링 노트를 애용한다. 스프링 노트에 정리해 둔 내용은 컴퓨터 파일로 옮겨지니 실은 커버가 예쁘고 종이질이 좋은 노트는 용도를 상실한 지 오래다. 책과 아티클을 읽고 소화하는 속도와 효율이 중요했으므로 부담 없고 효율적인 얇고 무미건조한 종이를 선호했다. 수채화가 그려진 예쁜 노트는 액세서리이며 군더더기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와 예쁘고 튼튼한 노트를 잔뜩 모으는 이유는 견물생심 액세서리를 사모으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만, 독서의 방식과도 관계가 있다. 파일로 배달된 다양한 내용의 전자책이나 아티클을 모니터로 읽다 보니 읽은 내용을 종이 노트에 정리해 가며 요약본을 손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라고나.

미국 사회의 출판 지형은 일찌감치 상당 부분이 아날로그로부터 디지털로 옮겨가 있었기에 미국에 발을 디딘 후 내 독서의 90%는 모니터로 읽는 전자파일이거나 귀로 듣는 오디오북이었다. 박사과정 코스웤을 하는 동안에는, 그리고 졸업 후 강의를 하던 동안에도 필요한 책들과 논문들은 도서관에 신청하면 100% 전자 파일로 내 메일함으로 전송되었기에, 컴퓨터가 서재를 대신했고, 컴퓨터의 디렉터리가 책장을 대신했다. 메일함으로 무제한 배달되던 최신 전자서적과 챕터들과 논문들은 비싼 외국인 학비에 대한 타당성을 입증했다. 그리고 원하는 만큼 종이 출력도 허락되었다. 교내의 세 곳의 도서관에서 한 학기에 총 1000페이지의 출력용지를 사용할 수 있었다. 모니터에서 읽고 워드로 요약해서 출력하면 일은 간단했다. 이 나라에선 중고등학교도 교과서 없이 공부한다. 교과서가 없는 것은 아니고, 교과서가 컴퓨터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학기 시작 때 도서관에서 대출을 했다가 학기말에 반납을 하면 되지만, 애지 간한 교과서는 두께가 백과사전이라 학생들이 여러 권의 교과서를 들고 다닐 수가 없다.


강의를 하는 입장이 되었을 때도 교재는 종이책을 사면 온라인 책으로 접속이 동시에 가능했다. 실은 그래서 이 사회에서는 여러 해 전부터 대면접촉 없이 온라인으로 강의가 가능했던 것이다.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훨씬 관리할 것이 많고 과제를 다양하게 출제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배우는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처럼 골라먹는 재미가 있고 멀티채널 학습이 가능한 교육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온라인 관리도 따로 해야 했고, 일주일에 아홉 시간 서서 강의하는 일이 너무 힘에 부쳤다. 몸이 이미 많이 망가진 줄도 모르고 정신에만 채찍질을 가하던 가련한 시절이었다.

자유를 넘어 방만할 지경으로 책 읽는 자유를 만끽하는 요즘은 복 받은 날들이다. 독서의 방식은 여전히 전자책이거나 오디오북인데, 집안일 혼자 해야 하는 주부에다 멀티태스킹 세대라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해서는 성이 안 차는 거다. 운전하며 집안일하며 귀에다 정보를 쏟아 넣지 않으면 뭔가 좀 억울하다. 귀로 듣거나 눈으로만 읽은 책은 독파를 하고 나서도 어떤 허전함이 남는다. 허전함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책을 형태가 변한 나무라고 한다면 책의 낱장들은 말하자면 잎사귀다. 글귀에 줄을 긋고 떠오르는 단상을 적어가는 전통적인 독서의 과정은 책의 잎사귀에 세겨진 언어의 물리적 실체를 감각하는 과정인 거다. 종이책 애호가들에게는 추상적인 언어를 손끝에서 감각하는 일, 나무의 잎사귀를 넘기는 일이 실질적으로 중요한지도 모른다. 손에 들고 책을 읽는 전통적인 독서 행위에는 시각과 촉각 혹은 그 이상의 감각 채널이 관여한다. 시각으로 전달된 언어의 추상적 정보가 머릿속에서 화학적이고 전기적인 신경학적 프로세스를 거치는 동안 손끝의 피부를 통해 느껴지는 잎사귀의 촉감은 추상적인 언어의 프로세스를 몸으로 실체화하는 아날로그적 감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종이로 만든 책은 추상성과 감각이 만나는 현장이다. 책의 잎사귀에서 언어를 느끼는 과정이 생략되어왔던 나의 독서습관이 지금에 와서는 감각의 극대화를 원하는 것이다. 펄프로 만들어진, 글자가 세겨져 있지 않은 깨끗한 잎사귀가 필요하다. 더군다나 시원하고 상큼한 수채화가 그려진 예쁜 종이 노트는 빈 노트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사실은, 사촌동생이 보내준 두 권의 한글 책이 어제 도착해 책상에 올려 두고 보니 더 실감이 난다. 한국에서 만든 책은 어찌나 견고하고 예쁜지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이상한 힘을 가졌다.

프랑스의 작가 미셀 트루니에 선생님은 책이란 가볍고 피가 없는 한 마리 새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책과 독서의 본질을 흡혈귀의 비상이라는 섬뜩한 언어로 은유한다. “작가가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은 얼굴도 모르는 남녀 군중들 속으로 종이로 된 수천 마리의 새를, 바싹 마르고 가벼운, 그리고 뜨거운 피에 굶주린 새 때를 날려 보내는 것이다. 이 새들은 세상에 흩어진 독자들을 찾아간다. 독자들의 가슴에 내려앉으며 그의 체온과 꿈을 빨아들여 부풀어 오른다. 이렇게 하여 책은 작가의 의도와 독자의 환상을 분간할 수 없게 뒤섞여서 들끓는 상상의 세계로 꽃피는 것이다. 그다음에 독서가 끝나고 바닥 가지 모두 해석되어 독자의 손에서 벗어난 책은 또 다른 사람이 찾아와 그 내용을 가득한 것으로 잉태시켜주기를 기다린다.” 낯설고도 매력적인 은유다. 기가 막힌 은유이기도 하다.


최근에 와서는 얼굴도 모르는 독자들이 내가 세상에 내놓은 책을 필사 하노라는 소식들을 전해온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긴장되는 일이다. 집안에 머무르며 많아진 시간 여유와 아날로그적 감성을 회복할 수 있는 상황적 조건이 무르익었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겠거니.… 내가 만든 문장들을 손으로 옮겨 적으며 감각에 세긴 다니, 첫 책을 세상에 내놓은 저자에게는 감동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쓴다는 일의 책임을 무겁게 만드는 소식이다. 그 고마운 독자들을 생각하며 노트를 필요 이상으로 많이 샀다. 언젠가 전해드리게 될 기회를 희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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